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개념인가? -펌-

형람서원 2006. 5. 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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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개념인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음의 근거로 페리코레시스가 제시됩니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뜻합니다.


역사적인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서는 개혁교의학(유해무 저, p164)의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삼위일체론에 공재(περιχώρησις :circumcessio, circumincessio)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이를 말한다. 물론 이 용어와는 관계없이 이 사상 자체는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 교대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기독론에서 Maximus the confessor(580-662)가 양성 연합에서 오는 사역의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이 용어를 최초로 썼다. 신론에서는 Pseudo-cyril이 최초로 썼고, 이를 다메섹 요한이 계승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고 있다.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페리코레시스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살핌으로 그 개념이 성경적인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성경적 근거의 문제

페리코레시스의 성경적 근거는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안에 있다”(요 10:38, 14:9,11, 17:21)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다(계신다, 거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상호공재를 지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잘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언급하시면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각자 안에 상호공재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공재해 있고 제자들 안에 예수님이 공재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공재하거나 침투한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공재 또는 침투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연합을 통한 하나됨, 한 생명을 공유하고 생명의 사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인 의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안에 있다”는 표현은 복이면서 사명의 요소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이면서 동시에 그 복을 받은 사람 편에서 온전케 하여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글을 쓸 때에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단어나 문장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로 하는데, 추가적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품속에 있는"은 명백하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아기 또는 유아기의 자녀가 부모 특히 엄마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연합과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의 ‘나’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고 계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을 근거로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면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이 됩니다.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한 존재가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페리코레시스(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논리의 문제

삼위의 독특성은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으시고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라는 것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위의 설명과 분리될 수 없고 연관성을 가지고 성립되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면서 나신다는 것이든지 아니면 나시고서 성부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면서 나오신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오시고서 성부와 성자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 안에 들어가시든지 아니면 성부 자신을 성자 안에 두시고서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면서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계시다고 하든지 나오신 성령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수긍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륜적인 관점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자는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자가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고 육신을 입으심으로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따르면 성자가 육신을 입으신 이후에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인성을 입은 신인이 되셨다는 것일까요?  이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성육신한 것은 아니기에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니면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성육신하지 않으셨기에 신성만을 지니시고 계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땅에 계신 예수님과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언급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급할 사안 성경의 원리를 통하여 풀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협의의 현장과 관련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가 협의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창 1:26). 그러한 협의의 현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협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자 안에는 성부와 성령이 계시며 성령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십니다. 위격의 관점에서 보면 공재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신 성부 한 분과 공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신 성부가 두 분이십니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격의 관점에서는 총 아홉 분이 계시는 것이 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에서는 두 개체가 하나 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로서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육체적 결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이란 단어가 전인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는 한 영, 한 인격이라고 사용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몸(육)이란 육체성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영이란 성령님의 좌소를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키고 혼이란 인격성(지정의)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부부에게는 성적관계를 통한 육체적 결합이 있기에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의 인격체이지만 성경은 한 몸(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각 개체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한 것이 아니지만 한 몸(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에서 둘(남자와 여자)은 구분을, 한 몸은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확증되어집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이혼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복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사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5:32)은 음행에 의해서는 이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복을 얻었다면 혼외정사인 음행으로 인해 분리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음행으로 인해 주어진 복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생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과 사명의 온전한 결합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모든 삶과 관련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구분되는 두 개체에 대하여 한 분되는 것에 대한 성경에서의 표현 양식입니다.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삼위이시면 한분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 한분이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숫자적인 1이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자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부, 성부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자, 성부와 성자가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한분이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게 연합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와 같이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첨가하자면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조금의 분리도 없으시기에 삼위이시지만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적 증거

바울 사도는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 곧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성경의 증거들과 모순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시고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성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님만 내주하시기에 주님이 이 땅에 거하는 우리와 따로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상호공재를 통한 분리되지 않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결코 쓰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성령님만이라고 하더라도 상호공재로 인하여 주님도 거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교의는 사고(논리)가 아니라 성경 본문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편향된 이해가 아니라 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하여 형성되어야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안에 있다”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주장되었고 전 성경적인 이해와도 동떨어진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페리코레시스에 의해서 성립되는 교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분리되지 않는다”는 필연적으로 페리코레시스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삼위가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고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이 완전히 일치하시기에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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