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교회교의학 읽기(2) 서론: 기독교교의학에서 교회교의학으로

형람서원 2015. 8. 1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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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의학 읽기(2) 서론: 기독교교의학에서 교회교의학으로

 

발트는 1927년에기독교교의학을 집필하였다. 그런데 1932년에교회교의학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변질인지 발전인지 학자가 의견이 있다. 발트 신학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 논문이 있다. 발트의로마서 주석 초판(1919)은 스위스 시골 자펜필 목사가 세계 신학계로 나오는 출세작이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위기에 빠진 교회에 새로운 대안으로 유럽 교회는 발트의 신학 전개에 환호한 것이다. 1차 대전에 서명한 독일의 지성인, 신학자들, 발트의 스승들을 거부하면서 나온 작품이었다.

그런데 로마서 주석 초판은 사회주의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래서 발트는 로마서 주석(2, 1922)을 다시 개정하여 출판하였다. 발트의 로마서 주석 초판과 2판은 동일한 성경 본문이지만, 다른 전개로 성경 본문을 주해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교의학 출판 이후에 다른 방향으로 교회교의학을 출판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전개하였다. 그런데 교회교의학의 시작과 마지막까지 샬로테 카쉬바움(Charlotte von Kirschbaum, 1899-1975)’이라는 여비서가 동행하였다. 발트와 샬로테은 1924년에 만났고, 1929년에 발트의 집에 들어왔다. 1932년에 교회교의학을 출판하였다. 평생 발트의 집에서 함께 신학 작업을 하였던 샬로테가 196565세에 치매로 요양원으로 갔고, 교회교의학도 중단되었다. 발트는 1968년에 죽었고, 샬로테는 1975년에 요양원에서 죽었다. 발트의 아내 넬리(1893)1976년에 죽었다.


교회교의학 저술 33년은 발트와 샬로테의 35년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교의학 전체과정에서 샬로테의 역할이 빠진 기간은 한 번도 없었다. 풍자될 만한 이야기임에도 “35년 동안 함께 했다는 것만이 전해질 뿐이다. 발트의 비문에 샽로테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발트가 기독교교의학에서 교회교의학으로 전환한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아직까지 없다. 필자는 발트가 기독교교회의 개념이 명확해졌기 때문에 분리하였다고 생각한다. 발트는 기독교가 탐구 대상이 될 수 없고, 현재 존재하는 교회는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발트 신학의 출발은 1세기 기독교가 아니라, 현재 교회의 설교 행위에서 출발한다. 현재 교회 이룸과 설교 행위와 그 언어를 듣고 있는 행위 자체가 신비로운 사실이다. 기독교는 1세기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지만, 20세기 유럽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라고 볼 수도 있다.


20세기 유럽은 17세부터 시작한 계몽 철학이 완전히 점령한 시대였다. 계몽 철학은 이신론에서 출발하여 만유재신론까지 발전하였는데, 발트가 그 신관의 선두주자이다. 신학과 철학에서 범신론은 거부하고 있고, 계몽 철학의 이신론도 거부되었고, 새로운 신관 체계로 만유재신론을 도입한 것이다. 만유재신론으로 진행하는 교회를 본 것이며, 그에 부합하는 신학 체계를 이룬 것이다. 기독교는 1세기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고 선포함으로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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