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스크랩] 칼빈과 루터의 비교

형람서원 2007. 2. 26. 01:19
728x90
반응형
 

칼빈과 루터의 비교

종교개혁시대에는 성경이 최고의 유일한 권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개신교도들에게 교황이나 공의회에 대한 주장은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에 기초되게 않는 한 타당성이 없었다.

솔라 스크립투스(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만)에 관한 필사적인 외침으로 인해 성경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개혁자들의 강직한 영감론은 기계적 영감론 보다는 유기적 영감론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특수한 경우에는 성경을 아주 자유롭게 취급하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성경만이 신학적 논쟁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권위로 인정하였다. 개혁가들은 교회의 무오성을 반대하고 말씀의 무오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사상들은 지구상의 교회가 창설된 이후 성서해석과 종교개혁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틴 루터의 독자적인 성경 연구와더불어 로마서와 시편에 관한 그의 강의를 통해 그는 전통주의와 로마교회의 풍유적 해석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은 실제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바탕이 되었다. 자신의 이신칭의에 대한 경험을 통해 루터는 이러한 가르침을 신. 구약 성경의 중심 강조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중세시대의 4중적 해석을 포기하고, 하나의 근본 의미를 강조하였다. 다중적의미의 복합성은 단순한 신자를 혼란한 바벨탑으로 인도할 따름이었다. 루터의 새로운 강조점은 성경을 보다 확실한 명료성의 길로 이끌었다. 루터는 인위적인 의미의 복합성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각 신자의 권리도 천명하였다.  또한 문자적, 문법적 의미와 영적 심층의미간의 균형을 맞추었다. 심층의미는 명백하게 말해진

이념들에 기인한다. 그는 영적의미의 참된 심층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는 성경저자들이 의미한 의미 속에 들어가서, 그의 의미를 생명력 있는 실재로 표현할 수 있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에게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이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성경의

부분들에 대해서 그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강조하기를 원하는 성경의 부분을 골라내었다. 그 결과 루터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가장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교회비평가”로 분류되었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저자로서 그는 단순히 엄격하고 논리적인 체계 속에 모든 성경적 가르침을 종합시키고자한 신학자였으며, 우리가 그의 체계와 강조점을 좋아한다면, 칼빈은 우리의 존경의 주축을 차지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체계를 성경적 진리와 철학적 전제들의 혼합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칼빈을 절대적 작정(decretum absolutum)의 허탈한 대변자로서 무시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해석자이고 신학자였다. 맥린(McNeil)은“ 그의 주석들이 그의 저술의 주축을 이룬다. 그의 정규 주석집에는 단지 신약 성경 가운데 1권과 구약성경 가운데 8권만이 빠져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칼빈의 주석들은 현대의 해석자들에게 아직도 도움을 주는 역작이다. 칼빈은 성경을 문법적이고 역사적으로 해석하였다. 신학적 선험 체계들은 그의 사고 속에 거의 채색되어있지 않았다. 시편에서 칼빈은 특수한 시편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저자의 진술을 해석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시편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명백한 배경과는 상관없이 가정된 직접적인 예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체적인으로 예표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동조한다. 칼빈도 이 관점을 받아드렸다. 허탈한 주관성을 막기 위해 칼빈은 성경의 영감에 대한 성령의 사역과 성경의 해석자에 대한 성경의 조명을 하나로 결합하였다. 칼빈은 결코 인간의 탐구를 하나님의 교훈으로대체 시키지 않았다. 주석에 대한 칼빈의 표준은 명쾌성과 간결성이었다. 칼빈의 주석들이 지금도 유익한 것은 부질없는 지엽적 묘사들과는 거리가 먼 그 자신의 명쾌한 스타일 때문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종교개혁의 신념을 포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책이었다. 또한 칼빈은 루터와 즈빙그리 양대 진영을 규합하려고 노력하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으며, 교리 면에서 가장 난점인 성만찬의 견해에 있어서도 그는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영혼에 임재 하는 것을 성례가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 성령임재설이라는 절충적인 이론을 내세웠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칼빈과 루터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 루터는 善行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교회의 견해를 부정하고 구원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의 원리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選民의교리’를 총 정리하여 오직 선택된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 했다. 칼빈의 자유의지의 옹호는 하나님의 영애를 빼앗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자기의 긍정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 칼빈은 고대 철학자들의 자유의지 주창자들과 교부들의 혼합적인  설명을 배제하였다. 또한 스콜라학자 룸바르그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으면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문주의자들의 자력 구원과 로만 카톨릭 교회의 공로에 의한 구원에 대한 반격으로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생애와 신학의 특징

 불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면, 불교와 기독교 모두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똑같으나, 불교는 석가모니, 사체팔정도, 기도와 수련, 그리고 깨달음을 말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성서, 기도, 구원을 말한다. 또한 불교는 자연적인 신인식을 하는 반면, 기독교는 계시적인 신인식을 한다. 

그러나 이 둘을 동근(同根)화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인데, 이에 대해 칼빈은 루터와는 차이를 보인다.

루터는 "내게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간중심으로부터 출발을 한 반면,

칼빈은 21-22세에 기독교로 회심을 하게 되는데, 법학도였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회심하게 된다.           칼빈의 메시아와 예수그리스도를 동일시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왕직, 예언자직, 제사장직을 말한다.

칼빈 이전에는 - 루터까지 포함해서 - 예언자직과 제사장직에 대해서 밝혔지만, 예수 그리스도서 믿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치리하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칼빈이 처음 밝힌 것이다.

칼빈의 생애

- 카톨릭의 부패를 절실히 느끼고 자람.

●그는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이용에서 출생하였다.

●19세에 인문과학을 공부하여, 학사학위를 받음(라틴어, 천문학, 문학)

●아버지는 카톨릭의 회계를 맡음

●20세에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서 법학을 공부함.

●24세에 법학석사학위를 받음

●20-22세에 신앙의 위기를 겪음

●고행, 덕행, 교황권, 면죄부판매문제, 미사(성찬식), 마리아문제, 성자숭배문제등등...

   종교개혁의 세가지   

근원목표 :    성서만으로! 은혜만으로! 믿음만으로!

●파리대학에서 법학교수가 되고자 함

●1533년 11월 25세에 파리의 나바르대학 Cobb총장의 취임식에서, 칼빈이 작성한 취임사가 문제가 되었다.

- "왜 기독교는 진리를 감추었는가?",

 "왜 기독교는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현카톨릭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나?"

- "지금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현재의 카톨릭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수 없을 것이다."

●28세부터 개혁신학 시작 -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 "하나님은 그의 신비한 섭리로 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 "내가 나를 고삐로 길들여서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하는 그를 발견했들 때, 마치 빛이 나를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저항할 수 없었다."

●계몽주의 이전의 사람으로서, 개혁장로교회의 창시자

 ●여성에 대해서는 매우 중세적이고, 가부장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이다.

 

●혼합, 혼동을 반대

 

●고리 대금업자, 전쟁일으킨 자에게 성찬식과 세례베푸는 것을 거부하였다.

 

●부유층에게 성찬식과 세례베푸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치와 사교춤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20개조항의 신앙고백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등장하였다.

 

●제네바시의 200명의 시의원들이 이들(반대목소리)의 의견을 수렴하여 칼빈에게 협상안을 제시하는데, 칼빈은 이에 대해 "고리대금업자에게는 성만찬을 할 수 없다"며 반대를 하였다.

●시의원들이 파문권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칼빈은 반대를 하였다.

 ●칼빈이 구분한 교회의 직분은 교사(박사)와 목사, 장로, 집사의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칼빈은 카톨릭의 직제는 악마의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에 대해 시의원들이 이같은 직분의 사람을 200명의 시의회에서 선출하려고 하자,

  칼빈의 교회의 신  도중에서 선출을 한다.

 그러자 시의회는 칼빈이 베드로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설교권을 박탈해버린다.

●이로 인해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의 부쩌(Buccer)가 칼빈을 초청하였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3년을 지내면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성서강의를 하였다.

 

★★★ 신학은 시대적인 제약성이 있는 것이다. ★★★

●칼빈이 떠난 제네바시는 다시 혼돈(정치적, 종교적)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의회는 칼빈을 다시 데리고오기 위해 대사를 보냈으나, 칼빈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부쩌의 충고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3년을 지낸 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칼빈은 부패된 카톨릭을 모두 무너뜨리고, 유럽의 새로운 정신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주석서와 기독교 강요를 쓰기 위해 56년의 시간을 보냈다.

1. 하나님의 절대주권

칼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전우주(우주의 모든 운행을 우연, 자연적이라고 본 그당시의 생각에 반대를 했다), 인류, 세계, 개인 삶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에 의해서 생성되고 보존되고 통치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이끌어가신다는 사상은 칼빈에 의해서 생성된 신학이다.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미래는 우리에게 가려져 있다. 그러나 칼빈은 가려진 것이 우연이나 운명이 아니고 우리를 매우 사랑하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의지에 의한 것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기를 바랐다.

칼빈의 신학에서 중심주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것은 성서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 칼빈이 새로 발견한 사상은 아니다. 어떤 인간의 역사나 사회적인 조건과 제한을 완전히 초월한다. 제한과 조건에 가려져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기독교의 우상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선, 아름다운 의의 정열이 인간적인 의지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일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알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사로잡힌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조건앞에서 경외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칼빈은 우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삶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일생을 헌신한다.

 2. 예정론

예정론을 확정시킨 사람은 예언자들이고 예수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있다. 보통 우리는 칼빈을 예정론자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 - 마지막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리라.)

이것을 어거스틴이 초대 430년에 확정시킨 것을 루터와 칼빈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칼빈이 이것을 아주 잘 다듬었다. 칼빈의 예정론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은, 궁극적인 구원은 사람의 신앙이나 인간의 결단(결의, 결심, 믿음)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불변의 신비로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을 했으며, 우리가 복음을 선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요셉과 야곱처럼 처음부터 결정을 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이런 비판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누가 처음부터 자기가 예정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된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모두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의 선포는 예정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죽음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을 해놓는 것인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칼빈의 대답은 그 이유를 추궁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보다 더 높은 어떤 뜻을 추구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칼빈의 말에 칼 바르트는 수정을 가한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 예정했던 하나님의 잔인한 칼의 법칙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성경의 메시지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선택된 자들의 구원의 확신이다. 칼빈 시대에 있어서는 유그노인들(불란서에서 종교개혁을 하다가 떨어져 나온 사람들, 15만명이나 학살되는 가혹한 현실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순교의 삶을 살게 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은 순교자들에게 매우 강한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는데 기여하였다.

 미국의 신학자인 허드슨(Hudson)은 칼빈의 예정론이 초대의 미국 청교도들의 정신적인 삶과 역사참여에 큰 공헌하였다고 본다.

 칼빈주의는 황야를 길들이고 투쟁하는 청교도들의 삶을 매우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이끌어갔다. 이런 일들이 요구하는 매우 활기차고 역동적인 윤리의 힘을 요구했는데, 이러한 힘은 칼빈의 예정론에서 말하는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신념이 제공하였다. 끊임없는 힘으로 새로운 역사에 참여를 하도록 하는데 공헌하였다고 허드슨은 말한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모든 힘은 칼빈의 예정론에 의해서 가능했었다고 허드슨은 말한다.

3. 성령의 역사가 신앙과 윤리행동앞에 선행한다.(은총의 윤리)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매우 사회 변혁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다. 신앙과 윤리는 보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현실이다. 불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이 같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는 가시적인 것만을 본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의 외적인 신앙도 중요하나, 역동적인 신앙과 실천에 앞서서 성령의 역사가 먼저 온다고 생각하였다. 우리 기독교의 역동적이고 윤리적인 면을 칼빈은 성화와 윤리에서 다루고 있다. 우리의 역동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성령의 역사가 앞서지 않고는 우리의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행동과 윤리적인 위대한 실천 이전에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감동시켜야한다.

4.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총

이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비인간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인간의 아름다운 신체구조, 정신구조 하나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칼빈은 말한다. 그러나 이웃, 남을 위해서 나 자신을 죽이는데 있어서는 인간은 매우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등이 자연과학 등을 발견시키는데 있어서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외의 많은 철학자들의 힘이나 학문, 수학 등을 매우 존경한다.

 그러나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 타락했다고 말하는것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남을 위해서 나 자신의 희생하고 죽이는데 있어서이다.                                                               
칼빈의 전체적인 사상을 통해서 우리의 본질,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참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을 위한 것이 개혁사상이다.

미국의 신학자인 J.H.Leith는 개혁신학의 안내에서 종교개혁신학에서 특징이 될 만한 것을 9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며, 두 번째는 The Polemic against Idoltary(우상숭배에 대한 논쟁거부)이며

세 번째는 the working out of the Devine purpose in History이며,

네 번째는 Ethic, a Life of Holiness이며,

다섯 번째는 The Life of mind as the Service of God이다.

여섯 번째는 Biblical Preoching이며,

일곱 번째는 The organzied Church and pastroal Care이고

여덟 번째는 The Disciplined Life of faith(신앙의 삶에 훈련된 삶)이고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는 Simplicity이다.

이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1) Majesty and the praise of God -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칼빈적인 종교개혁적인 신학은 개인구원과 역사구원이 같이 있다. 지옥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을 기도와 찬양으로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Majesty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엄을 존경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제세례파 운동들은 심지어 교회안에서 피아노 치는 것과, 교회안에 십자가를 거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극단화시킨 것은 퀘이커교도이다. 하나님의 존엄에 대응되는 것은 과감하게 우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전통의 흐름이다. 기장도 이러한 흐름에 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해야 한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하나님나라와 일치되는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춤추는 것과 고리대금업을 거부하였다. 이 정신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청교도 혁명이다. 크롬웰은 칼빈주의의 사람이었는데, 그는 권력(챨스황제)을 우상숭배라고 보고, 방을 붙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챨스황제를 치기 위해서 모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는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깨끗한 삶을 산 사람들을 선별한다. 창녀들과 잔 사람들, 그리고 술을 먹는 사람들, 깨끗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신앙에 훈련된 장교들을 선별하였다. 크롬웰은 장교들을 불러 모아서 군량미가 하늘에서 내려올때까지 계속해서 철야기도를 한다. 이것이 칼빈이 가지고 있는 정치참여의 의식이다. 그래서 크롬웰은 상상하지 못할 군대장비를 얻어낸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이 혁명을 통해서 칼빈신학의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형성된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청교도들의 사상은 우리가 매우 놀랍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4) 이런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의인과 성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5) 칼빈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삶에서 충실히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산다. 이에 대해 본회퍼는 모든 기독교 신자는 가정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데 위임받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이다라고 말한다.

6) 개혁교회는 모든 설교, 예화는 성서에서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성가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시편 150편을 전부 찬양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찬양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간증의 중요한 포인트는 거룩한 터, 성서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이 앞서면 개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간증은 성서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7) The organzied Church and pastroal Care 기독교는 사적, 개인적 교단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백성들의 교회이다.

그래서 조직되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목사, 장로, 집사등 교회의 직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삶에서 훈련되어야 한다고 한다.

8) 자신의 위치에서 신앙의 삶을 훈련받아야 한다.

9)장로교는 단순하다.

성서적인 설교, 찬양만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사치를 매우 배격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각은 매우 높은 생각을 하나, 삶은 매우 단순하다. 이 정신을 잘 이어받은 것은 청교도들이다.

루터와 칼빈 신학의 비교연구<종교개혁사>(지와 사랑) 305-315쪽

 

A.공통점 

 

1)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justifcation by faith)

 (1)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루터는 롬1:17의 전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의 義(iustitia Dei)는 능동적인 의(active righteousness),곧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의로만 생각하였으나,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가운데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passive righteousness),곧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임을 깨닫게 되었다. 곧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ustitia)를 옷 입게 된다는 사실을 롬 1:17과 함께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De Spiritu et Sitter, The Spirit and the Letter)"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고 그의 라틴어 저술 편집 서문에서 고백하였다. 칼빈도 전가되고 수동적으로 옷 입혀지는 의를 강조한 점에서 공통적이다.

 

 (2)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루터는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사변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전에는 그 믿음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assent:assentia)으로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전존재를 걸고 내맡기는 신뢰(trust:fiducia)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신뢰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짐을 발견하게 되었다(엡2:8).다시 말해서 성령이 믿음을 우리 속에서 창조하실 때 믿음이 일어남을 주장한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는 루터의 해석을 칼빈도 일치하게 받아들였다.

 

(3)오직 말씀으로만(sola scriptura):루터는 또한 믿음은 오직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다. 중세 스콜라주의의 선행과 중세 신비주의의 체험을 비판하였고, 주관적 내면적 체험이 아니라(in nobis),우리 밖에서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extra nos)말씀으로 믿음이 일어남을 강조하였다. 은총은-성령의 역사는-말씀 안에서(in the Word),말씀을 통하여(through the Word),말씀과 함께(with the Word)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칼빈도 말씀과 성령의 변증법적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적 해석보다는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해석에 가까왔다.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데,성경의 모든 말씀이 신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의 신앙과 관련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말씀 속에서 신앙이 발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성력의 역사다. 지혜의 영으로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시고(고전 12:10),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지혜와 진리의 영이시다(고전 2:10).성령은 내면적 교사로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신다. 성령은 특히 십자가의 은총을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심으로써 믿음의 사건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고, 일단 그리스도께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4)전가되는 의로움(imutation:forensic passive rightiousness)과 본성적 의로움(impartation:real active rightiousness):루터는 인간의 죄에 내면적․본성적 죄가 있고 외향적․행위적 죄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의에도 두 가지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외래적인 것으로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 곧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ustitia Dei)이고, 둘째로 고전 1:30에 “하나님은 그를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한 것처럼 이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신앙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므로, 세례와 참 회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 의가 우리 자신의 모든 행위적 의의 근원이 된다.

  이 두 번째 것은 우리 자신의 의이다. 외래적 의가 우리로 하여금 이 행동적 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의는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선행 속에서 나타난다. 또한 더욱 적극적으로는 이 의는 이웃사랑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온유함으로 나타난다. 이 의는 열매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자 속에서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선함,성실함,온유함,절제 등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 아담은 죽고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법을 따르는 의로움이다.이것은 성화를 위한 의로움이요,신랑 예수는 “나는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신부 성도도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칼빈도 전가되는 의로움과 본성적 의로움을 함께 강조하였으므로 루터나 칼빈 모두에게서 성화론이 나타난다.

 

(5)죄 사함(forgiveness):이 의인화는 평생에 지은 모든 죄들을 다 사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모든 불의와 악을 의로 여겨주시는 죄의 사함을 받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지었거나 아직 육체에 남아 있는 어떤 되라도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죄를 사해주셔서 우리의 죄가 제거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의 출발은 이 믿음과 또한 육의 죄와의 싸움을 동반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런 죄를 용서받게 하고 죄를 정복하게 한다.

그리고 죄는 위궤양이나 절름거리는 것 등과 같은 불치의 병을 몸 속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과 같아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모두 죄의 사함을 받고 치유되는 것이라고 루터는 해석한다. 율법의 의로는 이러한 영적 질병을 치유할 수 없고 병을 더육 악화시킬 뿐이다. 칼빈에게서도 칭의는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회개하고 믿어야 함을 강조하지만,칼빈은 믿음을 회개보다 먼저 강조한다.

 

(6) 화해(reconciliation)와 회복(restoration):루터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그것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한다.의와 거룩함과 진리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것을 잃어버렸기에 낙원을 잃어버렸다.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해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이다. 역시 칼빈에게 있어서도 화해론은 강조되었다.

 

(7)용서받은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인으로 남아있다. 용서받은 죄인이다. 세례가 원죄를 재거하지 못한다. 원죄는 그 본질에 관한 한 죽을 때까지 남아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씻어버려야 하며, 날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 자라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살아야 한다. 무덤에 들어갈 때 비로소 완전히 제거된다. 이 점에 있어서도 칼빈은 처럼 죽을 때까지 인간은 용서받은 죄인이므로 완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우리 속에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성령의 여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은혜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믿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사도 바울의 고후 4:13을 언급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믿음 그 자체를 바울은 믿음의 마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요6:44,65를 해석하면서 하나님 아버니께서 먼저 이끄셔야 믿음이 일어난다고 해석했음을 칼빈은 강조한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성령은 스콜라적인 인정(accentia)에서 신뢰(fiducia)의 과 확실성으로 이끄신다. 또한 성령은 우리 속에 믿음을 부러일으킬 뿐 아니라 믿음의 점진적 성장도 이룩하신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칭의도 성령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생명보다 더 우수하고 탁월한 썩지 않는 중생의 생명을 성도에게 부여하는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eternal life-giver)요 영원한 생명의 창조자이심을 칼빈은 강조한다. 칼빈은 회개케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quickening'혹은'vivication'이라고 표현한다. 칼빈은 회개를 두 가지, 곧 ’죽임(mortifcation)'과 ‘살림(quickening,vivication)'이라고 해석한다.그리고 ’살림‘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으로 이어짐을 칼빈은 강조한다.

 

2)만인사제론 

앞서 살펴본 대로 루터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preisthood of all believers]에서 모든 세례를 받은 신자는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였다. 라틴어로 모든 크리스천은 “sacerdotes(제사장)”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ministri(목사,목회자:minister)"라고는 표현하지 않았다. 세례 성례전은 모든 크리스천(성직자와 평신도)이 하나님의 사제로 성별되는 순간이라고 루터는 해석한다. 그래서 세례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제사장(all Christians' Priesthood)으로 성별이 되었기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담들이 무너지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등급(state)과 지위(degree)의 차이가 무너져버리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다만 성직자와 udtls도의 차이는 기능(function)에 있다고 해석한다. 성직자는 설교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목회의 기능(function of ministry),평신도는 세속 직업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능이 있다.

칼빈도 만인사제론을 강조하였다. 특히 칼빈도 직업의 소명의식을 루터처럼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장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소명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루터는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사는 것만 강조하였지만, 칼빈은 더욱 적극적인 직업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B.차이점 

 

1)성화론 

루터의 성화론은 위에서 한 대로 상당히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의 전생애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대교리문답 Large Catechism] 사도신경 해설에서 성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루터의 성화는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1) 실제적 본성적 의(real imparted righteousness)

(2) 세상을 미워하는 것(the enmity of the world)

(3) 자아죽음(mortification)

(4) 값비싼 은혜(costly grace)

(5)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mystica in Christo)

(6) 점진적 신앙의 훈련

칼빈은 루터보다 성화론과 선행론을 더욱 강조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를 읽어보면 예정론보다 성화론이 더욱 강조된다. 역사신학자 제베르크(Reinhold Seeberg)나 워커(Williston Walker)도 그렇게 강조한다. 칼빈은 우리의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 역할 곧, 제3의 용법(tertius u년 legis)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루터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제1의 용법)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은총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에 의한 성화를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다. 벧전 1:2에서 베드로는 성려으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칼빈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송령께서 비밀리에 물을 뿌려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씻으시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의인화와 성화가 주어지며(고전 6:11),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연경시켜 성화케 하는 띠이다.

칼빈은 Ⅲ권 1장 2절에서 성령을 호칭하기를 ‘성화의 영(the Spirit of sanctification)'이라고 하였다. 그 성화의 모습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를 영원한 상속의 소망으로 연합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소생케 하시고 우리 안에 하늘 생명의 씨앗과 뿌리가 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여,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성령과의 사귐이 없으면,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Ⅲ권 1장 3절에서는 ’향자의 여(the Spirit of adopition)'으로 표현하였다.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인쳐주시는 영적 확증의 여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롬 8:9,11).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말씀(롬:11)을 강조하면서 동물의 몸과 다르게 영화(glorifiction)의 몸으로까지 부활시킬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에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모든 선한 행위는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결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홀로 이하시는 모너지즘(monergism)적인 선행론을 강조한다.


2)율법과 복음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구분한다. 율법은 심판이다. 계병을 통해 인간을 심판한다. 복음은 은총이다. 은총을 통해 구원을 약속한

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자비를 베푸신다. 루터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서해석에서도 하나님의 akfTMa의 이중적 차원을 강조한다. 구약은 율법과 동일시될 수 없고, 신약은 복음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에는 복음보다도 율법이 더 많이 있고 신약에는 율법보다도 복음이 더 많이 있다 구약에는 복음이 숨어 있는 방법으로 포함되어 있고, 신약에는 율법이 숨어 있는 방법으로 포함되어 있다. 율법과 복음의 이러한 구분은 성서 이해뿐 아니라, 기독론과 의인화론과 성례전론과 계명 이해와 윤리관에서도 나타난다.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날카로운 구분은 심판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이중적 관계를 의미하며, 뿐만 아니라 심판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구약에는 율법이 더 들어 있고, 신약에는 복음이 더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약에도 율법과 함께 복음이 들어 있고, 신약에도 복음과 함께 율법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은 복음의 상반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확신을 더욱 자라게 하고 성숙시켜주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신약만 아니라 구약에도 교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약의 교회는 오신 예수를 믿는 약속 성취의 교회지만, 구약의 교회는 오실 예수를 믿는 약속 희망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특히 율법의 제3의 용법에 의한 성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3)두 왕국설(Two Kingdom Theory)과 신정정치론

(1) 루터의 두 왕국론: 루터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두 왕국설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왼손 왕국은(left hand kingdom)국가요, 하나님의 오른 손 와국은(right hand kingdom)교회다 루터는 마 22:21에 근거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철저히 구분지었다. 이것은 교회의 세력이 세속 권력으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루터는 또한 롬 13:1과 벧전 2:13에 근거하여,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이 왼손 왕국의 통치자로 세우셨기에 복종하여댜 한다는 것이다. 세속 왕국도 사탄의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현하는 도구이다(롬 13:1-7).그러므로 비록 세속 왕국이 세속 세계 일에 관여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우리는 세속 권력 앞에 복종해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그것이 독재든 폭력이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독일 루터 교회가 히틀러의 파쇼정권 앞에서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2) 칼빈의 신정정치(Theocracy)론:칼빈의 성화(sanctification)는 사회적성화 운동으로 까지 발전한다. 곧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신정정치의 사회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교회의 주인도 그리스도요 국가의 주인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곧 세속구가도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서는 안 된다며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와 국가 속에서 모두 실현되는 역사의 목표를 희망하였다.

정치적 왕국이 단순히 의식주에 관계된 현실생활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거룩하게 경건하게 존경스럽게 살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국가가 세워졌기에 국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가 시민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과 정치윤리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아주 중요하다.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문제에서 칼빈은 두 가지의 예외를 주장한다. 첫째로 최고 통치자(와) 밑에 있는 관리들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변호하고 백성들을 대변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뜻과 봄에 어긋난 모든 것은 복종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신앙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통치자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를 때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예레미야, 다니엘, 나단, 사무엘, 호세아 등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불의한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회적 성화신앙과 저항정신은 메리 여왕에게 항거했던 존 녹스(John Knox) 히틀러 정권에 항거했던 디트리히 본회퍼등에게로 이어졌다.


루터신학의 타당성과 한계성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있는 성당 문에다 속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를 루터가 발표하면서 시발된 종교개혁은 결국 개신교 교회를 발생케 했으며, 그 후로 개신교의 신학과 가톨릭의 신학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면서 진전돼 왔다. 이리하여 교황무오설이나 마리아 숭배 같은 타협될 수 없는 장벽도 생긴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신학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시대적 변화에 따른 신학의 변화를 부인할 수가 없는데, 지금에 이르러서 서로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상호 접근하려는 측면을 보게 돼 주목을 끈다.


   루터주의 신학자인 시틀러(Joseph Sitler)는 '루터 신학'의 타당성과 한계성을 독특한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이리하여 '루터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오늘의 현실에 맞는 방향을 제시한다. '십자가의 신학'이요 '말씀의 신학'인 루터에게서 '듣는 신앙'이 중요했다면, '영광의 신학'으로 비판된 가톨릭의 신학은 '보는 신앙'에 치우쳤다는 것이요, 개신교는 이제 '보는 신앙'으로 보완이 되어야 한다고 시틀러는 지적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가톨릭은 듣는 측면을 보완하면서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센트마이어(H. Paul Santmire) 의 글을 참조하여 시틀러의 생각을 요약해 보자.


   루터가 태어날 당시의 문화는 인간 이성의 높은 열망에 따라 건립된 영광스러운 대성당으로 상징되는 문화였다. 그런데 루터는 거기에서 부패와 악의 세력만을 볼 수가 있었다. 교회를 보니 신학적 대의(大義)는 없고 세상적인 허식(虛飾)만이 나타났다. 세상권력의 가시적인 치장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았다. 이리하여 참된 신자는, 중세의 징벌체제 남용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편안을 누릴 수가 없었으며, 중세시대의 영광스러운 대성당은 신자들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종의 구치소로 판단된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위기에서 루터는 눈을 감고 듣는 데 열중한 것이다. 세상적 영광의 상징과 교회의 허세(虛勢)적 상징을 보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다. 죄, 육신, 그리고 악마의 세상적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들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뜻에서 듣는 것이 '원 경험(Urerlebnis)'이었고, 종교개혁을 유발시킨 경험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루터가 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으로 진전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문화적이며 영적인 위기에서 '감은 눈'과 '열린 귀'로 시작한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 이리하여 루터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요 '듣는 신앙'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성례전에 대한 생각에도 반영된다. 물론 성례에 보이는 요소가(떡과 잔)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경우와 같이 그는 성례를 '보이는 말씀(visible words)'으로 이해하고 말씀과 보이는 요소와의 관계를 영혼과 육체의 관계로 판단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교회의 건물에서 성상(聖像)을 제거하라고 루터가 명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교육적인 목적에 부합되는 성상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나 이야기를 듣는 데 있어서 말씀을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그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건물을 '입의 집(a mouth house)'으로 생각하면서, 성상은 부수적인 기능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성상의 제거는 칼빈이 더욱 철저했다.


   보는 행위에 반대하고 듣는 행위를 옹호하는 루터의 '말씀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이어지면서 가톨릭 교회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한다. '영광의 신학'은 성서적 대의 대신에 교회 안의 세상적 위엄을, 십자가의 약함 대신에 세상 속에서의 가시적 권력의 위세를, 구원을 위한 신앙보다 볼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의존을, 그리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윤리보다 자기과장을 나타낸다. 눈으로써 올바르게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셨음을 귀로 듣고 믿는 것이다. 보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신앙에 위협이 되고 '영광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듣는 행위가 참된 신앙이며 이것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루터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파악하게 되면 전보다도 백배나 아름답게 자연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이신칭의(sola fide)'의 설교를 들을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루터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시틀러의 비판이 시작된다. 생태계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신학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겨냥한 '자연의 신학'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지적한 비판이다.


   성경에도 보는 차원이 두 단계로 명시돼 있다. 볼 수 있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된다고 한다(고후4:6). 그러나 지금은 보는 것이 희미하고 그 때(종말)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된다고 말한다(고전 13:12).


   듣는 신앙에만 집착하는 신학은 자연 그리고 사물과의 연결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신학이 되기 쉽다. 설득력이 있는 신학이 되려면, 자연 속에도 역사되는 은총을 인지하면서 '은총의 비전'을 파악해야 한다. 신학자들도 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연결을 설정하기가 어려우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연결선상에서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는 단절된 별개의(alient) 세상으로 파악하는 결과로 된다.


   어쨌든, '보는 신앙'은 개신교가 등한히 해온 부분인데,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한 것이요, '듣는 신앙'에 '보는 신앙'이 조절되어야 한다. 물론 본다고 할 때에 그냥 보는 것(see)이 아니라 '주시한다(behold)'는 뜻을 담고 있다. 이리하여 잘못된 기술과학의 운용에 은총을 연계시킨다. 그러니까 인간이 착취하고 있는 자연세계를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은총의 개념을 확대한다. 시틀러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준거로 자연에 대한 신학을 제시한다. 은총의 현장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우주적 그리스도(the cosmic Christ)'의 에너지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속에서 만물은 흠 없는 성실성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변화도 묘하게 진행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보는 측면에 치우쳤던 가톨릭 교회가 미사 후에 강론을 추가하여 듣는 측면을 보완했는가 하면, 듣는 측면에 치우쳤던 개신교가 교회에서 보는 차원을 고려하면서 채색유리의 성상, 까운과 색깔있는 스톨의 착용, 그리고 꽃꽂이의 장식 등 시각적 차원에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바하(Bach)의 미사곡이나 헨델(Handel)의 메시아곡 같은 듣는 예술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예술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출처 : 푸른 향기
글쓴이 : 푸른향기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