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12] 사도행전 4:32-5:11 바나바와 아나니아

형람서원 2007. 9. 1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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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12] 사도행전 4:32-5:11 바나바와 아나니아


제목: 바나바와 아나니아

내용: 예루살렘 교회는 영과 육의 나눔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죄사함받은 백성들이 서로의 물건으로 통용할 때에 갖은 자들이 자기의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교제했습니다. 바나바와 많은 사람들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것을 흉내내려다가 그만 성령을 시험함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제5장)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32-37절)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과 바나바

    32-35절) 예루살렘 교회, 36-37절) 구브로 사람 바나바의 결심


    32. And the multitude.

        예루살렘 교회의 세 가지 덕목은 첫째, 한 마음, 한 뜻(one heart and one soul)이 된 것, 둘째,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함, 셋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였고, 성도는 은혜를 받음(33절)입니다. had one heart;  5천 명의 수가 일치를 이루는 일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지배됨을 강조합니다. ‘마음과 뜻’은 ‘의지(will)’를 의미합니다.

     And no man did say.  심령의 일치와 외면의 일치 중 내면의 일치가 우선함을 누가가 말합니다. 개인적 이익을 주장하는 공동체에서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될 때에는 개인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부자들이 몸소 실천함으로 가능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천국)요, 부자들은 화평케 하는 일(하나님의 아들)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3. And with great power.

       이 부분을 칼빈은 교리 부분으로 이해하고, 숫자가 증대되었어도 사도들에게 복음 전파의 열정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부활’만 언급하는데 제유법(提喩法)으로서 복음 전체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부활이 주된 문제(사두개파, 제사장)였기에 부활을 제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리새파와의 갈등은 보이지 않으며, 바리새인인 사울도 제사장의 지시를 받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nd great grace was 재물의 공유와 복음의 선포는 무리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성실과 자제, 겸손과 인내 등 많은 덕(德)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가난한 자와 부한 자)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맑스의 이론의 근원이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동분배의 원칙. 그러나 외면한 것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세워진 공동체를 외면하였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동분배를 실현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공동분배는 자발적인 마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공동체에도 공동분배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재물을 공유하며 공의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증진될 수 있도록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34. For so many as were. (from time to time, occasionally, sometimes.)

       개역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so many는 불확정한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niv는 from time to time으로 의미번역을 하였습니다. 즉 소유의 전부를 팔았다는 것이 아니라, 요구되는 만큼을 충족하기 위해서 팔았다는 것입니다. 첨가하여 생각한다면 “부자들이 자기들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연간 수입으로 형제들의 가난을 구제한 것만이 아니요, 그 토지 자체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그들은 관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제시한 이해는 구제의 긴박성, 형제에게 빈궁한 자가 없어야 됨을 강조합니다.

  ‘바나바(36-37절)’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당시에 모든 사람을 능가한 헌신, 유일한 토지를 매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역사(말씀)를 읽고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철판보다 더 두꺼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1) 칼빈은 당시의 성도들은 ‘노랭이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잔인하게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물건에 대한 탐욕은 신성모독입니다. “오늘날(칼빈 당시)에는 몰인정한 사람이 너무(노랭이, 강탈, 횡령)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땅 위에 사는 것까지 시기하고 물이나 공기나 창공의 공동 이용까지 아까와 하는 정도이다.” 칼빈의 주장은 현재에도 동일한 추세이며, 당시보다 더욱 강퍅해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살려고 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역을 포기한 것과 동일합니다. 칼빈은 이 말씀이 우리를 책망하기 위한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재세례파의 무소유(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없음)를 주장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합니다. 재산을 모두 파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궁핍한 자가 공존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제 5 장 


1-6절) 아나니아의 죽음

  1-2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공모(얼마를 감춤), 3-6절) 아나니아의 죽음


  1절)

      칼빈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사람의 모임이 아닌 ‘천사의 단체a company of angels’로 칭송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거룩한 공동체(holy company)를 공략합니다. 사단의 공격 방법은 매우 고상한 미덕으로 가장(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위선)합니다. 그것은 싸움에서 승산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의도하심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첫째, 마음의 순결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둘째 교회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정치 형태를 얼마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를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과 교회를 기만한 단 한 가지의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만의 배후에는 많은 악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아나니아)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로 스스로 표명한 것의 일부를 절취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하는 죄악을 자행하였다. 셋째, 그릇된 허영심과 야심으로 쌓은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넷째, 불신앙으로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러한 범행의 길에 발길을 내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앙적이고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은 일, 여섯째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위선이 그 자체 안에 있는 큰 죄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그의 계획적이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첨가될 수 밖에 없다.”

  만약 아나니아가 정직하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바쳤기만 하였어도, 표면상으로 훌륭한 일이었을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함이 없는 예물(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2, He laid it at the feet of the apostles.

    아나니아는 사람에게 명망을 얻음과 재산을 소유함(돈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거짓 행위를 하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도들의 발을 더 존경한 것”입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Theatri plausum appetamus, long for the plaudits of a theatre, 극장의 배우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효과적인 충고로 마 6:3(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2)


   3. And Peter said.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임수를 성령의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하는 질문에서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 있는 범죄의 두려움을 제시합니다. 사단이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을 추방합니다(expelled God).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머물만한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가 사단에게 넘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유기된 자의 표지가 됩니다.”

  칼빈은 ‘성령을 속이는 것(mentiri Spiritum)’은 아나니아가 불신앙으로 성령을 조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속이는 것(3절)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4절)입니다. “위선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악이며, 속담에 있듯이 소의 눈을 관통시키는 일(cornicum oculos configere, 'to pierce the eyes of crows')이다.”


  4. Did it not remaining 

     이러한 구절이 재산 소유를 불허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Thou hast not lied to men, but to God. 위선자란 많은 덮개로 자신을 가리우면서 자기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5. When Ananias heard these things.

     아나니아의 죽음은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확증시켜 줍니다. 사람의 생명은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있습니다. 죄악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작금에 있는 아나니아 보다 더 악한 위선자들이 하나님을 조롱하여도 건제하며, 불경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그의 교회 위에 눈에 보이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써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And there came great fear 한 사람을 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게 일반적 경고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기뻐하시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는 엄하게 형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건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구제)을 들여야 합니다.


   7-11절) 삽비라의 죽음


      7절)

         칼빈의 삽비라의 죽음이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삽비라의 죽음은 교회 유지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것입니다.

     8.Tell me.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항상 기회를 먼저 제공합니다. 삽비라에게 주어진 형벌은 죄에 의해서 무조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삽비라에게 질문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즉 사람의 눈을 피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까지 피한 것으로 생각하는 지에 대한 시험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성령은 이러한 절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그 시기에 의해서 형벌이 주어집니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을 속이려는 그들의 의도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동이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9.To tempt the Spirit.   성령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시험하는 것은 모독 중의 모독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의 불경건은 불신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시험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11. And there came fear. 한 사람에게 형벌이 주어짐으로 모든 사람에게 경종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한 경건의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범죄의 유혹과 방종에서 경고를 받게 됩니다. 육체는 계속 점검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자는 경멸하며, 강한자의 종이 될 것입니다(11절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 26절 = 사람을 두려워하는 제사장).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약한 자를 보호하며, 강한 자에게 담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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