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사도된 바울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목사직에 관해서가 아니고, 사도직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그로부터 교역자로서의 명예나 칭호까지 감히 박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열두 사도들과도 동등한 자라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 첫째 사실은 바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된 교역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문제이다. 아무도 이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으며, 그 영광을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도 역시 인간의 권한 안에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한 정통이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둘째 부분은 특히 사도들에 관해서만 언급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반 목사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았다고 해도 별로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이 바나바와 더불어 가는 곳마다 투표해서 장로들을 장립시켰고, 또 그는 디도와 디모데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행14:23, 딩1:5). 그것이 목사를 선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사도들이 선택되는 것은 일반 목사들과는 달리, 말하자면 직접 주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이 열두 사람을 부르실 것이다(마10:1). 그리고 유다를 대신하여 그 후계자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교회는 감히 이것을 다수결에 의하여 선정하려 하지 않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행1:26). 목사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제비를 뽑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맛디아를 선정할 때는 제비를 뽑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그 지위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은 다른 직분과는 구별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바울도 일반적인 교역자 대열에서 자기를 제외하기 위하여, 자기의 소명이 직접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어떠한 수단으로써 된 것이 아님을 확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이 이방인의 사도로 처음 택정된 것이며, 갈라디아인도 그 이방인임에는 틀림없지 않는 가라는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답변은, 바울이 여기서 교회의 소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의 사도직이 보다 확실한 은혜와 선재적인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의 판단에 의해 바울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다. 신탁,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명령이 저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순응한 것이다.
2절.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라디아는 꽤 넓은 지방이다. 따라서 거기는 많은 교회가 여기저기 산재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안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념을 거의 버린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교회라는 칭호가 허용되어 왔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교회가 있는 곳에는 응당 신앙의 일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고백되며, 유일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며, 성례식을 거행하며, 어떤 성직자가 있는 곳에는 아직 교회의 표지가 있다고 대답한다. 교회가 언제든지 바라는 대로의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순수한 교회일지라도 역시 어떤 결점이나 오점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일반 교회에 있어서는 결점이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다. 거의 차마 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집회에 무언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해서 금방 그 집회를 교회라고 부르기 싫어할 만큼 교훈이나 행위의 결함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관대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의 결점이 있는 집회도 역시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정받기 때문이라고 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잘못을 비난하지 않았서도 안된다. 좌우간 교회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면 거기에 교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은, 교황파의 무리는 이 ‘교회’라는 한 말을 방패로 삼고 자기들의 주장은 모두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일찍이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정도의 조건이나 형태보다는 훨씬 달랐다. 바울이 만약 오늘날 생존해 있다고 하면, 교회의 처절한 폐허와 무서운 남비(濫費)를 보았을 것이며,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얼마 정도라도 교회의 몫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비록 모든 것이 교회라는 이름이 뜻하는 곳에 모두가 일치하지 않았을지라도 오히려, 이를테면 제유법에 의하여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4절. 우리를 건지시려고. ‘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바울은 죄에 대한 구속과 완전한 의는 아무데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충고해 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아버지께 바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밖에 그 어떤 것과도 대치해서는 안될 참된 제물이시다. 이 구속은 너무나도 영광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황홀하게 하여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게 한다. 더욱이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양편에 다같이 적절하다. (p.505)왜냐하면 한편 아버지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에 의하여 이 구속을 작정하시고 그 작정 속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구속으로써 만족한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돌연히 그는 큰 감동을 받아 감사의 기도를 터뜨리고 있다. 그렇게 한 것은 저들을 자극시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생각하도록 하며, 따라서 앞으로 훨씬 더 겸허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일반적인 권면이다. 좌우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마다,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마음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6절.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506.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때는 사실상 그리스도 밖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을 혼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는데, 다시 말하면 참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란 말이다. 하지만 거짓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의 조작과 복음을 혼합하였기 때문에 복음의 근본적 진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말하는 복음이란 거짓되고 부패하고 위조된 복음에 불과하다.
8절. 그러나 우리나..p.508.
‘나는 복음을 지키려 한다’고 입으로는 말할지라도 그 내용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소위 침묵의 신앙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는 교황파 무리 가운데서는 그렇게 하여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인식과 확실한 지식이 없는 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인이 복음을 순종하려 하면서도 여기저기 방황한다면 설 자리를 찾지 못하여 허공에 뜰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교훈(설교, 교리)에 확고히 머물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p.509.
바울은 이제 자기와 천사에 관한 언급을 그치고 자기가 전에 가르친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총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너희의 받은 것’이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항상 의심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감히 제안하는 자는 악마로 보도록 명했다. 여기서 그가 다른 복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인간의 조작, 그밖에 자기 전한 복음과는 동일하지 않는 이상한 사상이 섞였기 때문이다. 교황파의 교훈 전체가 다른 복음에 완전히 도착되었다는 것은 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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