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13] 사도행전 5:12-5:26 반복되는 핍박 중에 주님과 함께 한 사도

형람서원 2007. 9. 1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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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13] 사도행전 5:12-5:26  반복되는 핍박 중에 주님과 함께 한 사도


제목: 반복되는 핍박 중에 주님과 함께 한 사도

내용: 솔로몬 행각의 설교에서 5000명이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며,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자, 이적과 기사나 일어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감옥에 투옥하지만, 주의 사자의 인도하심으로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지만 백성의 눈치를 보는 제사장들은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12-16절) 사도들의 놀라운 기적에 많은 사람들이 따름

    12절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2절)

       기적에 대한 소고: 칼빈이 제시하는 기적은 “복음에 적합한 기적”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기적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을 입증합니다. 그의 선하심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능력과 선하심을 기적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자들은 고침을 받고, 마귀에게 놓임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를 받음을 상징합니다. 병자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푸는 것은 선(善)입니다. 그리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것은 능력(能力)입니다. 칼빈은 기적이 말씀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중세 로마 교회의 기적이 성자에 의한 기적 등 신비주의적 현상들이 난무하기에 강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에 기록되어진 병자의 치료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회복하게 하는 복음이 병자의 치료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침대(couches, 15절, 옛 사람들이 그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버릇이 있던 작은 침대)를 메고 올 정도로 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And they were all with one accord.  초대교회는 특정한 시간에 함께 모이는 습관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교회는 각자의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공동집회, 한 마음으로 결합된 공동체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는 위험을 무릎 쓰고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에 힘썼기 때문에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13. And of other durst no man.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적(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충격으로 사도들을 얕잡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위협의 강도도 증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인도하는 초청이며, 증가되는 위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대한 방해입니다. “그러므로 기적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안는 데까지 나아오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악한 양심으로 인하여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믿고 주께 나아가는 자(14절),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자(13절)-그러나 인정은 하는-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교회가 능력과 순결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5.The shadow of Peter, as he came. 교황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즉 순교자의 유골을 자랑하는데, 칼빈은 그들의 속임수를 극렬하게 비판합니다. 성경을 자기 편의로 이해한 결과로 성경 이해를 제시합니다. “순수한 신앙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단언해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복음의 대사(大使)로써 능력을 소유함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칼빈은 로마 교회가 성자(聖子)의 보호를 받는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사람들은 성자의 보호를 받아도 그리스도에게 멀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17-26절) 사도들이 투옥되지만 탈옥되어 성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함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 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에 성도의 수효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 각종 은사가 탁월하게 구비됨, 놀라운 기적의 실현 등을 보고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면으로 충만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실현에서 악한 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잔인성이 더욱 격화됨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의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맹렬하게 핍박하지만(17-18절), 사람은 두려워하는(26절) 불일치되는 심성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교회가 바로 서면 사단이 물러가고, 교회가 침체되면 사단이 극성을 부립니다. 교회의 책임을 더욱 가중시키는 현상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정복한 결과입니다. 초대교회는 전투의 과정이며, 313년의 기독교 공인으로 세계를 정복하여 2000년의 세계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통치 아래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7절) Which were with him.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제사장 그룹의 지도자들입니다. 누가는 당시의 분쟁이 사두개인과 주도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에 대한 부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은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분쟁이 회당과 교회의 분리의 근거로 이해합니다. 즉 AD 70년의 성전 파괴의 근거의 제공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성전은 파괴되어 돌 위에 돌도 남지 않는 폐허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핍박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사두개인들의 반역 때문입니다.

       They were filled with zeal.   칼빈은 zeal을 emulation-경쟁 (or indignation-분노)로도 번역하는 것 보다 원문이 더욱 좋다고 비평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시기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자기들의 미신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he speaketh generally of the perverse and violent force wherewith hypocrites are carried and inflamed to maintain their superstitions).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지 않는 모든 것은...... 칼빈은 이러한 사두개인의 열심을 교황주의자의 열심과 병행하여 이해합니다. 아무리 교황주의자들이 열심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잘못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은 복수해야 되는 폭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정당화시키게 되며, 최고의 미덕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불타는 잔인성은 겸손한 행동과 상치됩니다. 겸손으로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하며, 폭행으로 선과 악을 정리하려는 것은 바르지 못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하는 것이 자유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선교 금지 국가는 이슬람교와 로마캐토릭 국가입니다. 프랑스가 로마교회의 주도권 국가이지만, 그들은 위그노전쟁(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사건, 위장결혼으로 칼빈주의 귀족들을 하룻밤에 3,000명을 살해함)에서 얼마나 많은 칼빈주의자들을 살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19. The angel of the Lord. 여호와의 사자,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아야함 다만 우리들의 생명이 그의 손에 의하여 그럴 필요가 있는데도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 주께서 ‘주의 천사’를 사용하셨는데, 천사는 주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기적이 밤에 행하여 졌는데(The angel openeth the prison in the night),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는 보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칼빈).


   20. Speak in the temple. 하나님께서 사도를 석방시킨 이유는 복음을 성전에서 전파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도망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잡힌 장소인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 핍박에도 복음이 침묵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힐 장소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The words of this life.   복음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교리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의 속죄 제사를 드림과 중생의 영으로서 우리의 양자의 보증이 되십니다.1)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사도들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주의 천사는 복음을 전할 직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this) 생명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지시 형용사인 이라는 문자”는 “마치 천사가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것과 같이 명확하게 지시하는 것으로, 복음이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칼빈은 “hypallage, the words of this life”을, “a new revelat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새 계시)”가 더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21. And when the chief priest came. (사도들은 새벽부터 가르치는데, 대제사장은 회의를 소집함) 대제사장은 놀람으로 아침 일찍부터 회의를 소집하여, 합법적으로 핍박하기 위한 모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악한 모의(악의 회중)와 복음(의인의 회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동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동이 공존합니다.

   칼빈은 끊임없이 교황주의자와 비교시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합법적이 교회회의를 대표성을 앞세워 복종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합법, 외적인 완전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절시키는 제사장 회의와 교황의 회의가 일치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회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회의는 무효화가 됩니다. 악마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교회를 술책합니다. 합법이라는 외적 형식으로 가장하는 것은 악마가 숨을 수 있는 적당한 교리(핑계)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He brought them without violence.(26절) 비록 성전에서 가르치는 사도들을 잡아왔지만,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도들은 순종하여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 선동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제사장들에게 잡혀갑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웅변으로 예루살렘에서 대 소란이 일어나는 것과 대비됩니다. 그리고 다음번의 출옥에서는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모습을 감추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순종하고 적응하기 위해서 각별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에게 포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가 되는 제사장은 사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람에게 포악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난무하며 합법적으로 행동하지만 모든 불법이 자행됩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듯, 우리 또한 합법적으로도 악한 자의 합법을 능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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