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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상 맞습니다. "교리는 삶이다!" ^^
수요일 오후 7:46 · · 1
고경태 ^^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결정사항이다. 그래서 교리를 무시하면 교회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념은 교리라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신념을 교리화한 종교를 사교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념은 교리라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신념을 교리화한 종교를 사교라 할 수 있습니다.
김천환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서로 동일한 부분은 '교의(dogma)'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분명 사교 맞습니다.^^ 그리고 이 교의를 설명하는 방식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정리한 것이 '교리(doctrine)'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경태 dogma 와 doctrine 을 구별하시는군요~~ doctrine 도 개인의 믿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doctrine은 장로교에서 결정한 doctrine이지,, 장로교 어떤 한 창시자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삶과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문서화된 교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김천환 dogma와 doctrine에 대한 의견은 지금 논의 사항이 아니구요. '개인의 믿음'이 '교회의 믿음'과 다르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니죠? 제가 '자신이 믿는 바'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따르는 신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곧 교회의 믿음이지 않겠습니까? 고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제가 말하는 것이, 결국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고경태 교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다.
....그래서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해서는 안된다.
에 대한 저의 의견입니다. 자신을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 아니라, 교회의 믿는 바를 존중하며 순종하여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선포할 수 있다. 선포가 강요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해서는 안된다.
에 대한 저의 의견입니다. 자신을 믿는 바를 드러내는 틀이 아니라, 교회의 믿는 바를 존중하며 순종하여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선포할 수 있다. 선포가 강요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고경태 부인은 명시적 부인(세르베투스 처럼)할 수 있지만, 교묘한 부인(유혹)이 있기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칼 발트라는 신학자에게 삼위일체가 있느냐? 없느냐?도 합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철원 교수님은 없다. 다른 신학자들은 있다. 그러면 어느편에서 칼 발트를 볼 것입니까?
김천환 가장 단순하게 말해 볼게요. 교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합니다. 이 교리는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고, 어떤 삶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가로 전환되겠죠.
김천환 그래서 저는 교의와 교리를 구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의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방점이 있다면, 교리는 교의에 따른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다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고경태 ^^ 저는 어렵다고 했지요~~ 선한 양심의 책임있는 판단으로 봅니다.~~ 삶은 절대적인 가치를 주지 않지만, 신학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둘을 일대일로 전환하려는 것은 가치가 다른 것을 혼합시키는 행동이 아닐까요??
김천환 성경도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바울 서신은 교리를 설명한 후에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라 말씀하신다고 봅니다.
고경태 그렇다면 삶이 더 단순하지 않을까요? 사랑, 인내, 온유, 절제, 겸손, 자족 이러면 좋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은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지, 삶의 디테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삶은 디테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이 삼위일체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어떻게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의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마케도니아로 선회하지 않았나요? 그때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도 삶이 아닌 복음의 전도 사역의 현장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이 삼위일체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어떻게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의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마케도니아로 선회하지 않았나요? 그때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도 삶이 아닌 복음의 전도 사역의 현장에서,,,
고경태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어야하는데,,, 거룩한 공동체 이룸은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원리에서 디테일로 적용되는 구체적인 연결선이 약하거나 없다는 것입니다.
김천환 믿음과 행동은 대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지 않습니까? 믿음은 행동을 (방향 또는 구체적 행위) 결정하고, 행동은 믿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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