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종교개혁 496년, 종교개혁교회의 후예들은...

형람서원 2013. 10. 2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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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496년, 종교개혁교회의 후예들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루터가 공고하는 시점을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본다. 1517년 전부터 유럽 전역에서 바른 신앙을 위한 몸부림은 꾸준히 있었다.

1517년 루터는 왜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을 성당에 게시했는가? 그의 행동은 1,000년의 중세로마교회의 어둠을 광명으로 여는 선언이 되었다. 여명에서 아침이 된 것이다. 루터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 단지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열망이었다. 그런데 수사였던 루터는 1521년 1월에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되면서 새로운 기독교로 재편되었다. 당시 독일의 중세 로마 교회에 대한 민심을 알 수 있다. 독일은 루터의 종교와 로마의 종교로 분할되었다. 이 독일의 소식은 유럽 전역에 크고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는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가 활발했다. 인문주의는 ad  fontes(원문으로)를 구호로 고전 강독에 열심을 했다. 즉 인문주의에는 성경을 원문(히브리어와 헬라어)으로 읽는 모임이 꾸준히 형성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는 로마 교회의 인준을 받을 큰 명예로 생각했다. 그래서 루터에 놀란 로마 교회는 새로운 모든 운동을 루터파로 간주하여 박해했다. 칼빈은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을 읽으며 회심하여, 1534년 사제에서 성직록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우연히 도달한 제네바에서 큰 역경을 겪었지만 죽는 날까지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유럽은 루터파와 칼빈파로 종교개혁의 큰 줄기가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의 계절에 먼저 루터의 가르침과 칼빈의 가르침이 다른 것을 강조하고 싶다. 칼빈파로서 루터를 종교개혁자로 존경하지만, 루터파에서는 칼빈을 좋은 선생으로 존경하지 않고 평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칼빈은 끊임없이 쯔빙글리, 루터와 함께 연대하려고 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칼빈은 쯔빙글리의 후예인 블링거와 연합에 성공했지만, 루터파의 후예들은 더 칼빈을 거부하여 두 개신교가 형성되었다. 

2013년 10월, 496년의 시간에 그 종교개혁의 외침은 세계 전역 그리고 한국까지 퍼졌다. 496년의 시간에 종교개혁의 모습은 어떠한가?

1999년 5월에 교황에 루마니아 정교회를 방문하여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로마 교회와 루터 교회가 이신칭의 교리에 합의했다. 2006년에 서울에서 열린 19차 세계감리교협의회(WMC)에서 1999년 의인교리에 동참을 선언했다. 2013년 10월에 WCC가 한국 부산에서 개최된다.

루터의 가르침과 칼빈의 가르침은 다르다. 또한 칼빈의 가르침과 알미니우스의 가르침도 다르다. 칼빈파들은 아직까지 1999년에 선언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국 CRC(Calvin Reformed Church)에서 여성안수를 통과하는 등 행보가 심창치 않다. 미국 장로교에서 동성애를 통과시킨 교단(PCUSA, 2011년)도 있다. 물론 여성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PCA)도 있다.

종교개혁의 계절!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절대로 뒤로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은 개와 돼지와 같은 행동이다(벧후 2:22).

현재 다시 뒤로 돌아가려는 운동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제시해 본다.

1. 계시 계속 운동이다.

   로마 교회(천주교)는 성경과 전통(교황의 교서)을 계시로 본다. 즉 계시가 지금도 선언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66권을 최종계시로 선언했다. 성경의 충족성은 더 이상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은 계시 계속을 주장하고 있고, 어떤 교수는 계시 계속을 주장하기도 했다. 계시 계속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와 범위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계시 계속 운동에서는 성경의 본문보다 새로운 계시에 주목하게 된다. 많은 이단들은 모두 계시 계속 운동(66권에 첨가. 몰몬경,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으로 볼 수 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은(유니테리언은 부정함) 거의 없다. 그런데 계시 문제에 있어서는 정확한 개신교도 많지 않다. 성경 66권의 완전성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2. 십계명에 대한 의식이 없다.

   로마 교회의 십계명과 개신교의 십계명의 항목이 다르다. 2계명이 다르기 때문에 10계명도 다르다. 이러한 십계명에 대한 애매한 모습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십계명의 비문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십계명을 어겨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체들은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가? 곧 자기가 원하는 이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이는 로마의 표어, "모든 길은 로마로"를 따라, 모든 교회는 로마로 되어질 것이다.

3. 십계명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는 윤리운동이다.

   개신교회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다양한 윤리 운동을 펼친다. 윤리 운동은 매우 인간적이어서 기독교를 이룰 수는 없다. 기독교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된다. 이 성령은 말씀과 성례에 의한 감동과 감화로 교회를 이룬다. 말씀의 약화(설교로는 부족해?) 성례의 무지하면서도 기독교인의 모습이 마치 윤리적인 인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십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면 가장 지극한 윤리적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윤리 운동이 아니라 십계명 준수 운동을 하면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백성은 구원받은 목사의 말씀으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1517년 종교개혁운동은 생명을 건 기독교 회복 운동이었다. 루터의 후예이든지, 칼빈의 후예이든지, 뒤로 물러서지 말고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가자. 믿음의 선배들이 생명을 걸고 지킨 기독교의 가르침을 잃지 말자. 칼빈의 종교개혁은 성경과 고대교부의 가르침의 회복에 있었다. 2013년 다시, 칼빈과 고대교부와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의 후예가 되자.

고경태 목사(크리스찬타임스 발행인)

www.ctim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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