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2. 박형룡의 G. C. 베르까워와의 만남(1955년) -이상웅

형람서원 2008. 8. 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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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본인의 총신대 대학원 Th.M.논문의 일부입니다. 각주는 모두 탈락되고 말았습니다.  

 

2. 박형룡의 G. C. 베르까워와의 만남(1955년)


2. 1. 박형룡의 화란 방문과 베르까워의 만남


   박형룡 박사가 십 수 년 동안 想望하고 의지했던 화란 개혁주의의 본산인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신학부를 방문한 것은 1954년 10월에서 1955년 4월 어간에 전 세계 신학교들을 시찰하는 도중에이다. 박형룡은 1955년 2월 22(화) 저녁 6시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네덜란드를 방문한다는 기대감과 설레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루터교의 스웨덴으로부터 칼빈주의 네덜란드에 왔다는 의식은 보다 더 유쾌한 기분을 가졌다. 네덜란드에서 3 일 반의 순회는 개인적 교회적, 신학적인 여러면에서 보다 더 광범위한 접촉을 경험하게 하였다.1)


   3일 반의 네덜란드 체류 기간 동안 박박사는 2월 23일(수)에는 레이든과 헤이그를 방문하였고, 2월 24일(목)에는 드리베르흔(Driebergen-박형룡 박사는 三山이라고 뜻을 부기함)에 소재한 국가 개혁 교회(NHK) 신학교를 방문하고, 당시 교장으로 있던 헨드리꾸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1914-95)와 면담하였다.2) 다음날에는 우트레흐트(Utrecht) 대학교를 방문하고, 교의학 교수인 아놀드 판 룰러(Arnold A. van Ruler, 1908-70)를 만나 1시간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박박사의 짧은 방문 일정 기간 중에 자유대학교를 방문하게 된 것은 2월 25일(금) 늦은 오후 시간에 였다. 자유대학교는 당시에는 시내 한 복판을 흐르고 있는 Keizersgracht가에 소재하고 있었다. 박박사는 우선 자유대학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3)


        그러나 여러 학부를 포함하여 학생 총수 2천명에 달하며 그 중에 신학생 4백명 (본국만은 250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창립한 보수주의 대학 신학이요, 전세계에 있어서 칼빈주의 정통 신학이요, 전세계에 있어서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아성이다.4)


그리고 박박사는 자유대학교에 대하여 “오래 상망하며 경앙하던 자유대학교”라고 고백하여 적기도 하였다.5) 박형룡은 우선 이사회 서기인 뎅크링크(Dengerink)와 면담하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장남 H. H. 카이퍼를 계승하여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두더 나우타(Doede Nauta, 1898-1994)박사의 집에서 만찬을 받으면서 면담하였다.6)

   같은 날 저녁 8시경에 나우타 교수의 아들의 인도를 받아서 박박사는 교의신학 교수인 베르까워 박사의 사저를 방문하게 된다. 이 부분은 본 연구와 관련해서 중요한 대목이므로 박박사가 회고한 글의 전문을 인용해 보겠다.

   

        학생의 지로로 조직신학 교수 뻘카우어(Berkouwer) 박사댁에 찾아가니 저녁 8시가 지났다. 씨는 다수의 칼빈주의 저서를 내고 英譯문도 여러 권이 되었다는 것이 서가상(書架上)에 배열된 서적들을 일별(一瞥)할 때 알려진다. 그의 최근 저서  은혜의 승리』(The Triumph of Grace)는 빨트의 교의학 전부(말세론은 제외,  빨트는 아직 말세론을 완성하지 못하였다)에 대한 비평이라 한다. 빨트의 교의학   전질도 적치되어 있다. 그 전질은 너무 홍대하여 아무라도 독파하기 곤란하지만  뻘카우어 자신은 소시부터 한 권씩 독파한 고로 전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각국에 자유신학이 만연하고 칼빈주의 옹호의 대임(代任)이 그에게  있음을 설파하여 격려하였다. 그는 금후 통신으로 상호 교통하여 신학교육에 상호 제휴할 것을 제안한다. 자유대학교의 학제에 대하여 많은 문답을 하지 못하 고 다만 화란에 있는 다른 대학 신학부의 그것과 대체로 동일하다는 것만을 알았다. 그러나 이 대학 신학부에서는 시험이 전연 없고 졸업 학년말에 가서만 있다고 한다. 이것은 구라파 대륙 여러 나라에 통행하는 일반적 규례이다. 네덜란드어와 라틴어가 준비되어야 이 나라에 와서 신학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 학생들의 네덜란드 유학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는 한스럽게 말하였 다. 오래 상망하며 경앙하던 자유대학교와 그 요인들의 방문은 이렇게 간단히  마치고 말았다. 동 개혁교회는 자유대학교 외에 캠펜 고등학교(Kampen High   School)의 또 하나의 신학교를 갖고 있다고 한다.7)


2. 2. 박형룡의 베르까워와의 만남의 의의


   이상의 박형룡 박사의 글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도록 하자.

  첫째, 우선 박박사는 이 방문을 통하여서 베르까워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적어도 이 방문 이전에는 베르까워 교수의 저술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고백의 행간을 살필 때에 분명하다. 그는 이 방문을 통하여 카이퍼가 세우고 그 자신이 첫 교의학 교수였으며, 바빙크가 후계하고, 또 헤프가 후계한 교의학 교수직이 베르까워라고 하는 신학자에 의하여 승계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까워 교수의 서가에 꽂혀있는 저술들을 일별하면서 그의  저술들이 영어로도 출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박형룡박사가 베르까워를 초면하게 된 1955년 2월까지 영어로 쓰여진 저작이나 또는 번역된 저서들이 어떤 것이 있었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르까워 교수의 박사논문이나 초기 저술들은 현재까지도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영어로 첫 선을 보인 것은 그가 1949년에 출간하기 시작한  <교의학연구(Dogmatische Studiën, Studies in Dogmatics )>에 속한 책들이다. 영역본의 출간 순서로 보자면, 『하나님의 섭리』(1952), 『신앙과 성화』(1952), 『신앙과 칭의』(1954), 『그리스도의 위격』(1954)등이다.8) 이외에도 베르까워 교수가 1952년에 미국에서 강의한 내용들을 출간한 소책자 『현대적 불확실성과 기독교 신앙』(1953)이라는 책자가 그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9)

  둘째, 박박사는 1954년에 출간된 베르까워 교수의 바르트 신학 비평서인 『은혜의 승리』에 대하여 언급한다. 박형룡은 The Triumph of Grace라는 영어 제목을 부기하였지만, 박형룡이 방문하였을 당시에는 아직까지 영역본이 출간되지 않았을 때였다. 칼 바르트에 의해서 최대의 찬사를 받은 바 있는 베르까워 교수의 본 저서는 1954년에 화란에서 출간된 후에, 1956년에 영역본으로, 1957년에 독역본으로, 1962년에 한역본으로 출간되었다.10)

  셋째, 박박사는 당시까지 베르까워 교수의 저술들 가운데 한 권의 책도 읽은 적이 없지만, 방문시에 베르까워 교수가 세계 칼빈주의 신학 옹호의 대임을 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격려하였다(박박사는 연령적으로 베르까워교수보다 6세가 많았다). 그리고 베르까워 교수는 자유대학교 신학부와 박박사가 속한 장로교 신학교간에 상호 제휴하여 신학 교육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박형룡은 이러한 제안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으나, 화란의 학제상 화란 신학부에 와서 공부를 하려면 네덜란드어와 라틴어를 먼저 이수해야만 한다는 난관이 있었다.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은 언어들을 먼저 습득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박형룡은 이러한 학제상의 문제점 때문에 한국 신학도들의 자유대학 유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네덜란드어와 라틴어가 준비되어야 이 나라에 와서 신학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 학생들의 네덜란드 유학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는 한스럽게  말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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