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며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면서도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함에 대하여' 명제적 논리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언급에 대한 사실이 동의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여지를 둘 뿐으로 보여진다.
1. 게할더스 보스의 '이미'와 '아직'에 대하여서
먼저, 게할더스 보스가 주장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1) 좀더 부언적으로 설명한다면, 먼저 'G.보스의 시간관'(각주2)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한 다음에 언급됨이 옳다고 하겠다 이는 분명 시간관에 대한 보편성 이해에 차이에서 합리성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은 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 아니다 '보스'는 그러한 논쟁적인 것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단적으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차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고 함의 말을 같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종말과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그 상관성에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종말을 이루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미래적으로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가운데서는 시간의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는 모순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보편성을 말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함의 피조물적 한정적 의미와 그 규정적 한계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역사라고 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앞과 뒤를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거나 또는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구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바르게 찾아 적용되어진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판단은 시간에 대한 인식적 관점이 먼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2.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견해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
먼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표현은 옳지만 그 판단함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했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고 그가 가르친 내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역사적이라는 개념에서 그냥 예수님을 전제하고 그의 활동적 시기라고 함만 고려할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그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상적 정당함을 의지하는 주관적 시간관의 실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역사라는 개념에서 말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르고 있을뿐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의 시간관에 따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되어질 수 있다.
'지연된 종말론'이라는 것은 일반 역사적 시간관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진 종말론이라는 전제를 말하고 있다 즉 우주적 시간이라고함이 구속적 시간의 당위성에서부터 일반적 시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 시간에서 구속적 시간의 형태에 대한 현상적 개연적 시간관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인식의 불연속성이라는 판단밖에 세울 수 없으며 그 모순이라고 함의 문제라고 함의 인식의 사실을 말하기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자체에서 주목한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지연된 종말론적 입장에서 'already but not yet'문제제기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데, 이는 신학관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다.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았다는 측면이 '이미'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죄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고(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지 않았음), 택함받은 모든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의 관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명제 안에 두 관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미의 관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성경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아직의 의미는 역사적 성취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와 '아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 돛?역사적 성취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택한 자의 구원의 출발점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만 말해야 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다면 '아직'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의 만유적 인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안에서 만물이 함께 죽고 만물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개념이 들어올 개연성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와 아직의 두 개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완성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 求?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4장 종말론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의 요소인 '성전', '제사장', '육적 이스라엘'이 남아 있다. 이것이 지연된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한 이레의 기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해 70이레의 언약을 정하신다. 그중 69 이레동안 성전이 중건되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한 이레 후에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파괴된다.
왜 하나님은 한 이레 동안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 가운데 기독인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이스라엘과 성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심판을 미룰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중에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이미의 관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의 시기, 한 이레 동안 옛 시대(율법)을 묵과하시며 심판을 미루시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한 이래가 끝나자, AD 70년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구약 시대 소돔이 멸망하듯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에서 '아직'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취된다는 관점보다 AD 70년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와 아직" 측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구약 율법과의 관계(특히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의 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옳다.
요한계시록 마저 '아직'이라는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노래한다면, 요한계시록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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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89-94.
'그러므로 목회 실제에서는 칭의에 대한 몇몇 안 되는 언급들에서 도출되는 논의는 바울이 변개(變改,conversion) 이후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의 칭의 선언의 범주에서 제외하였을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늘(Wernle)의 견해가 옳고 칭의가 순전히 회고적인 것이라면 *** 칭의와 최후 심판 간의 실제적인 연관성이 끊어지리라는 것은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8:33,34("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의 언어는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선언보다 더 절대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만큼은 절대적이다-보역) 사실 이는 현재 과거 미래의 범주를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사실은 예지(prognosis)와 예정(predestination) 사실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만일 그 범위가 여기 열거된 다른 개념들보다 그 무제한성과 무조건성이 덜 하다면, 칭의는 29절의 '구원의 울타리'로부터 빠졌을 것이다. 칭의는 '디카이오시스 조에스'( , 생명의 칭의)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endless life)이고, 성도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롬 5:18-21)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은, 만일 신적 구원 과정의 중심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도에 의하여 강하게 확언되고 있다.*'
*** 위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칭의가 회고적(retrospective)이라 함은 칭의가 칭의 순간 이전의 죄에 대해서만 발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죄는 칭의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역주)
* 이는 구원의 중심적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절대성을 가지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함의를 가진다.(역주)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93-94. 본문 인용)
각주2)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13-70. 제 1장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참고,
보스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이라는 '바울 신학'은 제 1장 바울 종말론의 구조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시간의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현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시간적 보편성에 따른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관관계를 먼저 구원의 요소로써의 칭의라는 개념으로 그 상관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2장이 되어진다.
'구약의 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antithetical)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울의 기독교가 가진 모든 근본적 특성을 가진 그 전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는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지고 연관된 것(circle as correlated and eschatologcally-complexioned parts)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그저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이를 자세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시도의 종말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신학을 전체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계속해서 점차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념적 반전(a conceptual retroversion)을 통하여 마지막이 진리를 드러내는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26-27. 본문 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다른 저서인 성경신학에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말할 때에 초자연적인 것과 사람들의 사고적 입장을 통하는 그러한 형태로서의 성경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있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의 계시적 이해라고 함과 증거와 같은 인식적 작용을 통하여서 성경이 기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해와 달이 년한을 이루는 보편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해아래 되어지는 것들의 판단의 주권이라고 함도 실제적이며 한정적이면서도 무한한 능력이 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신학적 개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러한 것의 형태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인식의 방향을 고려할 때에 구속적인 성경적 입장에서의 자연신학을 말할 수 있어도 자연신학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성경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야 한다.
자연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보편성 논쟁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지고 그것의 논쟁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비롯하여 여러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에서의 처음 첫 장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라는 측면을 시간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스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이라고 함과 공간이라고 함 즉 세대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전부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을 그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스의 한역 '바울의 종말론'을 번역하신 이승구 박사님은 보스의 실재론을 같이하지 않는 가운데서 본문의 잘못이해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 26) 즉 각주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이분적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구속하심의 시간관이라고 함의 차이를 보스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해의 주관성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시간이해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서의 주관이 아닌 플라토닉 신관을 비롯해서 임의적 당위성에 따른 주관적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때에, 시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써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시간이라고 함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국한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임의적 주관에 따른 시간관에 반대하여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겠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에서의 계시라는 것만 인식하겠다는 측면의 안티적 극단적 보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역할적인 인물을 들 수 있다면 랑케와 같은 신학자이다 그는 시간관이라고 함을 일반 역사적 개념의 입장에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증이라고 함을 판단함에 많은 분별을 요구하게 된다고 하겠다.
보스의 언급에서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세대의 이해라고 함이 어떻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에 따른 사실 규정이라고 함이 역사적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규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로써의 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함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이미'와 '아직'을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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