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언약
고경태 목사
신학(神學)이란, 자기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술 방법이다. 자기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신학도의 표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도는 독서를 해야 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잠 27:17), 신학도인 우리의 신학을 날카롭게 해주는 것은 다른 신학도이다.
목사는 신학도인가? 신학을 연마하지 않은 목사는 복음의 진전이 발생하지 않음으로 반드시 세속적인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 신학이 쉽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많은 목사들이 세속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 점이다. 3년 혹은 7년의 신학 수련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근접하지 못하는 것은 신학에 대한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
구속(救贖)과 언약(言約)은 교회와 신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이다. 거의 모든 용어에 대해서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학도는 항상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구속과 언약에 대해서 용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본다.
구속(救贖, redemption, the Redeemer)과 구원(救援, salvation, the Savior)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막 10;45]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엡 1:7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골 1:14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임이니라 " [마태복음 1;21]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 빌 2:12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과 구속”은 병행 혹은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원(救援, salvation)은 일반 사전적인 일반적 의미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주는 것”을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죄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그 비참함으로부터 구하여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구속(救贖, redemption)은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예수께서 거룩한 속죄물(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제물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원죄를 대속(代贖)하여 자기 나라를 이루심”이다. 구약의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이신 예수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전자는 여호와의 백성의 죄를 사하는 사역자이지만,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자신이 사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이루심이다.
이때 이 두 용어에서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이 다르지 않지만, 구속은 역사적인 실현됨이고, 구원은 영원하신 경륜과 작정으로 볼 수 있다. 구원(救援)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경륜이고, 구속(救贖)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대속하심으로 이루시는 구원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구속은 원죄의 대속을 의미하고, 구원은 전인격적인 성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구원은 구속에서(죄사함) 시작하여 완성하게 된다. 또한 교회는 끊임없이 죄사함(속죄고백)을 진행하는데, 성화는 죄사함의 확신의 증진이다. 선교 사역에서 구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대 선교는 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넘어서 사회적 활동으로 죄사함의 사역이 아닌 포괄적으로 사역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구속과 구원을 구분 없이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간혹 질문이 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은 일치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언어에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이란 개념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현재에서 구속(救贖)이란 개념은 기독교에서 전유(專有)하고 있다. 구속(救贖)은 대속(代贖, ransom)과 같은 개념이다. 구속(救贖)은 ‘속죄제물’에 강조가 있고, 대속(代贖)은 ‘포로의 몸값을 지불함’에 의미가 있다. 신학에서 ‘구속주’라 하고 ‘대속주’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이해하는 우둔한 경우도 있다.
구속사(救贖史, Heilsgeschichte, The history of salvation)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안티 유저는 ‘구속사’를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목사들이 ‘구속사’라는 개념을 난발하는 것에 있다.
‘구속사’는 경건주의 신학자 뱅겔(Bengel, 1687-1752)에서 창안한 개념이다. ‘구속사’는 개혁신학에서 창안한 개념은 아니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주장한다. ‘구속사’의 해석에서는 흐름에서 끊어진 연결 고리와 과정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해석의 전형은 “유도순 목사”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혹자는 ‘구속사’를 ‘예수 그리스도 중심 해석’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설교’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인데 그것을 감추고 ‘구속사 설교’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구속사(救贖史)는 두 가지로 진행된다. 첫째 카알 발트로 초역사적으로 믿음만을 강조하는 형태와 둘째 오스카 쿨만의 계시와 구원의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해석하는 경향이다. 전자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후자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한다.
역사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강조하는 것의 위험성은 ‘교회’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카알 발트 신학에서는 교회가 그것을 증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치 영화 “노아”에서 인간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언약(言約)
먼저 언약은 쌍무적 성격과 일방적 성격으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현재는 쌍무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가장 명시적으로 주장한 신학자는 송제근이다. 그는 출애굽기 19-20장을 언약체결의 쌍무적 성격의 원형으로 보고, 거기에서 모든 신학을 전개한다. 서철원은 명시적으로 일방적 성격을 제시한다(참고, 서철원,『인간:하나님의 형상』). 언약의 일방적 성격을 부인하면, 첫언약인 아담 언약이 무효화되어 원죄교리 등 모든 것이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언약임에도 인간의 인격에 손상이 없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그 인간과 언약을 체결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심을 폄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약의 이중성과 단일성
언약 개념은 스위스 종교개혁가들의 공통된 성향으로 개혁신학의 성경이해의 전형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코케이우스 (Johannes Cocceius, 1603-1669)에서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이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8년)에 제시되었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상이성에 대해서 제시했지만, 통일성이 강조된 신학자로 평가된다. 그래서 칼빈에게는 마치 한 언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코케이우스에 의해서 개혁신학은 두 언약 개념이 체계화되었고, 웨스트신앙고백서에서는 명시적으로 두 언약,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체계화되었다.
개혁신학은 언약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델란드에서 사장되었던 언약신학을 부활시키면서 “구원협약(pactum salutis)”를 제안했다. 그래서 코케이우스의 개념에 영원한 삼위일체 경륜에서 이루어진 언약 개념을 제안했다.
그런데 카알 발트는 구원협약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며,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서 행위언약을 뺀 ‘은혜언약’의 한 언약을 구체적인 신학의 체계로 삼았다.
또한 “언약”을 강조하는 신학도들 중에서 두 언약인지 한 언약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개혁신학은 언약신학이기에 언약이 강조되는데 둘인지 하나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이에 서철원 교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첫언약과 새언약”으로 변경을 제안했다(국제개혁신학포럼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함). 혹 신학자들이 “옛언약과 새언약”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때 옛언약은 모세의 시내산 언약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위언약이나 첫언약은 순정한 상태의 아담과 맺은 언약이다. 행위언약은 모세와 맺은 시내산 언약은 아니다.
첫언약 이후의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 혹은 새언약의 성취를 위한 그림자에 속한다.
구속과 언약
구속과 언약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첫언약이 파기됨으로 구원의 성취가 선언되었다(창세기 3장). 언약이 체결되는 곳에서는 항상 제사(제물)가 동반되었다. 새언약의 체결 이후에 새언약의 주(主)께서 직접 속죄제물이 되셔서 새언약을 진행하셨다. 그래서 필자는 구속사가 강조되면 언약이 동시에 부각되어야 하고, 언약이 강조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구속사 혹은 구원이 강조되는데 언약(일방적 혹은 쌍무적)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구원의 경륜에서 인간은 방관자가 되고, 언약이 강조되는데 구속이 강조되지 않으면 인간의 역할이 부각되어 행위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구속과 언약이 함께 등장해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언약이 균형있게 제시되어 균형잡힌 신학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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