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서원]고린도후서 3장: 새 언약과 성령: 주의 영광의 직분
[1-2절] 우리가 다시 자천(自薦)[자신을 추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너희에게서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You yourselves are our letter, written o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everyone.
오늘날도 어떤 사람을 신임하려면 추천서가 필요하다. 추천서도 다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좋은 교회나 목사들이 쓴 추천서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스스로 추천하거나 누구의 추천서를 그들에게 보낼 필요가 없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증거하고 증명하는 추천서와 같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행 18:11)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인격과 사도 됨과 충성함을 잘 알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이 사도인 것에 대한 추천서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인 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세웠다.
그 추천서는 종이에 쓴 것이 아니고 바울 일행의 마음에 쓴 것이었다. 그것은 종이에 쓴 것보다 더 생생했다. 고린도에서의 전도 사역은 종이에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바울 일행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없는 은밀한 편지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증거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공개된 편지이었다.
[3-5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a letter from Christ, 그리스도로부터 온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사람의 마음판, tablets of human hearts]에 한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자격을 말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 즉 그리스도께서 추천하시고 확증하시는 편지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추천서이었다. 그 추천서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 살아 활동하시며 증거하신다. 그 편지는 돌판이나 종이에 쓰인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판에 쓰인 것이었다. 성령께서 쓰신 이 추천서는 바울의 마음판에도 쓰였고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판에도 쓰였다. 마음판에 쓰인 그리스도의 추천서는 돌판이나 종이에 쓴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편지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이 같은 확신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고백한다.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 났고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 속에서 난 것처럼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긍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전도와 목회의 사역과 그 열매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한 후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6절]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as ministers of a new covenant)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글자, 율법 조문, the letter]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the Spirit, 성령, NASB)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성령께서는 살리는 자이심]이니라.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예레미야로 미리 말씀하신 바이었다. 예레미야 31:31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조된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옛 언약 곧 구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고 새 언약 곧 신약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구약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강조했으나, 신약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강조한다. 구약 아래서도 제사 제도나 성막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었다. 그러나 신약 아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밝히, 더 풍성하게 증거된다(요 1:17).
옛 언약의 일꾼들은 모세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또 새 언약의 일꾼된 것은 의문(儀文), 즉 율법 조문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죄인을 정죄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신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살리시는 이는 바로 성령이시니] 육은 무익하니라.” 로마서 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KJV).”
* 의문(γράμματος, letter)과 편지(ἐπιστολῶν, letters).
[7-8절]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성령]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복음 사역은 단순히 사람들의 말과 글의 사역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전도자의 직분은 성령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참된 목사들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목사들은 그 사역을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과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죽게 하는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면, 살리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이겠는가!
[9절]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정죄(定罪)의 사역이다. 그러나 복음은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롬 3:21-24).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의의 소식이다. 복음의 일꾼들은 죄인을 정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의를 선포한다. 전도는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전하는 사역이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면 의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럽다!
[10-11절]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더 큰 영광이 있다. 율법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다. 구약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역할이 있고, 오신 후 성령강림 후에 역할에 차이가 있다. 구약의 율법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다. 그것이 율법이 가진 시간적, 지역적, 혈통적 한계이다. 그러나 복음의 영광은 한계가 없고 폐지되지 않는 영속적인 영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완전한 의(義)의 영광이다.
[12-16절]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와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출 34:29-35).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친 후 그의 이마에 수건을 써서 그 없어질 광채를 가리었다. 그것은 율법이 장차 없어질 것이며 장차 나타날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는 그 수건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의식적(儀式的) 율법의 내용들은 그 내면에 감추어진 메시아의 사역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건이 벗겨져야 할 때이다. 복음 사역은 수건을 쓰지 않는 사역, 즉 가려진 것이 없는 사역이다. 복음의 진리는 은밀하지 않고 밝히 드러난 진리, 공개된 진리이며, 그 영광은 없어지지 않는 영속적 영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아직도 수건을 쓰고 있다. 그 수건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상징들에 대한 무지와 거기서 비롯된 잘못된 율법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져야 한다.
[17-18절] 주[께서]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적 본질에 있어서 영이시다. 주의 영께서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주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죄를 씻으셨고 그들을 의롭다 하셨고 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리셨을 때 죄로부터의 자유와 율법으로부터, 즉 율법 체계와 그 속박과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복음 안에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깨달은 자들이다. 기독교 복음은 은밀히 감추인 것이 없다. 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그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 지금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본받는 작은 빛에 불과하며 우리의 성화는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 없지만, 우리는 점점 더 그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으며 우리의 성화가 완성될 때 우리는 마침내 그의 영광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게 될 것이다(롬 8:29-30).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다. 그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다(눅 22:20).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한 바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거듭남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렘 31:33-34)를 내포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아래 있다. 거기에는 많은 영적 특권들이 있다.
둘째로, 구원은 성령의 사역이다. 전도와 강론도, 거듭남도, 회개와 믿음도, 성도의 성화도 다 성령의 사역이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셋째로,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했고 우리를 정죄했고 절망케 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완전케 되었다(히 10:10, 14).
넷째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은 실상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것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이 없고 우리를 위협할 것이 없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참된 자유와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6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했다.
형람서원 고경태
'형람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형람성경] 이사야 36 장 앗수르 산헤립의 침입 (0) | 2024.06.18 |
---|---|
[형람성경] 이사야 34 장 열국, 에돔에 대한 심판 (1) | 2024.06.14 |
[형람성경] 이사야 33 장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0) | 2024.06.14 |
[형람성경] 고린도후서 2장: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의 기쁨과 슬픔은.... (1) | 2024.06.13 |
[형람성경] 이사야 32 장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심(참고. 계 2-3장) (1) | 2024.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