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칼빈주석 - 로마서 제 4 장

형람서원 2010. 4. 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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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제 4 장

 

담당교수: 고경태 (010-8525-0288)

 

1절. 그런즉……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믿는 자는 그를 본받고 따라야 한다. 즉 아브라함을 의(義)의 모형(模型)으로 온 교회가 적용해야 한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조상이 받은 값없이 의로움의 믿음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으로……‘육신으로’라는 문구는 본래 ‘생래적으로’(naturally) 또는 ‘그 자신으로부터’(from himself)를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바울에게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인 것은 큰 영광이지만, 또한 조상의 믿음에 떠났을 때에는 전혀 무익한 것이다.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그는 그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브라함에게 소유된 의(義)는 인간적인 ‘자랑’이 될 수 없다.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바울은 믿음의 의를 행위가 없는 죄인을 위한 도움과 피난의 처소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에게 없는 믿음은 다른 곳에서 전가된 의(the imputed righteouness of faith)로 볼 밖에 없다. 창세기 15:6의 ‘믿는다’는 구원의 전(全) 언약과 입양(入養)의 은혜를 가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입양과 아버지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게하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약속을 제공하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청결한 양심과 순결한 생활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과 구별되는 때는 우리에게 의를 주신 그리스도가 보여져야 한다.

 

4절. 일하는 자에게는…… 본문에서 ‘일하는 자’는 선을 행하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이다. 또한 ‘일하지 아니 하는 자’는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는 아무 상급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부처와 같은 견해) 의는 우리가 당연히 받은 삯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5절.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자기의 상태를 경건키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에게만이 믿음의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6절. 일할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바울의 경우 의(義)란 죄 사함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과, 결국은 이 죄 사함 역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의를 만족시킴으로 죄 용서를 받으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만족설, 혹은 보상설, Satisfaction)은 배격되어야 한다. 반쪽사죄(half-remission)에 대한 로마교회의 주장은 성경 진술과 배치된다.

비느하스의 경우 행위가 의롭게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지 않고서 행위로 의로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는 믿음의 의의 결과이며, 행위에서 생기는 축복은 죄사함에 있는 복의 결과이다. 믿음의 참된 의가 행위의 의에 앞에 선행하지 않는다면 행위의 의나 복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과일과 열매처럼 믿음의 의에서 행위의 의가 맺이게 된다.

(9-10절)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에 의롭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자랑되는 행위의 첫째가 할례이다. 여기에서 할레는 율법의 첫 번째 의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되는 율법 준행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할례를 언급한 것은 율법의 의의 기초가 할례이기 때문이다.

 

11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할례가 의롭게하지는 못하지만, 특별한 용도 즉 믿음의 의를 인쳐주는 기능이 있어 전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은 아니다. 성례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구절이 된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표징들이다. 성령의 은밀한 은혜를 택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방편으로 제공되었다. 신성한 상징들인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마음에 인쳐짐에 대한 증거다.

할례의 표에 대한 이중적 은혜. 아브라함은 복된 씨(후손)을 약속받았다. 성도들은 약속된 씨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생활의 순결과 거룩을 요구하셨다. 육체의 부패에 대한 할례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세례의 두 요소, 거듭남의 생활과 죄사함의 증거. 할례가 무익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외적인 표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믿음의 의를 인치는 것으로서, 믿는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치는 데만 유효하다는 것이 인정되었을 경우에, 오늘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 대신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다른 표(세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절.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표면적 할례로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으라고 주장한다.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할례와 믿음, 이 둘을 분리시킴으로 칭의의 두 원인으로 주어질 혼동을 피하도록 한다.

 

13절.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율법과 믿음과의 대조를 반복하여 명백하게 함)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율법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관련되어 있다. 기업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은, 그가 율법을 지킴으로 그것을 공로로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양심은 그것들이 합법적인 권리에 의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값없이 거저 받았다고 느낄 때에만 참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 확실하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 복(benefit)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 (세상의 후사와 축복의 후사, 히 1:2)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타락된 상태가 고쳐져야 한다. 히브리서 1:2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후사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입양(入養, 하나님의 후사)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잃어버린 기업의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모형으로 삼아 천국 생활의 소망과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복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소유권이 그에게 약속되었다고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옮다.

 

14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율법으로 양자가 될 자격을 얻거나,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전을 기할 수 있는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믿음은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율법으로 양자되는 것은 불가능한 조건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은 불안과 걱정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약속들이 믿음으로 받아지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도록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수단인 율법 준수에 근거한다면 인간의 양심은 확신을 갖지 못할뿐더러 불안으로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도록 가르치는 것을 근절하자!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신뢰하지 않을 것 같으면 믿음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또는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인간의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은 율법 준수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굳게 믿고 붙잡는 것이다.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본 절은 율법의 반대 결과에 대해서 진술한다. 즉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징벌, 심판대을 지목하며,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을 밝히 드러낸다.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죄인이 받는 진노가 율법으로 말미암으며, 또한 죄인은 입법자를 증오하고 비방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는 율법으로 말미암는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심한 죄를 범한 것을 안다.

율법을 범함은 하나님께서 무엇이 불쾌하게 여기시는지를 아는 것이며, 범함은 단순한 범죄와 고의적인 완악함도 포함한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 사람 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믿음으로 되나니. 우리가 양자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행위로 되는 양자는 믿음이 사라지며 약속되 폐기되어버린다.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해서 양자되는 것이 확실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순수한 은혜만이 믿음 앞에 올 수 있다. 믿음의 객체는 순수한 은혜이다. 만일 은혜에 공로가 계산되게 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소산되며, 인간에게 주어진 확실성도 박탈된다. 중생은 완전하지 않음으로 인간들의 양심을 안심시키기에 부족하며, 자체로 약속을 재가(裁可)할 수도 없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는 광신적 율법주의자와 단순한 유대민족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율법에 속한 자는 그리스로를 배척하는 율법으 ㅣ종이 아니라, 율법으로 양육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을 말한다.

 

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본문의 관계대명사(who)는 원인을 나타내는 분사(praticle)의 효과를 함축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아버지가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로 택정되었다. 성경의 동사의 과거형은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 즉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영적 조상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을 완곡하게 표현한 목적은 그의 모범으로부터 이방인들에게 화제를 급선회시키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들을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능히 쉽게 살릴 수가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무(無)에서부터 나오는 것며, ‘부르심’이라는 말은 선포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성경의 일반적 의미로 해석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고개 한번 끄덕여 승낙함으로써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육신으로 죽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 신적소명(divine calling)의 조건은 죽은 자가 주님에 의하여 일으킴을 받는 것과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쓸모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18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모든 이치에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다(정리자 참고. Credo quia absurdum, 테르툴리아누스(160~220)).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바랄 만한 근거가 없었을 때에,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사실이, 아무리 사실 그 자체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일지라도, 바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According to that which had been spoken). 이 번역이 아브라함의 때를 가리키도록 하기 위함에서이다. 아브라함은 인생에서 종종 시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마다 약속(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19절.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백 세 이후로도 많은 자녀들을 낳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 세된 아브라함을 출산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이 믿기 어려운 방해와 환경이 많았다. 사라또한 생산능력이 없었지만, 생식능력이 없는 인간의 몸을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충분하게 드러내셨던 것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100세의 아브라함에게 출산의 능력이 있다고 주석한 것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생식능력의 회복으로 주석하였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우리가 불확실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러는 것처럼, 그가 방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이중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역경의 시련에 굴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요, 둘째 불완전한 까닭에 생기는 연약이지만, 믿음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는 것등이다.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이 성도에게 전달되었을 때에 이해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경이와 감탄이 나오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놀람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에 순종했기 때문에 책망받지 않았지만, 사라의 웃음에는 책망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아브라함의 칭의와 이방인들의 칭의가 정확하게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믿음 안에서 모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을 불합리한 것으로 반대하는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환경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들과는 반대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과 의롭다 부르셨다. 세상의 죄악과 부패가 둘러쌓을지라도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저지하거나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음과 대구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견고한 믿음으로 불신앙을 극복했고 승리하였다. 바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는 말씀을 덧붙여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인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이상 존귀케 해드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은혜를 거부하는 것, 말씀의 권위를 감소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참 종교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우리가 가장 어려운 것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장애물이 생겨날 때에 우리는 곧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의심한다.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과 결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만 온전히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실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를 가져다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은혜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말씀과의 이 관계는 주의 깊게 견지해야 하며 꼭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은 말씀에서 받은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혼란된 지식으로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확실하게 신뢰하지 않는 한 의롭게 될 수 없다.

 

23절.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칭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됨을 주장하였다. ‘역사는 인생의 교사이다’라는 이방의 격언이 옳다. 역사에서 건전한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성경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행동과 피해야 할 행동을 구별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의와 선하심, 그리고 악한 자들에 대한 그의 심판들을 우리에게 유일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생활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개인적 부르심), 의를 얻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신자의 조상으로 보편적인 존경을 받아야 당연하다.

성경의 역사들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건전한 교리의 열매를 얻는 방향과 신앙을 강화시키는 방법,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덕(德)을 배운다면 삶의 질서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더욱 견고하게 되며, 보호하심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요”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에 대해 기록된 것은 그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같은 방법으로 의를 얻음으로 이해해야 적합하다.

 

24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부활은 내세(來世)에서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생에 대한 확증을 보았다. 부활의 지식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준 근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인성)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이 교리가 아주 중요하다. 구원의 두 부분, 첫째,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하여졌고, 둘째로, 우리의 의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졌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의 부활과 구분시킴으로써, 그가 우리의 무지에 그의 표현을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의를 확보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의의 수여자가 되셨다. 이 구분에서 죄를 속하한 속죄제사에서 구원이 시작됨과 부활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죄를 위한 속상(贖償, satisfaction=만족)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부의 은총을 받는 데까지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 죄를 멸절하는 것이 속죄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신성)……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이긴 승리자, 승천하신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심을 이루지 않았다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다. 죽음을 이긴 칭의의 능력은 부활에 기인함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은혜가 완성되지만, 생명은 부활에서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한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인한 형별인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셨기 때문인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일어나셨다고 이제 말하는 것은,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충만하게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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