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리스도의 삼중직무론
(제2권 15장)
제15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3중의 구원 활동 : 첫째, 예언적 사명. 1-2)
1. 이 교리를 이해할 필요성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에 대한 성구들
어거스틴의 바른 논술과 같이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지만, 신자들과 공통된 근거가이 없고, 이것은 교회에만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심사 숙고할 때에, 우리는 이단자들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만 찾아볼 뿐이고, 그가 실제는 그들 사이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하나님의 아들, 세계의 구속자"라는 말을 교황주의자들이 드높이 외치지만, 그들은 이름만 허망한 구실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의 권능과 존엄성을 빼앗으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 : 19).
그러므로 믿음이 구원의 확고한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해야 할 원칙이 있다. 즉,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임명하신 직책에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알더라도 그 목적과 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는 것이 무가치할 것이다. 교황파주의자들도 이 이름들을 쓰지만, 이 칭호들이 각각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흥미도 없고 효과도 없이 사용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연달아 보내시며, 구원을 위해서 충분하고 유용한 교리도 알려 주셨지만, 경건자들의 마음에는 항상 메시야가 와야만 이해의 완전한 광명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했었다. 진정한 종교를 깨달은 일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이 기대가 침투했었다는 것은 "메시야가‥‥‥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한 여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요 4 : 25). 또 이것은 유대인들의 경솔한 억측이 아니라, 분명한 계시에서 배운 믿음이었다. 이사야의 말은 특히 유명하다.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 : 4). 다른 곳에서 이사야는 그를 "지혜가 위대한 사자(使者) 또는 해석자"라고 불렀다(사 9 : 6, 28 : 29 ; 렘 32 : 19의 융합).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복음의 교훈의 완전함을 찬양해서 우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히 1 : 1), 다음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첨부하는 것이다(히 1 : 2). 그러나 예언자들의 공통된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 기간에 신자들은 저 정상적인 혜택을 빼앗겼다고 탄식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시 74 : 9).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림이 멀지 않게 되었을 때에 "이상(異象)과 예언자가 응할" 기한을 다니엘에게 지정하셨다(단 9 : 24). 그 뜻은 거기서 언급하는 예언이 권위 있게 확립될 뿐 아니라, 모든 계시의 최고의 완성이 가까웠으므로, 얼마 동안 예언자가 없더라도 신자들이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사명의 의미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이 세 가지 직책에 관계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과 왕뿐 아니라, 예언자도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야"라는 존칭은 약속된 중보자에게도 주셨다. 다른 데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특히 그의 왕권에 관해서 또 그 왕권 때문에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예언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자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될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날을 전파하여"(사 61 : 1-2. 참조, 눅 4 : 18).
그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총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직분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 그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받으셔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끼워 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하늘에서 우뢰같이 들려 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마 17 : 5. 참조, 마 3 : 17) 모든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 각별한 특권으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 확산되어, "너희 아들들이 예언하며 너희 딸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는(욜 2 : 28 의역) 요엘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며(고전 1 : 30), 다른 곳에서 "그의 안에 지식과 총명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할 때에(골 2 : 3 의역), 그는 조금 다른 뜻을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내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귀한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한다(고전 2 : 2 의역). 복음의 단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의 태도는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왕으로서의 사명-그 영적 성격. 3-5)
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이제부터 왕권을 논하겠다. 이 문제를 말할 때에 먼저 그것은 본질상 영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원성은 다니엘서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며(단 2 : 44),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백성의 구원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눅 1 : 33). 그러나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개인 교인에 관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말씀은 첫째 종류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시 89 : 35-37).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겠다고 여기서 확실히 약속하신다. 이 예언의 진정한 성취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죽은 직후에 나라의 대부분에 대한 권위가 붕괴되고, 한 사사로운 개인에게로 넘어가서, 다윗 가문에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왕상 12장). 그 후에 권위는 더욱더 쇠퇴하여 드디어 슬프고 부끄러운 멸망이 되었다(왕하 24장).
이사야가 "그의 세대중에 누가 말하였으리오"라고 외치는 것도(사 53 : 8) 같은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업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 다윗은 원수들이 대담하게 하나님과 그 기름부으신 자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웃으면서, "군왕들과 백성이 헛되이 분노하도다‥‥‥하늘에 계신 자가 강하여 그들의 공격을 넉넉히 분쇄하리라"고 한다(시 2 : 2, 4). 이와 같이, 그는 교회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신자들에게 다짐하며, 교회가 압박을 받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다른 데서 다윗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한다(시 110 : 1). 아무리 많은 강적들이 교회를 전복할 음모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영원한 왕으로 임명하신 그 확고 부동한 결정을 전복시킬 힘은 그들에게 없다고, 다윗은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멋은 모두 이 세상과 시간에 속했으며 참으로 순식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들어올리기 위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언명하신다(요 18 : 36).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이 말에서 용기를 걷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시대에 이 은총이 완전히 결실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 힘과 효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투쟁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어렵고 가련하다는 사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된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결하는 풍부한 오락-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의 생활에 있다. 이 세상에서 한 국민이 번영하며 평안하려면, 한 쪽으로는 모든 재물이 풍부하며 국내가 평온해야 하며, 또 한 쪽으로는 외적에 대한 방위 태세가 강해야 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풍부히 주시며, 영적 원수들의 모든 공격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로 백성의 방위력을 강화하신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내외 양면으로 통치하실 때에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없는 것이며, 이 처음 받는 결실에 의해서 우리는 완전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령의 힘을 믿고,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항상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파에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볼 수 있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눅 17 : 20,21).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왕이라고 공언하시고, 자기 아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농담 삼아 그의 표적을 보자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각각 자기의 양심을 들여다 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롬 14 : 17).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땅에 붙은 일에 마음이 너무 쏠린 사람들이 미련한 영화를 꿈꾸지 못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간단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가르친다. 그 나라는 지상적이거나 육적인 것이어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영생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과 기한(飢寒)과 멸시와 비난과 그 밖의 괴로움이 있는 이 세상을 참고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자-즉, 우리 임금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하게 버려 두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며, 드디어 우리는 싸움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아 개선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모두 우리와 나누시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지금 그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대한 미(美)로 장식하시며 자기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영적인 본질 : 그리스도와 성부의 주권
그러므로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쓰는 것은 기름이나 향기로운 연고가 아니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이다(사 11 : 2). 이것이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시편이 선언하는 그 "즐거움의 기름"이다(시 45 : 7). 왕이 이와 같이 출중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굶주릴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가 풍부하게 되신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풍성한 것을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며(요 3 : 34),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하려든 것이라고 한다(요 1 : 16). 이 원천에서 바울이 말하는 풍성한 은혜가 흘러나온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 : 7). 이 발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령에 있고 지상적인 쾌락이나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한 말을 충분히 확인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참가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
이 거룩한 기름부음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세례 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즉,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그의 위에 와서 머물렀다 (요 1 : 32 ; 눅 3 : 22). 성령과 그 은사를 "기름부음"이라고 부르는 것은(요일 2 : 20, 27) 새로운 일이 아니며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방법은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늘 생명에 관해서는, 성령이 주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그 생명력이 한 방울도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에게 심히 필요한 하늘 보화가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신자들은 왕의 힘을 받아 불굴의 자세를 견지하며, 왕의 영적 보화가 그들에게 풍부하다. 따라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 후에‥‥‥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고 한 바울의 발언은(고전 15 : 24) 우리가 말한 이 영원성을 손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들 자신도‥‥‥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5 : 28). 저 완전한 영광 안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현재와 같지 않으리라고 바울은 말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아들의 손을 거쳐 우리를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며 보호하시며 도우신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헤매는 그 짧은 기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 계시며,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굳게 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를 아버지의 대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이 대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가진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이를테면 간접적으로 통치하며 보호하기로 정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엡 1 : 20-23).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 9-11). 이런 말로 바울은 또 그리스도의 나라와 현재 질서를 칭찬하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연약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때에는 교회를 수호하는 그리스도의 임무가 완수될 것이므로, 하나님 이 친히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리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같은 이유로 성경은 보통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주권을 행사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으나(참조, 고전 8 : 5),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8 : 6). 이런 근거에서 이 분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자기는 교회의 왕과 입법자라고(사 33 : 22) 선언하신 이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권능을 "아버지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아들이 시종 여일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배하신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는 무슨 까닭에 중보의 위격을 취하셨는가? 그가 아버지의 품과 무한한 영광을 두고 내려오신 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종할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열성을 다하여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또 공손히 복종하는 경건자들을 위하여 왕과 목자의 임무를 겸행하신다. 그러나 그는 저희 모든 자들을 질그릇 같이 부술 철장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리는 듣는다(시 2 : 9). 또 "그는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는 말씀도 듣는다(시 110 : 6). 우리는 현대에서 이런 일의 예를 몇 개 보지만, 완전한 증명은 최후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 심판은 또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조치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 제사장직으로서의 사명 : 화해와 중보 6)
6.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그 목적과 효험을 간단히 말하겠다. 그는 순결하고 흠없으신 중보자로서 자기의 성결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키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가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또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에 대하여 노하신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속죄가 그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직책을 다하려고 그리스도가 제물을 가지고 나오셔야 했다. 율법하에서 제사장이 피를 들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히 9 : 7) 이것은 제사장이 신자들의 대언자로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죄를 대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게 하려는 뜻이었다(레 16 : 2-3). 사도는 히브리서 7장부터 거의 10장 끝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길게 논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한다(히 9 : 22). 하나님께서는 "변치 아니하실" 엄숙한 행세로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시 110 : 4. 참조, 히 5 : 6, 7 : 1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 말씀으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아시는 것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효험과 혜택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영원한 중재자시며, 그의 호소에 의해서 우리는 호의를 얻는다. 기도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경건자들의 양심의 평화도 여기서 생긴다. 그들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심하고 의지하며, 중보자를 통해서 성별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율법하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서 한 분이 제사장과 제물을 겸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에 합당한 것이 달리 없으며, 독생자를 하나님에게 드릴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행동하시는 것은 영원한 화해 원칙에 의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며 친절하게 되시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위대한 직책에서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시려는 뜻이다(계 1 : 6). 우리 자신은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에게 바치며, 자유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하며 향기롭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신 뜻은 이것이다(요 17 : 19), 우리는 원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우리를 아버지 앞에 성별하셨으므로, 오직 그의 성결이 몸에 가득히 배어 순결하고 정결한 자로서 심지어 거룩한 자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듯이, 성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때문이다(단 9 : 24). 우리는 이 기름부음과 그 당시에 사용된 그림자 같은 기름 부음과의 대조에 주의해야 한다. 마치 천사가 "그림자를 흩어버리면 참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노라고 한 자들의 조작은 더욱 가증하다. 교황파는 매일 이 짓을 시도하며,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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