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09] 사도행전 4:1-12. 오직 예수의 증인

형람서원 2007. 9. 1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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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09] 사도행전 4:1-12. 오직 예수의 증인


제목: 오직 예수의 증인

내용: 


   4장에 대한 칼빈의 개론적 진술. 칼빈은 이 부분에서부터 고려할 것으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복음의 진리가 빛을 발하게 되자마자 사단이 할 수 있는 대로 그 일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어나서 교회 초기부터 부숴 궤멸시키려는 노력을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사단의 간교에 대항하여 요동하지 않으며 강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십니다. 셋째, 아무리 적이 완전한 권세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온갖 수단을 부려도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들이 이리의 입에 물린 양처럼 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왕국(그리스도의 왕국)을 널리 확장시키시며, 복음의 빛을 계속 밝히시며, 자녀를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할 때 반대 세력을 일으키는 움직임에 의해서 다방면에서 방해와 저항을 받게 될 때에 생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주께서 마지막에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진리를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1-4절) 교회의 수가 5000명이 됨


    1. And as they spoke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의 입을 마기 위해 항상 경계와 감시하며 대기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불을 끄기 위하여 달려온 사람들처럼 급히 몰려온 것이다.” 즉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전도를 막으려고 성전에 와서 공격합니다. 성전의 권세(제사장의 임무 지역)는 사두개인들에게 있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신앙적인 요소가 가장 신앙적인 요소로 포장되어 대중에서 표현됩니다. 이 기만에 속은 대중들은 혼란에 빠지며, 오히려 참 신앙을 핍박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가장 영민한 사울은 이 기만에 빠져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앞 장 섰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2절) 더욱 난처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논증이 예수님과 이루어 졌지만 예수님의 증명을 거부했고, 그 제자들이 사도들이 부활의 확증으로 제시함에 당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교리를 받은 제사장들의 타락은 우리에게 경종을 줍니다.

   ‘성전 맡은 자(the ruler of the temple)를 칼빈은 “로마 군대의 어떤 장교” 이해합니다. niv는 the temple guard로 번역하여 사두개인과 다른 직종인 것으로 제시합니다. 공고한 성전은 요새가 될 수 있음으로 헤롯, 혹은 로마 군대는 수비대를 두어 치안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4. And many of them which heard (3절)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넣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의 효과는 멀리 멀리(spread far and wide) 자유롭게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딤후 2:9)고 강력하며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한 번의 설교에서 그처럼 풍성하고 풍부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역사(no common work of God)입니다.

  칼빈은 5,000이라는 숫자는 세로 가입한 숫자로 보지 않고 전체 교회의 숫자로 이해합니다.1) 서철원 교수는 3,000명과 5,000명의 숫자에 관사가 남성 복수 관사를 사용함으로 남자 3,000명, 5,000명으로 이해하여 전체 교회의 숫자를 30,000명으로 이해하였습니다.(성령신학, 92-94.) 


5-12) 산헤드린에서 증언하는 베드로

       산헤드린에서 무참하게 당했던 베드로가 다시 산헤드린에서는 오히려 법정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때에는 예수와 함께 좌우편에 앉아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기대했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할 때에는 공회 앞에서 비굴하나, 예수의 증인되기로 결정되면 공회에서 오직 예수만을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5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관원, 장로, 서기관(the ruler, elders, teachers)들이 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그들의 인간적 회의를 통해서 합법성을 도출하여 합법적으로 억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기독교 억압을 행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교회의 정결함과 성령의 능력입니다.

  칼빈은 6절에서 대제사장이 안나스(Annas)가 됨에 대해서 이상이 여깁니다. 요세푸스의 제시를 들어 안나스는 요나단(Jonathan)으로 보려고 합니다. 즉 이 사건이 부활 이후 즉시 일어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안나스의 문제는 난제로 남겨 둡니다.


  7.In what power 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가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활함을 무위로 만드는데, 사도들의 담력 있는 예수의 증거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는 이 세상의 교활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순결함과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8. Peter, being filled with the Holy Ghost 여인의 목소리에 떨었던 베드로(두려움 충만)와 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한 베드로(성령이 충만)가 구별이 됩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고무되어, 웅장한 공회에서 지혜와 담력으로 놀라운 대답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지혜이기도 하겠지만, 성령의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성령의 충만함을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The fullness of the Spirit is taken for a large and no common measure.

  

   9. If we be judged.  베드로는 재판받음은 포악한 사람이 받는 것임으로 자신들은 죄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병자를 고치는 선행을 했다고 법정의 불공정으로 고발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발자는 악한 마음으로 크게 존경을 받아야 할 사항을 가지고 오히려 범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롱 섞인 발언으로 책망까지 합니다. 베드로를 심문하는 재판정은 선행을 정죄하기 위해서 열린 재판이 되었습니다.


   10. Be it known unto you.  베드로는 자기 변호가 끝난 직후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복음 전파를 시작합니다. 즉 자기 정당성은 최고의 능력자의 대행자로서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사람이 능력을 줄 수 없음으로 베드로에게 능력을 주시는 이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이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가 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입증함으로 예수를 죽인 사두개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을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의 헛된 수고를 깨닫고, 광폭한 어리석음을 단념하고, 죄과를 인정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11. This is the stone. 베드로는 성경의 증언(시 118:22)으로 입증을 시도합니다. 시편은 다윗이 자기 백성들에게 지도자로서 거부당한 일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위로를 받는 것은 백성(사람)들이 비록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일은 어떠한 악한 세력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음이 다윗에게서 그림자로 나타납니다(that was shadowed in David which God would have perfectly expressed in the Messias.).

   이 사건은 한번만 생겨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성취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두머리 건축자들에 의해서 거부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있음직한 일인 것입니다. 교황의 헛된 자만심은 자신의 수족인 교회의 성직자를 통해서 조직적으로 조작할 수 있지만, 안나스와 가야바가 우두머리 건축자가 되듯이 교황이 우두머리 건축자가 됩니다. 포스트모던에서 우두머리는 모든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황주의의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언제나 우두머리는 한 개체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개인을 강조하여 우두머리인 예수를 동일한 인간 실존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칭찬하고 신격화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퉁이돌이 되지 않는다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갖은 존재가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타락한 본성을 갖은 것을 암묵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오직 한 모퉁이 돌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다른 터 위에 세운 건물은 모두가 무너지게 됩니다. 로마 교회 신학, 자유주의 신학, 경건주의 신학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신학을 다시 수립하려고 다양한 방편들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아직까지 건재한 신학, 변하지 않는 신학은 정통신학, 개혁신학입니다. 2,000년 동안 정통신학은 세계 각처에서 믿는 자들에 의해서 건재하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12. Neither is there salvation in any other. And assuredly Christ had showed this one token of his grace, to the end he might be known to be the only author of life. 그리스도는 유일한 은혜의 표시이며, 생명의 창시자입니다. 그리스도는 is the fountain of salvation로서,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선언(there is salvation in none other save only in Christ)합니다.


    Neither is there any other name 구원은 오직 하나님 능력 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구하지 않고 다른 수단을 동원한다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피조물을 가리키는 말로써, 모든 피조물에게는 구원의 능력과 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앞으로 초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손을 펴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 구원을 기뻐하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하신 일이요,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오기 위하여 땅 위로 내려오신 것이라고 베드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셨다는(엡 4:10) 교리와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기 위한 영원한 언약이 되시기 위하여 한 번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의 속죄제사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와 화해하게 하셨다.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그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사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 역시 그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구속의 열매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중략)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우리와 함께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무수한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감히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많은 추가 요인들을 만들어내서 그리스도에게 남는 것은 겨우 구원의 요인의 백분의 일 정도가 될까 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분명하게 일체의 다른 수단을 배제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 일부분만이 아니라고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교리를 이해하기에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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