형람 성경

[형람성경] 고린도후서 5장: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세움: 화목

형람서원 2024. 6. 1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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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고린도후서 5장: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세움: 화목

1-10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1-3절] [이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천막, 텐트]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앎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는’이라는 말은 앞장 끝에서(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한 이유를 보인다. ‘땅에 있는 우리의 천막 집’은 현재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것을 천막집이라고 부른 것은 임시적이고 영구성 없음을 나타낸다. 벽돌집은 비교적 영구적이지만, 천막은 그렇지 않다. 천막은 보통 임시로 사용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사용 후엔 걷어서 넣어두거나 옮겨서 다른 곳에 친다. 이것은 비유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얼마간 쓰면 낡아지고 쇠해짐을 표현한 것이다. ‘천막 집이 무너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켰다. 천막을 걷어 분해하여 보관하듯이, 사람이 죽어 몸이 땅에 묻히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흙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흙이 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몸을 떠난 성도의 영혼은 있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거처할 곳을 얻게 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성도가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 거처할 천국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의 영혼은 지금은 몸 안에 있지만, 몸의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안식할 것이다.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천국]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히브리서 9:11,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천국].”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께서] . .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천국]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2:22-23,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천국]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천국에 올라간 성도의 영혼이 장차 입을 부활체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몸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몸이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의 영혼은 지금 땅 위에서 탄식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은 영이 몸을 떠난 후 천국에서 거처를 얻고 장차 부활체를 얻는 것을 말한다. ‘벗은 자’라는 말은 영혼이 몸을 떠나 좋은 거처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영혼이 탄식하는 것은 성도의 성화가 불완전하여 늘 내면적으로 죄와의 싸움과 갈등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 지나가고 속히 새 세계가 오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4-5절] 이 장막[천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도들의 영혼들이 지금 세상에서 몸 안에 있으면서 탄식하는 것은 단순히 몸을 떠나고자 함이 아니다. 성도들의 소원은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워 단지 죽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영혼의 탄식은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고자 하는 탄식이다. 그 생명은 천국의 생명이요 영광스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지금 탄식하는 것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탄식인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도는 그 속에 계신 성령의 활동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천국의 산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의 구원 확신은 성경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경말씀과 함께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으로 말미암는다.

[6-7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담대하며]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다”는 말은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영광의 구원, 곧 내세 천국을 담대히 확신한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몸에 거할 때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주와 함께 있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성령으로 그와 함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과 교제하되 보는 것에 근거하여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한다.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성도는 죽음을 담대히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은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성도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성도의 소원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9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는 것’은 영혼이 몸 안에 거하는 것 곧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요, ‘떠나는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 곧 몸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곧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로 구원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뜻대로, 즉 성경의 진리와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이요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적 삶이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받을 것임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주 예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6:27, “인자(人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보상을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럽다. 성도의 부활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빌 3:21; 고전 15:43). 성도의 천국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계 21, 22장).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은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만일 누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중생한 자는 즉시 회개하며 죄를 떠나고 의와 선을 행하려 애쓸 것이다. 그것은 새 생명의 당연한 결과이다. 불신앙과 불의는 멸망할 자들의 특징이며 의와 선은 구원 얻은 자들의 특징이다.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도 중생치 못한 자요 사망 가운데 있는 자이다(요일 3:14).

그러나 상급은 우리의 선행과 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선한 행위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상이 다를 것을 보인다. 물론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눅 17:10; 계 4:10).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또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당연한 의무에도 못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대해 상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우리의 부족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실상, 우리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상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죄를 짓지 말고 바르게 살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에게는 죽음 후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몸의 부활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성도의 영혼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안식을 누린다. 그러다가 주의 재림 시에 영생할 수 있는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래의 일, 곧 주의 재림 때의 일이다.

둘째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원한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죄성이 없고 범죄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복되고 기쁜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을 기대하면서 오직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이 따를 것이다.

11-21절, 대속(代贖)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라

[11-12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우리 자신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주의 두려우심’이란 앞절에 말한 대로 마지막 날에 선악간에 심판하시며 보응하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아는 자마다 죄짓지 않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의롭고 선하게 살려고 힘쓸 것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권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다’는 말은 사도 바울 일행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뜻이다.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졌기를 바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삶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알려졌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을 고린도 교회 앞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짓 교사들 앞에서 그가 진실한 종임을 자랑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자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이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는 것도 악한데 허풍으로 무엇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더 악한 것인가!

[13-14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열심 있는 성도는 때때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이 그의 열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도가 열심을 낸다 하여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지만(신 6:5),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힘의 70퍼센트, 아니 50퍼센트도 하나님을 사랑치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열심 있는 성도가 미친 것같이 보여도 실상 그는 미친 것이 아니다. 성도는 결코 미쳐서는 안 된다. 온전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인 인격은 바른 정신을 가진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때나 인간 관계에서나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미친 것 같은 열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 때문이다. 성도는 그 사랑 때문에 핍박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홀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신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에 내어주셨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어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 형벌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들만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 개념이다. 속죄는 속죄물이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 밖에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담당하셨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그와 함께 실제로 죽은 것과 같았다.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구원 얻고 새 생명 얻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 곧 그가 매우 귀하게 여기신 자들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특별한 가치가 있고 여기에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정도로 알았었다(막 6: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셨다(고후 4:6).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모든 것들이 새롭게](전통사본) 되었도다.

구원 얻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이전의 것들, 곧 죄악된 것들, 정죄된 것들, 허무한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혼들은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새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 그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이다(롬 9:16; 11:36). 구원은 화목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다른 말로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한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친근한 관계로 회복되었다(골 1:21-22).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오늘날 목사들과 전도자들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것이다.

[1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또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죄인들의 많은 죄들을 그들 자신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사역은 이 화목의 말씀을 전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다. 화목케 된 자들마다 죄씻음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20절]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대사들]이 되어 하나님이[께서]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전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ambassadors)’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원수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위해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자들이 있었다.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은 자는 아니다.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인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교회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으나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자들, 그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21절] 하나님이[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정죄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3:24). 이것이 그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 구원이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우리는 이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사랑을 감사해야 한다. 한 사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요일 4:9 -10).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삶의 목적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했다.

셋째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 되게 했고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죄사함과 화목의 결과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참 평안을 누리며 담대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롬 5:1-2; 히 4:16).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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