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성 읽기(3) 1권 10-15. 나그네 길의 마지막: 무덤
I권 10절.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난의 세상에서도 성도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다 바울의 말(롬 8:28)을 제시한다. 소유를 존재의 가치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에 유일한 방편이 될 것이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가 되어 모든 미혹의 근본이 될 것이다(딤후 6:9-10). 세상의 재물을 소유하려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을 움켜쥐려는 것이 더 위험하다. 놀라의 주교 파울리누스는 자발적으로 재물을 포기했는데, 그는 경건에는 컸지만 재물에는 극히 가난했다. 세상에서 재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만, 경건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극도로 적다. 그러나 성도가 얻은 보화는 썩지 않는 것이며, 썩어질 세상의 보화로 인생을 향유하지 않는다.
11. 세상의 삶에서 죽음은 종결, 위협, 두려움(공포)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생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죽음은 생의 위협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죽음 뒤에 있는 영생에 대해서 염려해야 한다.
12. 성도가 흙에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받은 것은 아니다(시 79:2 이하). 이 말은 학살의 잔인함을 의도하는 것으로 시체에 대한 불손한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장례식과 매장이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으로 제시했다. 성도는 육신의 부활, 땅에서 해체된 상태에서 은밀한 처소에서 다시 결합될 것이 약속되었다.
13. 토비드에서는 매장함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칭찬하는 부분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부분을 하나님의 섭리가 시신에까지 미치며 경건한 장례식이 합당함을 제시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외경에서는 합당한 영적 유익을 도출하지 않는다고 제시했다. 1:3) 합당한 이장(移葬)으로 요셉의 이장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장례식이 없는 죽음이 성도에게 어떤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했다.
14. 성도가 포로가 되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큰 위로를 제공하심을 믿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매딤나의 아리온(Arion of Methymna)의 이야기가 요나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불가사의하지만 믿어지지 않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15. 포로생활을 참아낸 모범으로 로마 장군 레굴루스(Marcus Regulus)을 제시했다. 그는 카르타고에 포로로 잡혀가 고문 끝에 살해되었다. 레굴루스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자기 신들을 숭배하며 죽음을 당했다. 숭배가 불행이 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레굴루스는 자기의 신이 자신의 이익을 박탈했지만, 자기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런 레굴루스는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도 기독교로 비난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고목사
'통전 기독교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장로교회 약사(연혁)의 범례(1) (0) | 2014.09.13 |
---|---|
하나님의 도성 읽기(2) 1권 1-9. 피도 눈물도 없는 현세 (0) | 2014.01.25 |
이것이냐, 저것이냐.... (0) | 2007.10.20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4)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 (0) | 2007.06.02 |
니케야 - 고대교회 역사 (0) | 2006.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