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명제적 지식(사실적 지식, 논리적 지식, 규범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눈다.
지식은 사물지, 사실지, 방법지로 구분하기도 한다(J. Hospers, K. Lehter, D. Pears). 사물지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사물의 실체, 사실지는 사물의 특성이나 상태에 대한 서술적 명제 지식, 방법지는 인간의 욕구해결 혹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다.
또 지식은 암묵지(tacit knowledge)와 형식지(explicit knowledge)로 구분하기도 한다(Polanyi, 1966).
과학적 경험적 지식과 확실한 지식이고, 비과학적이고 비경험적이 지식은 원시적인 지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겼다(조경원 외 4인 공저, <교육학의 이해>,이화여대출판부).
사회는 개인지식(personal knowledge)이 어떻게 조직지식(organization knowledge)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개인지식이 공동지식으로 정착되는 것을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지식은 ‘협의 혹은 법’이고, 비규범적으로 정착된 것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는 ‘조직지식’이 다시 ‘개인화’되고 다시 ‘조직지식’으로 되는 ‘변함없이 순환하는 과정’이 일어나야 교회이다. 조직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신학이고, 개인지식을 전하는 것은 설교이다. 조직 지식을 이해하지 못한 개인 지식은 교회를 파괴하는 지식이 된다. 조직 지식이 없은 열정 사역은 열정적으로 교회를 파괴한다. 교회는 ‘복음(육화한 말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에서 ‘복음(예수 증인, 사도의 가르침)’으로 세워졌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교회를 세울 수 없다. 누구나 복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을 전하면 사람은 싫어한다. 가장 교묘한 복음은 우화적 해석이다. 가장 그리스도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사람을 바보로 인도하는 지식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복음은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그리스도적 지식이다.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아도 되는 복음 지식이다. 모두 공통적인 것은 조직지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지향성 지식’, ‘임시적 지식’, ‘명제적 지식(원천 지식)’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명제적 지식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 물이 100 도에서 끓는다고 배웠는데, 실제 물은 100 도에서 끓지 않고 그 이전에 끓는다. 100 도라는 것은 이상적인 상황이고, 실제 상황에서 물 끓음은 조건(위치, 도구, 기온)에 따라서 다르다. 물이 100 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누구도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할 필요도 없는 ‘임시적 지식’이다. 그러나 ‘명제적 지식’은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지식이고, 알아야 인간이 되는 지식이다. 문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지 인간은 없다. 필자는 그래서 인간이 되는 ‘임시적 지식’을 세우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지향성 지식이다. 명제적 지식에 다다르기를 지향하는 지식이다. 지향성 지식은 힘과 즐거움이다. 인간은 자기 탐욕을 기반을 움직인다.
<나가사키 평화기념관 정면에 있는 다카자네 야스노리 선생의 생전 모습>
일본(왜국) 나가사끼에는 원폭피해평화공원과 나가사카(長崎) 평화자료관(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주도한 것을 근거해서 1995년에 설립했다)이 있다. 한 공동체의 두 지식도 지향성 지식이고, 인간의 탐욕을 기반으로 한다. 다만 그 지식이 자기 이익인지 자기희생인지를 구분하면 된다. 양심적 지식이란 자기희생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펼치는 상황이다. 자기희생이 있는 지향성 지식에 대해서 양심적 지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수 양심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악한 사람은 자기희생적 지식인에게 자기가 좋아서하기 때문에 희생이 아니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순수 양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양심인도 그 조소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준 지식에 근거한 지식에서 진행하는 자기희생지식에 조소하는 것은 하늘의 벌(天罰)을 받을 것이다. 지향성 지식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명제적 지식으로 가는 즐거움과 힘을 제공한다. 설교는 지향성 지식이 많다. 그래서 동일한 본문에 다른 해석이 있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설교에서 명제적 지식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설교에서 명제적 지식을 말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명제적 지식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 설교는 복음을 듣는 자가 힘을 얻어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잘 믿고 삶에서 살도록 하는 하늘 양식이어도 좋다. 그런데 설교에서 헛된 힘을 얻고(패스트푸드) 과도 비만에 걸린 뚱보로 만드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비만에 있는 사람이 먹는 즐거움이 없겠고, 식욕이 없겠는가? 즐겁게 많이 먹으니 건강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값싸고 맛있는 설교를 많이 습관적으로 취하면 영혼비만증에 걸릴 확률이 너무나 크다. 영혼의 비만을 부르는 설교가 맛이 없겠는가? 먹어도 배는 부르는데 건강을 해치는 정크 푸드와 같은 설교는 두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바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가 바보로 만든 유럽 사회를 성경으로 각성시켰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 바보가 아니라는 바보가 성경으로 바보로 만드는 놀라운 바보 상자를 도입했다. 교회 안의 바보인 로마 카톨릭과 교회 밖의 바보인 철학이 세계를 주도한다. 그들의 지식은 임시적 지식을 맹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 지식은 하늘 지식을 기반으로 힘과 자유를 제공한다.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