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07-09-14] 사도행전 5:27-42 가말리엘의 불가지론적 판결
제목: 가말리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적 판결
내용: 공회 앞에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진술하는 사도들에게, 가말리엘의 판결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판단이 됩니다. 가장 인간적인 판결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판결입니다. 그럼에도 채찍질하여 석방하는 모습은 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27-28절) 제사장의 판결 = 금지령을 어김과 자기 판결 잘못으로 규정함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제사장들은 두 가지의 죄목으로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첫째, 공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음과 둘째 자기의 법정에서 결정한 것(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사도들이 폭동을 교사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사도들은 폭동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자제하고 있습니다(26절 주석 참조). 사도들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회복된다고 주장합니다. 모세의 놋뱀이 광야에 들려진 것과 정말로 유사합니다. 현재 로마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의 악행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면서도, 혹 인정하지 않더라고 용어는 사용하면서, 제사장의 행위와 동일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분명히 제사장의 금령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거역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4:19, 29절)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최고 권위의 대제사장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옳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제사장도 더 이상의 배도는 감행하지는 못합니다. 침묵이 사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법령을 따라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의 출처는 없으며, 제사장의 고유 직무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직무로 백성을 위로하는 사역을 합니다. 백성을 책망하는 사역은 선지자의 영역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직을 겸했던 사람은 모세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 최초의 선지자입니다.
29-33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마땅하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29절) 변호의 요점은 사람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행 4:19)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권위를 주어 인간을 통치하도록 합니다.(이것은 부모의 권위와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인간 통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첨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인간에 의해서 실현되지만, 인간의 뜻과 의지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을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도 일치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도들이 기적과 함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 자기들의 멸망 위기로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의 사역자, 부모, 왕(주인)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만약 국가의 통치자가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의 직무와 영향력이 상실되게 됩니다. 만약 그것이 실현될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도들의 고백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왕, 관료, 목사) 자기 직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형국이 됩니다. 아무리 직책이 명예롭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감소시키며 그리스도의 지배를 손상시켜서는 되지 않습니다.
30.The God of our fathers. 사도들은 자기 변호를 시도합니다. 그것은 제사장들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고 주장하기에, 참으로 누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지를 변호합니다. 가르침의 정당성이 ‘나무에 달아 죽음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을 성경의 예언으로 증명합니다. 즉 베드로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Karl Barth는 기독교와 다른 신인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a trinitatis)만 다루었지, 실체를 다룬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교회교의학, §. 8, 3. 삼위일체의 흔적). 발트는 정복자가 정복된 신학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이며, 흔적으로써 가치로 규정합니다. 발트가 비록 유대교의 신관과 자기의 신관을 일치시켜(초대교회와 동일하게), 자기의 신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하지만, 교회와 유대교의 분리됨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발트의 교회는 유대교와 연결된 교회이며, 기독교 교회는 유대교와 단절된 교회입니다. 단절의 책임은 회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에 자기가 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책임이라는 것을 오늘 구절에서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임이 정당하다고 규정하는 제사장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참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 이스라엘이며,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Whom ye 사도들은 이스라엘(교회, 제사장&교황)의 수호자로 자부하면서 최고의 영예를 소유했던 진영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치욕이 영광을 감소시키지 않았으며, 능력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치스러운 죽음의 방식이 죄인의 사악함을 치료하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31. Him has God lifted up. 불신앙의 사람들이 고안해낸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위탁받으신 직책을 성취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란 그의 능력을 지칭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올리워지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인간들 위에서 통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높이 올리워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는 사단과 세상과 대립됩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는 임금(the captain)과 구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시는 임금으로서, 혹은 구원의 창시자로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해 세상의 최악의 자리에서 하늘의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셨습니다.
To give repentance.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주는 방식이 ‘회개’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하게 하여, 죄의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십니다(the sum of the gospel).1)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방향 전환이며, 외적인 행동으로 자체를 나타내주는 일입니다.2)
“우리는 이미 '회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 바 있다(2:38에서).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전향이요 나중에 그것은 외적인 행동으로 자체를 나타내 주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중생케 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는 기능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註-서철원은 칼빈의 하나님의 형상은 순정성으로 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어본다면 서 교수의 이해는 정확합니다.)을 회복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부터 의에 복종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개혁을 일으켜 주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변화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도 없는 것이 되는 일이다.
회개란 자발적인 회심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정을 변화시키셔서 돌과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단단하고 뻣뻣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시며 그래서 마침내 꾸부러진 것으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그러한 자발성의 의욕을 일으켜 주는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가 아니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이끌려지기까지 날마다 더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어버릴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회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과 성령의 항구성은 구원파와 반대되는 구조입니다. 구원파는 회개의 단회성과 성령의 연속성을 주장합니다. 오순절은 성령의 반복을 주장합니다. 회개의 반복도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의 단회성과 회개의 반복성을 주장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이 자기자신과 세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 그것은 확실히 회개의 시초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출발했을 뿐 아직 목적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에서 회개를 시작하신 바와 같이 또한 우리에게 인내심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이지만 그것이 죄의 용서와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는 결함이 언제나 붙어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대하여 (p.205)은혜로우시기보다는 적대시해도 좋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는 곳에 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후자의 은혜는 결코 전자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 반면에 복음이 이 두 부분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써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사실, 그리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이 터득하지 않고는 그것은 불완전하게 될 것이요, 또는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얻어지는가를 간단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32. And we are his witnesses. 사도들은 자기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만을 공중 앞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Luke putteth words in this place, instead of things, according to the Hebrew phrase. And we are his witnesses of these words [or things,] 원어에서는 ρήματα로 verba, word가 정당하지만, 대신에 rebus, thing로 번역됨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요점이 하나님의 증인임을 제시함에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번역들이 thing으로, 개역 ‘이 일’로 번역하였습니다.
And also the Spirit.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주셨으며, 성령의 열매는 교리의 정당성(approve their doctrine=성령의 내주)을 인정하였습니다. In that they say to those which obey him,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상으로 하나님께서 넘치는 상을 주십니다.
이 부분에서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3)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자신의 교회의 덕을 위하여(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주신 방언, 예언, 해석, 병고침, 또는 그와 유사한 은사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이 성령은 바울에 의하면(갈 3:2) 듣고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하심은 믿음의 원인이 됨으로 믿음에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풍성한 은혜가 따라오게 됩니다. 마 13:12는 뒤에 오는 성령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풍성한 은혜는 믿음의 가슴(the bosom of faith)을 비움으로 가능합니다. 즉 믿음은 갖지만, 앞의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의 조명과 은혜를 풍성케 하는 믿음이 차이가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믿음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3. They were cut in sunder. 칼빈은 제사장들이 베드로의 설교에 감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였는데,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것은 버림받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분명한 선포를 거부하는 것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교정하기는커녕 더욱 날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양심은 움직였지만, 회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광기(狂氣)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가말리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모습에서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34-39절) 가말리엘의 불가지론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34. 칼빈은 제사장의 광기를 가말리엘(바리새인)을 통해서 저지시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말리엘은 온 국민이 존경하는 당시의 대 학자(34절)였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제사장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말한 두 가지가 다 분명히 옳다. 즉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찾아야 한다.”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대항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도,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지 못함으로 시간만을 연기하지만, 가말리엘의 판결은 여기에서 끝이 나고 맙니다. “요약한다면 가말리엘은 올바른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온 것은 전 세계가 대항한다할지라도 확립되어지며, 사단이나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린다할지라도 창조자요 수호자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게 됩니다.
36.There arose one Theudas. 36-37절, 드다(고대사 20권)와 유다(고대사 18권)의 순서는 요세푸스의 역사 진술의 순서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 후(post, 37절)’을 ‘한 편(moreover, or besides)’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진술이 아니라 두 사건을 진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가말리엘의 인용의 문제점은 유다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핍박이 없는 것은 교회와 전혀 다른 상황인데 동일한 상황에서 비교하는 것은 비교에 오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인 이 구절의 시기가 죽으신 후 12년 정도가 경과하였다고 이해합니다. 12년으로 이해됨으로 드다는 2-3년 동안 일이 종결되었지만, 사도들이 12년 동안의 고난에도 끊임없는 인내로 교회를 지키며 성장시켰습니다.4)
That he was some great man. ‘스스로 자랑(선전)하매’는 자기가 스스로 상당한 인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드다는 자기가 요단강을 마르게 하여 건너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거짓된 사람이었습니다. 드다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닌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그런 부류와 참된 사도를 비교한 가말리엘은 얼마나 어리석은 학자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학자의 양심이 없는 상태입니다. 견줌은 견줄 수 있는 가치가 있어야 함에도 전혀 맞지 않는 대상을 견주어 비교하면서, 자기의 지혜와 관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40-42절) 가말리엘의 지도대로 사도들을 채찍과 협박하여 놓아줌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40.Having beaten them, they commanded. 가말리엘의 충고는 받아드려졌지만, 제사장들은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하였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비록 불가지론자에 의해서 놓임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복음은 수 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왜곡과 멸시를 당합니다. 비록 사람을 생명을 아낄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항하는 불행한 형국이 됩니다.
41. Then they went rejoicing. 사도들은 채찍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고통도 개의치 않고, 성령의 기쁨으로 모든 것을 이기어 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영의 기쁨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they overcome this sorrow with spiritual joy). “우리는 우리의 등에 십자가가 지워질 때에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서 계속 지고 나아갈 때 고난과 불안과 더불어 싸워야만 할 것을 배우게 된다.”
That they were counted worthy. 그리스도인에게 고난과 환란은 영광이 되는데, 그것은 치욕의 십자가, 불명예의 극치인 십자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때문입니다. 가장 처참한 곳에서 가장 고상한 승리의 깃발을 날리신 주(主)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받는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흔적(갈 6:17)을 자랑하였습니다.
“사실 백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세상의 모든 승리보다 훨씬 뛰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위로의 기초가 됨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광의 동참자 또는 동반자가 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응하게 된다는 이 문구에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5)
42. They ceased not. Constancy did also accompany their Joy(항구성은 그들의 기쁨과 함께 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승리 혹은 용기를 주어질 것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은 고난은 성도에게 복된 일이며, 이 복을 위해서 괴로운 싸움을 하지만 결코 교회에 이탈자가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들은 죽음을 향하여 진군하기 때문에 채찍 맞는 일은 진군을 방해하거나 퇴보시킬 수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길이란 미묘한 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작은 박해를 통과해 왔으면서 우리는 마치 이미 퇴역군인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즉시 그 횃불을 넘겨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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