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조직신학 강의(1)

형람서원 2008. 11. 2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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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강의(1)

(고경태 교수, 바이블칼리지 조직신학)

 

1. 신학(神學, theology)이란?

    신학교에 대한 회의를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첫째 신학교에 들어와서 믿음이 떨어졌다. 둘째,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이론 신학에 너무 치중되었다. 등등이다. 이러한 회의와 비판에 대한 조그마한 답변은 이렇다.

 

첫째, 신학교에 들어와서 믿음이 떨어진다.

          신학교에 들어올 때에는 목사의 믿음, 일학년일 때 장로의 믿음, 2학년에서는 집사의 믿음, 3학교 졸업할 때에는 평신도의 믿음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에서 입학할 때의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교의 교육이 열정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져서 자기 열정을 소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하기 전에는 입학하려는 일념(一念)만 있다. 그러나 신학교를 다니면서 미래 사역에 대한 계획과 현실이라는 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벽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한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신 자에게는 사역의 목표도 분명히 제시하신다. 그래서 졸업할 때에는 더욱 더 강력한 능력과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어 바로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못한 자는 사역에 대한 두려움과 주저 때문에 열정이 사그라지고 만다. 초기 입학할 때의 열정은 참된 열정이 아니며, 졸업할 때의 열정 또한 사역의 현장에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성령의 불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타올라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으라고 명령하신다(엡 5:18).

 

둘째,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분명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신학을 가르친다. 신학교는 성경 학교가 아닌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이다. 특히 신학대학원(seminary)은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교단 신학을 가르쳐서 합당한 목회자를 양산하는 기관이다. 성경은 성경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성경만을 가르치는 신학교가 어디있는가?

성경신학, 주경신학에서도 신학을 가르치지 성경 본문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성경 본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없다. 결국 성경 본문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분깃이지 누구에 의해서 공급되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신학을 충실히 공부할 때에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된다. 즉 신학교에서는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신학은 성경이라는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신학과 성경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발전된다. 신학이 진보되면 될수록 성경을 풍성하게 알게 된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신학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모두 암송한다고 해서 신학자가 될 수 없고, 좋은 그리스도인 될 수 없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다.

교리(신학)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과 삶에서 몸부림한 흔적이다. 믿음의 선진들의 몸부림을 잘 읽고 이해할 때 믿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저작들에서 나온 하나님을 향한 헌신, 믿음의 결단, 경건의 풍성함을 알아가는 것 또한 대단히 유익된 작업일 것이다.

 

셋째, 신학교에서 이론 신학에 치중되어 있다.

         신학교에서 목회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실천 학문에 대한 요구이다. 이론 학문이 풍부해서 문제된 경우는 없다고 판단된다. 3년의 신학 과정에서 수 많은 커리귤럼에서 얼마나 깊이 있는 이론을 습득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교회의 문제는 실천의 부제가 아닌 이론의 부재이다. 그러므로 더욱 깊이 있는 이론을 수립해야 바른 실천 학문을 개진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얼마나 체계적인 이론을 갖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체계적인 이론과 논리를 갖고 교회의 지체들을 리더해야 한다.

실천은 이론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기초가 없는 구조물이 어디 있겠는가? 이론 학문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이론이 없을 때에는 항상 유행하는 교회 운영 프로그램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교회는 창설 이래로 변하지 않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구주를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학을 함으로 우리의 믿음과 지식은 필연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학생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을 떨어뜨리려는 학교와 교수가 어디 있게는가?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에게는 교회를 사역할 수 있는 리더의 자격이 주어진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더욱 강한 그리스도인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목양하는 목자(양들에게 주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자)로 세워져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다. 세례 받을 때에 고백했던 믿음의 주요 온전하케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을 때에도 변함없는 주(主)이시다. 고백의 내용이 같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월은 흐르고 고백의 내용은 같을 때에 단조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부요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행동이다. 군인들이 모두가 같은 군인이 아니다. 해군(해병)에는 DI(Drill Instructor)라는 하사관 조교들이 있다. 그들은 똑같은 군인이지만 그들이 받은 훈련의 강도는 일반 군인과 전혀 다르다. 훨씬 강도 있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은 총으로 사격을 하고, 똑같은 군복을 입는다. 그러나 사격하는 폼, 군복의 절도 등은 다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모두가 같다. 그러나 깊이와 길이, 높이와 넓이는 다르다. 이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사역자의 권위(무게)이다. 다른 지식이나 자격증, 다른 능력이 목회자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사역자의 권위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신앙의 옥석(玉石)을 구별할 수 있는 변별력을 갖게 된다. 종교개혁 이래로 기독교는 많은 교파로 혼란을 겪고 있다. 교회가 참과 진리의 시금석이 될 수 없고, 성경이 진리의 시금석이 될 수 없다. 교회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이단이 많으며, 오직 성경을 표어로 삼는 이단들이 많다. 오히려 이단의 열심히 정통 교회의 열심보다 특심한 경우가 많다. 여호와 증인이나 구원파, 신천지의 사람들이 성경을 암송하는 것을 본다면 성경으로 정통 신앙을 변호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의 시금석이 될 것인가? 오직 예수(Sola Christus)이다. 모든 이단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 신앙에서 쌓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신앙에 이르는 첩경(捷徑)이다.

      정통 교회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뵙고서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유지하였다. 신앙고백에 배치되는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에서 추방시켰다. 그러나 거짓의 집요함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계속 유혹과 공격을 감행하였다. 20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참과 진리를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미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시금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붙들어야 한다.

모든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되면 모든 신학에서 풍성한 열매들을 얻게 된다. 조직신학은 신학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구성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가 없는 분야는 없다. 그런데 신학의 중반부에 예수 그리스도가 놓이게 된 것은 신학이 논리적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성경의 시작도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신앙의 인식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로부터 시작한다. 신학의 입문에 있는 신학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임으로 서론에서 신학이 시작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신학서론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고 시작한다면 신학은 무미건조한 신학이 되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열매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할 수도 없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역사에 대한 소고

 

      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을 세계 역사의 원점으로 삼았다. 출생년도에 대한 의견은 불일치하지만 일치하는 의견은 예수의 실제적 존재이다. 어떤 기독교든지 예수의 역사적 실제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했다. 다만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정통신학이란 고대 교회에서 믿고 추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고백하고 추구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고대 교회의 예수 이해를 신화로 분류하여 제거하여 새로운 예수 이해를 제시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동일한 방식을 취했지만 예수를 하나님으로 승격시키는 일을 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고, 신정통주의 신학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 것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예수가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 방식은 정통 신학이 이해한 것과 다른 것이다. 즉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 되신 예수에 대한 정통 고백을 배척하게 됨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칼 발트(Karl Barth)가 『교회교의학』에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문항을 제시하여 정통 신학으로 혼돈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Barth는 정통 신학이 고백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통 신학을 배격하는 진술을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정통 신학을 배격하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은 사도들이 고백하고 추구한 교회의 고백을 배격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의 사도성을 무시하고 사도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떠난 새로운 이해가 참된 예수의 이해라고 주장한다.

      예수를 한갓 나사렛의 촌부, 촌부의 죽음이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는지에 대한 미스테리가 교회의 신비가 아니다. 예수를 아무리 격하시키지만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교회의 실존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높이지만 하나님처럼 높이지 못한다. 그러나 정통 교회에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다. 참 하나님이심으로 교회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주(主)가 되신다.

       어떤 성도가 황급히 놀라 목사의 서재로 뛰어 들어왔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은 너무나도 대단합니다. 어떻게 바다를 가르고 백성을 구원해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는 친절하게 그 바다는 홍해바다가 아니라 갈대바다랍니다. 갈대바다는 허벅지까지 차는 얕은 바다에요. 그 바다를 이스라엘이 건너갔답니다. 성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일 후 다시 그 성도는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할 수가요..... 허벅지까지 차는 물에 이집트의 전 군대를 몰살시켰어요.....

       성경을 인간의 이해로 전락시킬 때에는 더 큰 혼란이 가중된다. 예수의 이해에도 이성의 능력에 호소할 때에는 더 큰 혼란이 가중된다. 그러나 믿음에 호소할 때에는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주는 유익이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예수를 나사렛의 랍비로 전락시킨 신정통주의에서 해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교회의 형성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어쩔 수 없이 부활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형성을 달리 설명할 수 없기에..... 나사렛의 랍비의 가르침에서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운동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은 실패한 인생에서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이 나올 수 있을까? 예수는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참 하나님이시다. 강력한 영향력이 아닌 참 생명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실제적 존재를 명확하게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빌라도도 육체에 오신 하나님을 보았다. 인간의 눈에 들어온 하나님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증명한다. 증명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역사(fact)를 믿는 사람들에게 핑계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부정한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함의 놀라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놀라움, 구원의 경이를 설명하는 것이 신학이다. 구원의 경이에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이 신학을 할 때에 새로운 이론은 만들지 모르지만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신학은 이루지 못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아는데, 나의 영혼 또한 천하보다 귀한 것도 알아야 한다. 그 가치를 알게 한 것이 바로 구원의 경이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000년 전 이역만리에서 죽은 나사렛의 예수가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 되심이 어떻게 수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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