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페북에서,, 교리? 믿음? 삶?

형람서원 2012. 7. 2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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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김천환 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저와 채팅이 된 것을 소개합니다.
김천환 목사님과 고경태 목사가 끊임없이 대화하다,,
결국 믿음은 행동으로(김천환 목사),,, 믿음은 믿음으로(고경태 목사)로 결론되었네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천환 목사님의 글>
교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다.
....그래서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해서는 안된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하는지는,
서로의 생각을 깊이 나누고,
같이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소통의 길이 열린다.

한 몸, 한 소망, 한 믿음, 한 성령, 한 주님, 한 세례, 한 하나님을 우리는 섬기고 있다.

우리는 차이점보다 더 강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이다.

나는 '주의'를 버리고, 다 수용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도 또다른 '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됨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자.
모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대하자.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자.
성령께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자.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하나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됨'을 지키는 것을, 그나마 덜 어렵다.

......

자신이 믿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는 틀은 다름아닌 '행동'이며, '삶'이다.
'삶이 이야기하게 하자'

 

황희상 맞습니다. "교리는 삶이다!" ^^
수요일 오후 7:46 · · 1
  • 고경태 ‎^^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결정사항이다. 그래서 교리를 무시하면 교회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념은 교리라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신념을 교리화한 종교를 사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 8:27 ·
  • 김천환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서로 동일한 부분은 '교의(dogma)'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분명 사교 맞습니다.^^ 그리고 이 교의를 설명하는 방식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정리한 것이 '교리(doctrine)'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요일 오후 8:32 모바일에서 ·
  • 고경태 dogma 와 doctrine 을 구별하시는군요~~ doctrine 도 개인의 믿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doctrine은 장로교에서 결정한 doctrine이지,, 장로교 어떤 한 창시자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삶과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문서화된 교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수요일 오후 8:39 ·
  • 고경태 doctrine은 dogma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dogma의 반복이라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설명과 강조가 있는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 8:40 ·
  • 김천환 dogma와 doctrine에 대한 의견은 지금 논의 사항이 아니구요. '개인의 믿음'이 '교회의 믿음'과 다르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니죠? 제가 '자신이 믿는 바'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따르는 신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곧 교회의 믿음이지 않겠습니까? 고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제가 말하는 것이, 결국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수요일 오후 8:43 ·
  • 고경태 교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다.
    ....그래서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해서는 안된다.

    에 대한 저의 의견입니다. 자신을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 아니라, 교회의 믿는 바를 존중하며 순종하여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선포할 수 있다. 선포가 강요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수요일 오후 8:45 ·
  • 김천환 네. 고목사님의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제가 '자신이 믿는 바'라고 말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교단 간의 신학적 의견차를 말한 겁니다.^^
    수요일 오후 8:46 ·
  • 고경태 교회는 교리적 일치를 이루어야하는데, 목사님의 의견처럼 교회는 절대적인 교의를 합의했습니다. 그러한 교리는 협상하는 것이 아니고 차이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수요일 오후 8:47 ·
  • 김천환 합의된 '절대적인 교의'란 무엇이죠?
    수요일 오후 8:49 ·
  • 고경태 삼위일체와 기독론 양성교리 입니다.
    수요일 오후 8:50 ·
  • 김천환 그걸 부인하면 기독교가 아니죠.
    수요일 오후 8:50 ·
  • 고경태 부인은 명시적 부인(세르베투스 처럼)할 수 있지만, 교묘한 부인(유혹)이 있기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칼 발트라는 신학자에게 삼위일체가 있느냐? 없느냐?도 합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철원 교수님은 없다. 다른 신학자들은 있다. 그러면 어느편에서 칼 발트를 볼 것입니까?
    수요일 오후 8:52 ·
  • 김천환 각론으로 들어갈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수요일 오후 8:53 ·
  • 고경태 ‎^^ 갑론을박,, 행동 비행동,, 보다 삼위일체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분별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착한 행동은 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 8:55 ·
  • 김천환 앞부분의 '자신'을 '각 교파에 속한 개인'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수요일 오후 8:55 · · 1
  • 김천환 그것을 모른채 이렇게 썼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신학을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그 신학으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것을 말하기 위한 것인데요^^
    수요일 오후 8:58 · · 1
  • 고경태 신학과 삶으로 전환 대비가 되나요???? 저는 선한 양심으로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
    수요일 오후 9:25 ·
  • 김천환 그것도 논의를 하다보면, 동일한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를 겁니다.^^
    수요일 오후 9:26 · · 1
  • 고경태 목사님께서는 도달하셨군요~~^^ 신학의 데이타가 어떻게 삶의 현장으로 전환모드를 갖습니까??? ^^
    수요일 오후 9:27 ·
  • 김천환 가장 단순하게 말해 볼게요. 교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합니다. 이 교리는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고, 어떤 삶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가로 전환되겠죠.
    수요일 오후 9:29 ·
  • 고경태 ‎^^ 그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다고 할 수 없죠~~ 신학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심 인데,, 삶에서는 어떤 모드로 전환되는가를 구현해주셔야되는데~~
    수요일 오후 9:31 ·
  • 김천환 그래서 저는 교의와 교리를 구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의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방점이 있다면, 교리는 교의에 따른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다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오후 9:33 ·
  • 김천환 목사님은, 교리와 삶은 연결이 어떻게 된다고 보시는가요?
    수요일 오후 9:33 ·
  • 고경태 ‎^^ 저는 어렵다고 했지요~~ 선한 양심의 책임있는 판단으로 봅니다.~~ 삶은 절대적인 가치를 주지 않지만, 신학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둘을 일대일로 전환하려는 것은 가치가 다른 것을 혼합시키는 행동이 아닐까요??
    수요일 오후 9:35 ·
  • 김천환 성경도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바울 서신은 교리를 설명한 후에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라 말씀하신다고 봅니다.
    수요일 오후 9:36 ·
  • 김천환 그리고 신학도 분명히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 9:38 ·
  • 고경태 그렇다면 삶이 더 단순하지 않을까요? 사랑, 인내, 온유, 절제, 겸손, 자족 이러면 좋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은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지, 삶의 디테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삶은 디테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이 삼위일체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어떻게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의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마케도니아로 선회하지 않았나요? 그때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도 삶이 아닌 복음의 전도 사역의 현장에서,,,
    수요일 오후 9:40 ·
  • 김천환 삼위일체는 우리의 하나됨으로 분명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 9:42 ·
  • 고경태 ‎^^ 삼위일체를 우리의 공동체와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수요일 오후 9:43 ·
  • 김천환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수요일 오후 9:43 ·
  • 김천환 제가 말하는 삶은 다 원리를 다루는 겁니다~
    수요일 오후 9:44 ·
  • 김천환 그리고 그 원리가 디테일을 결정하죠.
    수요일 오후 9:45 ·
  • 고경태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어야하는데,,, 거룩한 공동체 이룸은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원리에서 디테일로 적용되는 구체적인 연결선이 약하거나 없다는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 9:46 ·
  • 김천환 목사님께서 원하시는 연결선은 뭡니까?
    수요일 오후 9:47 ·
  • 고경태 명확,,,
    수요일 오후 9:48 ·
  • 고경태 객관,,,
    수요일 오후 9:48 ·
  • 김천환 원리가 명확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교리와 삶이 별개인가요?...
    수요일 오후 9:49 ·
  • 고경태 원리가 명확하지만, 삶으로 연결이 불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 9:50 ·
  • 고경태 저는 믿음과 행동이란 대별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믿음 만을 좋아합니다. 만약 교리와 삶을 대별한다면 저는 교리준수만을 강조할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 9:51 ·
  • 김천환 저는요, 목사님께서 어느 정도의 연결을 바라는지 그게 궁금해지네요^^
    수요일 오후 9:51 ·
  • 고경태 저도 제가 알기를 원하는데 잘 알지 못해서 계속 말이 꼬리를 무네요~~ 알았다 했을 때 넘어질까 두려워해야한다고 봅니다.
    수요일 오후 9:53 ·
  • 김천환 네. 저도 그걸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쓴 것이고도 하고요.
    수요일 오후 9:56 ·
  • 고경태 ‎^^ 그렇다면 삶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보를 훈련해야 합니다.
    수요일 오후 9:57 ·
  • 김천환 믿음과 행동은 대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지 않습니까? 믿음은 행동을 (방향 또는 구체적 행위) 결정하고, 행동은 믿음을 드러냅니다.
    수요일 오후 9:58 · · 1
  • 고경태 그러면 더욱 "믿음"만을 말해도 되겠군요~~ 그런데 왜 하나를 둘로 말하는지??
    수요일 오후 10:00 ·
  • 고경태 ‎"오직 믿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수요일 오후 10:06 ·
  • 조민복 아멘,
    수요일 오후 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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