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5장.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 비록 현명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알지 못했다고 단정하다. 비록 자연종교(7권에서 바로에 의해서 소개된)보다 바른종교에 근접하지만 이성의 질서에 있는 이성적 영혼(rational soul, animae rationali)에 불과하다.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가 모든 신들이 원래 인간이었음을 밝혔다. 즉 영웅들은 신격화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두 신학(조작적이고 도성적)은 플라톤주의자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아르케를 추구하던)도 양보해야 한다.
6장. 모든 것에서 자리를 양보 받은 플라톤주의는 칭송을 받을만하다. 그들은 어떤 물체도 하나님이 아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추구할 때 물질적인 대상을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불변성(unchangeableness), 자존성(only live), 단순성(simplicity) 등을 파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업적에 대해서 로마서 1:19-20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연결시켰다. 이러한 것은 육체적이고 본성적인 지식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즉 하나님의 불변성과 자존성을 말한다고 하여 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7장. 이성으로 판단해서도 오류가 발생하는 부류와 플라톤주의를 비교할 수 없다. 에피크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그렇다. 그들은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개념(notion)을 정신이 감각으로부터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프라톤주의자들은 정신(mind)에서 온 것과 감각(sense)에서 온 것을 구분했다(distinguished). 그래서 감각에서 온 것을 정신으로 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의 빛(lumen mentis)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에피크로스는 학파는 진리의 기준을 감각(sense)에 두었고, 스토아학파는 이성에 두었다)
8장. 최고선(summo bono), 지복(beatificum bonum)이 육체(body)로부터 혹은 정신(mind)으로부터 혹은 양자로부터 온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은 인간을 혼과 육체로(animo et corpore) 구분하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 선은 인간의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모두 동일하게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외부의 요인에서(명예, 명성, 부 등) 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선은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외부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내부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플라톤은 궁극적인 선을 덕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결론했다. 그들은 신(神)을 닮은 사람이 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즉 신을 아는 것과 닮는 것이 지복이라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플라톤은 신(神)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지복은 지혜를 탐구하는 자, 철학자는 신을 사랑하며 신을 향유(enjoy)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함보다 향유함으로 지복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게 최고선은 신(神)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향유해야 한다.
9장. 자연의 제1원리는 행복이라고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철학자들보다 플라톤이 기독교에 근접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0장에서부터 철학 위에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진술한다.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