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스크랩] 칼빈의 神學思想 硏究

형람서원 2006. 4. 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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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학사상 연구

 

 



들어가는 말

김홍기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칼빈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네바시 목회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가로서, 교육가로서,저자로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 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스토 L. 곤잘레스는 그의 {기독교사상사}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그의 지적이며 신앙적인 발전과정에 관한 자료는 아주 희박하다... 그는 어릭 때부터 인문주의와 접촉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그는 젊은 시절에 왕의 의사였던 윌리엄 콥 (william cop )과 친구로 지냈는데, 콥은 또 다시 에라스무스와 뷰데(Bude)와 긴밀한 관계였다... 칼빈은 자신을 학자적인 소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려고 했었다... 그는 제네바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파렐(Farel,1489-1565)은 칼빈을 붙잡으며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겨 달라고 부탁하였다. 칼빈이 이러한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자 파렐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퍼부으면서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은 제네바에 머물기로 결심했으며, 종교개혁의 지도자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곤잘레스에 의하면 [기독교 강요] 는 개신교 신앙에 대한 조직적인 해설이요, 개혁전통의 근본문서이다. 또한 이책은 칼빈신학을 연구하는 우리들의 주된 자료이다. 또한 이 책은 칼빈신학을 연구하는 우리들의 주된 자료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가 당시의 어려운 시기에 그리스도인을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원했다.
분명히 칼빈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가장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여기서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칼빈이 생각했던바를 먼저 다루고, 이어서 그의 논문 [성만찬 소고]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칼빈은 당시 카르펜트라스 ( Carpentras)의 주교였던 추기경 사돌레토 (Sadoleto, 1477-1547)의 서신에 대한 답신(Responsio ad Sadoleti epistolam)에서 종교개혁의 대의명분을 뚜렷하게 밝혔다. 따라서 그의 답신은 변증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돌레토는 종교개혁자들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개인적 야망을 채우려는 '기독교 통일과 평화의 적들' 이라고 했고, 교회에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사돌레토의 글을 읽고 6일 간에 걸쳐서 [사돌레토에의 답신] 을 썼다.

1. [사돌레토에의 답신]

칼빈이 쓴 이 글은 '제네바 시민과 원로원에 보내온 사돌레토 추기경에 서한에 대한 칼빈의 답신'이다. 칼빈은 문제의 본질을 확실히 파악하고,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자신과 파렐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개인적 유익을 추구하려 했다는 비난을 물리치면서 서두를 열었다.
"만일 그대가 나를 개인적으로 비난했었더라면, 나는 그대의 학식을 생각하고 그대의 학문을 존중하여 그러한 비난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a call from God)에 의해 지지받고 또 인정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나의 사역이 도전받고 공격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만일 여기에서 침묵을 지키고 그대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요 배신행위(perfidy)가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이 명석하고 박학다식하고 사려 깊고 능력이 있고 또 근면하다고 지금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나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성실성(sincerity)을 가지고 노력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내가 만일 내 자신의 이익(my own intersest)만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나는 결코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나이에 이미 고위 성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와 대등한 인물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자들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탐심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남용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제일차적 존재 동기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시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고 모든 생각들을 자기 중심하여서만 전개하는 것은 그다지 건전한 신학은 못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났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선과 유익에 대한 모든 생각과 염려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 더욱 커야할 것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the salvation of his own soul)만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칼빈은 말씀의 우선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령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다 :
"선지자들이 교회의 갱신(the renewal of the Church)과 전세계로의 확장(its extension over the whole globe)을 예언할 때에 그들은 언제나 말씀에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성령의 구실하에 우리들을 복음의 단순한 교리(the simple doctrine of the gospel)로부터 호도하려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말도록 충고하였던 바, 매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밝혀주시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새겨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리들을 검사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성령은 교회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주시는 분이다. "성령없이 말씀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이 불합리하듯이 말씀없는 성령만을 자랑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불합리한 일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교회의 형태가 로마 교회보다 초대교회 형태에 훨씬 더 가깝다. 개혁자들은 "처음에는 무식한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더럽혀졌으며 후에는 로마 교황과 그의 도당들에 의하여 극악무도하게 난도질 당하고 거의 파괴되다시피한 교회의 본래의 형태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해 왔다. 칼빈에 의하면, 개혁자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기존의 교회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경건함과 거룩함(ancient piety and holiness)을 열망하여,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개선하고 초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칼빈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신칭의에 대한 지식이 제거된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소멸되고 종교는 무너지고 교회는 파괴되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공적이나 가치있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gratuitous mercy)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법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때,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표현을 따라 믿음의 의(the righteousness of faith)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분명코 공로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지푸라기(straw) 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칼빈의 의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의 공적들과는 상관없이 그의 불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신다.
칼빈은 칭의와 선행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선행이 칭의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 속에서는 선행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값없이 택함받은 목적이 순결하고 오염되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처럼, 값없이 주어지는 칭의의 목적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2. [성만찬 소고]

칼빈의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부터 성찬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기독교강요]는 판을 거듭하면서 성찬에 많은 분량을 할래해 나갔다.
칼빈은 [성만찬 속]에서 명쾌하게 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칼빈의 견해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찬관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만찬 제정의 이유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visible signs)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건지신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substance)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영적 둔감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수용하는 정도에 맞추어 우리를 이해시키고자 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한다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을 제정하셨다.
둘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다 온전히 찬양하게 된다.
세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모든 성결에 힘쓰게 된다.

(2) 성찬의 유익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거울로서 성찬을 주셨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에서 얻는 특별한 유익은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함이 있든지 지복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신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이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정죄함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에게 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칼빈에 의하면 성찬에서 두 가지 것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첫째는 모든 선의 근원이요 실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는 그의 죽음과 고난이 주는 열매와 효과이다."
우리는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실제로 받아야 한다. 성례의 내적 실체는 보이는 표지(visible signs)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표지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를 배은망덕에서 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부어주신 유익을 잊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게 하고,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를 고백케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찬의 유익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게 하고, 특히 우리 안에 사랑과 형제애을 지키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성찬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머리되신 그와 하나가 됨으로 그의 지체가 된 까닭에, 우선 우리를 그의 청결과 순결(purity and innocence)에 부합시키고 또한 특히 동일한 몸의 지체가 가져야 할 그런 사랑과 일치(charity and concord)를 서로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성찬의 올바른 사용
성찬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누구든지 이 성찬에 업신여김(contempt)이나 무관심(indifference)으로 접근하여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는 성찬을 사악하게 능욕하는 자요 더럽히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거룩하게 하신 것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intolerable blasphemy)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늘과 땅위에 주님의 몸과 피보다 더 귀하고 더 존엄한 것이 없을진대, 경망스럽고 준비없이(inconsiderately and without being well prepared)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사소한 실수일 수는 없다."
또한, "주님의 성찬에서 합당한 영양(proper nourishment)을 얻기 위해선 마땅히 우리 영혼은 기근으로 고통당하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 특히 교회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거나 그에게 원한을 품고서 성찬을 대하려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이, 우리 역시 끊을 수 없는 우정(indissoluble friendship)으로 하나가 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여러 조각으로 찢게 되며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믿음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며 우리의 양심이 수많은 죄악들을 책망하지 못할 정도로 순결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주의 거룩한 식탁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성찬은 우리의 허약함(our weakness)을 돕고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하며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고 더욱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료책(remedy)인 까닭에, 우리가 질병으로 억압된 느낌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찬을 삼가하기 보다 더욱 활용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의 사용 횟수에 관해서는 어떤 확실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삼가해야 할 특별한 경우도 있다. 더우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억지로 성찬을 이요케 하기 위해 성찬을 제공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주님이 의도하셨던 목적을 신중히 고려해보면, 성찬의 사용은 지금 많은 곳에서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연약함이 우리를 억누르면 누를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해주고 순결한 삶(purity of life)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 성찬에 의지함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수요할 능력(capacity)에 따라 자주 성찬을 거행하는 습관이 모든 교회에 잘 세워져야 한다."

(4) 성찬을 부패시키는 오류들
칼빈에 의하면, 사탄은 성찬의 유익을 오류와 미신으로 더럽히며, 그 열매를 부패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는 주님의 성찬을 거짓과 허식으로 뒤바꿔 놓기까지 했다. 성찬을 희생 제사(sacrifice)로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거부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 아무런 기초가 없고 고대 교회로부터의 어떤 흔적도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고 조화되지 않는다."
"성찬의 빵 앞에 부복하거나, 또 마치 그리스도가 그 빵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빵 속에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은 우상을 성찬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것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먹으라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또한 피의 상징을 분배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행히도 가려한 신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을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양식으로 주님의 피를 받는 것이 적지 않은 유익일진대 이것을 탈취하는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기이한 능력에 의해(by the secret and miraculous power of God) 완성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성찬의 참여의 띠(the bond of participation)이시다. 이 때문에 성찬은 영적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신앙으로 성찬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진정한 실체(the proper substance of the body and blood of Jesus Christ)에 참으로 참여하게 된다.

출처 : 모 세(Moses)
글쓴이 : 모세와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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