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보수'가 있는가? '열린 보수'가 있다면 '닫힌 보수'가 있다는 것이다. '닫힌 보수'는 무엇이고, '열린 보수'는 무엇인가? 만약 '닫힌 보수'가 없다면 '열린 보수'도 없다. 신학에 '보수'도 없다. '보수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통신학'의 적통 계승을 말하는 것이지, '보수신학'이란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보수신학'은 '근본주의'와 혼돈되기도 했다.
신학에는 '정통'인지, '자유주의'인지, '개혁파' 등의 분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열린 보수'라는 주장이 등장하는가? 그것은 자기 작의적인 판단으로 자기의 주장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헛된 추정으로 '닫힌 보수'라는 개념을 놓은 것이다.
'열린 신학'(open theism, 개방신론)은 있다. 열린 신학은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인 신개념이다. 이에 대해서 죤 프레임(John Frame, 1939~)이 [다른신은 없다: 개방신론에 대한 대답](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 2001)으로 변호하였다. 그러나 '열린 신학'의 반대로 보이는 '닫힌 신학'은 없다. '열린 신학'의 반대는 '정통 신학'이다. 열린 신학 외에 '정통 신학'에 대한 대항은 많다.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비롯하여, 유사정통인 '신정통주의'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정통 신학'이 교리신봉주의인가?
정통 신학은 교리신봉이 아닌, 교회의 머리이신 구주를 믿고 찬양하는 신학이다. 즉 교리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를 믿고 신봉하는 문장이 교리이다. 예수께서 나의 구주임을 믿어, 교리가 믿어지는 것이지, '교리를 믿어 예수를 믿는 구조가 아니다. 마치 교리만 믿고 예수를 안 믿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세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안들이 교리적 사안들인가? 문제의 원인은 교리의 부재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그러면 더욱 교리를 강화해야 정상인데, 역으로 교리를 권위를 약화시키는 '열린 보수'라는 부류가 들어온다.
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오직 구주의 은혜, 다스림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구주에 대한 바른 지식이 '정통 신학'이다. 그런데 근대 계몽철학에서 시작된 '교리(dogma)' 부정은 기독교 부정이었다. 이에 대해서 슐라이어마허가 당대 계몽철학의 지성인을 위한 기독교 신학을 발표하여 자유주의가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슐라이어마허와 신학내용은 달라도 교리를 부정하는 원리가 같다. 계몽철학과 동일하게 교리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자유주의 시대 이후로 신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었다.
교리를 '부정'하는 것에서 이제는 타종교와 타문화를 흡수하는 '열린'으로 전환하였다. 보수가 열었다면 무엇을 받아드리기 위해서 열었는가? 열고 닫음은 사람의 회에서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열고 닫음은 전적으로 교회의 공회(council)에서 할 수 있다. 지금은 공회적 성격을 가진 교회가 없다. 로마 카톨릭은 자기의 회의를 공회라고 하지만, 공회적인 성격이 없다. 지구상의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는 모든 교회가 모여서 이루어야 공회적인 성격이 있다. 여기에서 열어야 열린 것이다. 개인의 자격으로 교회의 신학에 대해서 열림과 닫힘을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특히 교회의 신학자들은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우려 자신의 신학의 내용이 교회의 신학을 대변하는지 반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부분별한 신학자들의 발표가 끊이지 않은 이 시대에 오히려 목사와 평신도들이 각성하여 깨어있어야 하는 매우 암울한 시대가 되었다.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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