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15] 사도행전 6:1-7 교회의 흥왕과 문제 발생

형람서원 2007. 9. 1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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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15] 사도행전 6:1-7  교회의 흥왕과 문제 발생


제목: 교회의 흥왕과 문제 발생

내용: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나뉘어 구제의 불평등 현상이 발생하여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직무로 전문화되고, 집사(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택하여 구제하는 일로 첫 교회에 직분자를 세웁니다.


1-6절) 불공평한 구제 행위로 헬라파의 원망으로 공평한 구제를 위해서 집사를 세움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1절) 집사제도(deacons)의 발생의 때, 의도와 의식. 첫째 칼빈의 질문은 왜 처음부터 집사제도를 수립하지 않았는가? 왜 교회의 불평이 있은 후에 좋은 집사 제도를 수립하였는가? 성령께서 인도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였는가? 답은 “일에는 때가 있다.” 때보다 먼저 일을 하게 될 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좋은 의도의 목적이 퇘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원들이 집사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한 후에 직분을 세워 교회에 더욱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부터 완전하게 형성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시작이지만 완전하게 진행되거나 완전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부패한 존재입니다. 교회의 진행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거룩한 제도(교회의 본질을 감당하기 위한 제도)를 설립해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강조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라, 고아, 과부와 나그네를 경대하라 입니다.

  사단은 교회에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유혹과 계략을 펼칩니다. 사도에게 주어졌던 기도와 말씀 그리고 구제의 사역은 사도의 직분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도록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구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자 할 것이지만, 사도들은 자기의 소명, 은사에 충실하게 위해서 구제의 사역을 분리하여, 사역을 감당할 직분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충실하게 자기 직분과 은사를 활용하며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집사 직분자를 세움으로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고, 나의 범위를 범어선 부분에서는 과감하게 절제, 중지할 수 있는 결단력을 함양(涵養)합시다.

   The number increasing.  교회의 증진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우리 본성의 타락은 이러한 성공에 방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위선자(가라지)들이 교회에 잠입하게 되며, 그 악함이 감염시켜 타락시키는 것이 즉시 발견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에 의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때에 교회는 한 가지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증진”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교회의 증진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며, 두 생각이 나뉠 때에는 증진을 위해서 합의와 절제를 해야 합니다. 결국 칼빈의 교회 분리는 증진을 위한 합의 도출에서 결렬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리되지 않으면 교회의 근본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에 필요불가결한 선택이 된 것입니다. 

  A murmuring of the Greeks.  계층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완전히 중생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불평이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이해합니다. 즉 교회 훼방자의 선동에 미혹되어 불평을 위한 불평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기사는 원인에 대한 해명이 없이 단지 사건을 보도만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문을 읽을 때에도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사건보도로만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그것은 사도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이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정당하게 한다고 노력할지라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수령자의 입장에서 자기 소외감으로 더욱 크게 가중될 수 있습니다. 칼빈은 헬라파 과부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구제가 실행되지 않음으로 인정합니다.


   2.The twelve having the multitude called unto them 사도들은 자기의 사역에 대한 불만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아량과 침착함으로 신속하게 악의 순을 자르고 치료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모든 분노와 대립에 의해 결집이 된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은 더욱 힘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사도들의 수중에 있지만, 사도들은 제자들과 함께(렘 31:34) 토의하여 일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It pleaseth not. It is in Greek [ουκ αρεστον]‘마땅하지 않다=즐겁지 않다’ 을 칼빈은 ‘더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발표한 것은 어떤 판결이 아니라, 보다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험은 지혜의 아버지다) 사도들은 구제하는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이 과중한 짐을 지고 있었지만 묵묵히 감당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과중한 구제의 직무를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유지시켰으며, 그 직무를 연결시켜 주어 교회가 교회되게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도록 다른 일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단념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임무라는 것이 사역자에게 전적으로 할당되어야 함으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의 주교는 첫째, 성직 매매로 부를 축적하였고(The Popish bishops did suck(“Ingurgitarunt,” ingulf, swallow up) up great riches under color of the ministration or deaconship) 둘째, 주교들의 많은 업무량에 대해서 “열 머리를 가졌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으로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주교들은 ‘봉사하는 식탁’에는 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식탁에 관여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궤변은 자기들의 식탁에 관심을 갖는 자는 남의 식탁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We know what a holy thing it is to be careful for the poor.). 사도들은 이 두 직무(복음 전하는 일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을 동일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사도들보다 더 수준이 낮음으로 지적합니다. “사도들은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단념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Therefore, brethren, look out.   집사를 세운 목적 =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함. 집사들에게 성찬용 접시를 다루게 하는 교황주의자들은 얼마나 무성의한 교회 업무를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집사직의 선택은 교회에게 허용된 일입니다. 직분자는 투표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직분자의 자격은 “성실하고 지혜와 그 밖의 성령의 은사로 갖추어졌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칼빈은 투표를 “독재와 무질서한 방종 사이의 중간 길”로 제시합니다. 칼빈은 우연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께 많은 손해를 끼쳐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교회의 필요에 의한 숫자이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를 주목해야 하는데 성령의 충만한 은사  뿐만 아니라, 확실히 지혜까지 구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없이는 직분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사직은 매우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당치 않는 불평에 직면할 수 있는 어려운 직분입니다.


   4. And we will give ourselves unto prayer.   목사들은 자기들이 날마다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해도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읽으면 좀.... 자기가 할 설교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첨가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5. Stephen, full of faith. 누가는 믿음과 성령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스데반은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은 니골라를 계시록 2:15에서 니골라로 제시함으로 배도한 사람으로 지목합니다. 그래서 직분자를 선택할 때 더욱 경계해야 될 것을 강조합니다. “성령께서 여섯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그들의 판단을 지도하신 일은 큰 일이며, 성령이 교회로 하여금 일곱째를 선택하는 과오를 범하도록 허용하신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실수에서 겸손을 유도한다면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타락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겸손하게 주를 섬길 것을 격려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6. Having prayed, they laid their hands upon them. 안수하는 일은 율법 이래로 성직 수임의 엄숙한 상징이었습니다(Laying on of hands was a solemn sign of consecration under the law). 사도들이 집사들에게 안수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드림바됨을 인식하여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의식 자체(형식)은 무의미한 것이기에, 기도가 함께 병행되어 사도에 의해서 교회의 귀중한 직임을 하나님의 권위로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수받음은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사도들이 교회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기도와 안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수하는 일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심으로 질서와 품격을 고양시켜 주셨습니다. 즉 안수는 그 자체에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에 의한 예식임으로 교회는 꾸준하게 준수하야 됩니다. 집사의 직분을 성직으로 이해하는 것은 칼빈의 독특한 견해입니다. 칼빈은 모든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함으로 성직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직분은 목사에게만 성직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집사에게도 부여됩니다. 그것은 ‘안수’라는 성경의 형식이 부가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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