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대한민국 애국가 작곡가와 작사자는 누구인가?

형람서원 2025. 5. 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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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대한민국 애국가 작곡가와 작사자는 누구인가?

답변. 작사자를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윤치호이다. 그리고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공식 입장으로 작사자를 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곡가는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확실하다.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 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맨 처음 문제를 제기한 성악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년)과 국사편찬위 조사 과정의 발언에서 유추(類推)가 가능하다. 박은용은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 작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곡가와 작사자가 모두 친일행적이 있는 위인을 어떻게 볼까? 그래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을까?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23일-1945년 12월 6일)

1955년 국사편찬위, 사실상 윤치호 인정하고서도 윤치호의 친일 행적 의식해 외견상 ‘미상’으로 발표

애국가는 <찬미가>를 기원으로 보는데, 윤치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현 ‘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수록한 《애국 찬미가집》이다.

1897년 독립신보에 '무궁화가'가 등장하는데, 윤치호는 28세, 안창호는 19세이다. 1908년 윤치호는 35세, 안창호는 30세이다.

안익태와 윤치호는 친일파로 분류된 위인들이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표절과 친일이 드러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라고 탄식했다.([오마이뉴스]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2021.08.16. 오마이뉴스)

https://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0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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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

koya-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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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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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17. KBS에서 가진 양 의견에 대한 토론회(윤치호 VS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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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미스터리 윤치호 vs 안창호

-지금 듣고 계신 곡.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있죠.이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은 안익태 선생입니다.그러면 작사를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현재 공식적으로는 미상입니다.하지만 윤치호가 유력한 작사자로 거론되던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쟁이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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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적만큼 애국심도 충직···애국가 작곡 안익태 두 얼굴 | 중앙일보

"최근 광복회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ㆍ친나치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나치와 함께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 한 나라뿐입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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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김종성의 히,스토리] 오염된 애국가 ▲ <애국가> 악보. ⓒ 위키백과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지난 4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때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됐다. 뒤이어 그의 집안사람들이 가족 모임 때 애국가 4절까지 합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전체주의적이다’라는 소감들이 나오자, 그 집안 며느리들이 가족 성명을 발표하는 진풍경도 나왔다.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가 합창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집회에서도 나타났듯이 극우세력이 국민통합의 상징물을 앞세우며 대중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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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주요기사 [뉴스1] 70여년 전 ‘반민특위 습격’ 앞장선 경찰…역사를 대하는 태도[경찰본색] 2025년 5월 2일 [경향신문]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랑스러운 역사, 친일과 독재” 2025년 5월 2일 [오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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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1864-1945)는 널리 알려진 역사 인물이다. 윤치호가 당시 평균보다 오래 산 윤치호의 삶이 길어지면서 그는 부인 2명과 사별하였고, 많은 가족, 친척, 친구, 지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하기도 했다. 윤치호 자신이 1945년 12월 6일 뇌출혈로 인해 81년간의 삶을 마쳤을 때, 그는 조선 말기, 대한 제국의 흥망, 일제 강점기의 전부와 한반도의 광복, 해방 공간을 모두 경험하고, 약 60년에 걸쳐 이러한 경험과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일기에 자세하게 수록한 인물이었다.

조선 왕족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며 명성황후의 암살과 장례식·제사를 경험하고, 고종과 순종의 죽음과 국장도 경험했고 이런 사건들에 대한 기록 역시 남겼다. 게다가, 일본 총독부의 한국 장례식, 무덤 문화에 관한 개입을 목격했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기타 근대적 공동묘지에 대해도 알고 있었으며, 기타 동시대의 역사적 인물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도 언급했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은 “오래 끌었던 나라의 죽음”의 원인으로 인식하며, 1901년에 “틀림없이 조선은 정치적으로, 지식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렸다”라고 애통했다.

본 연구는 윤치호는 이러한 여러 가지 차원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ès, 1914-1984)의 대표적 죽음 관련 연구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죽음”의 역사성 연구에 공헌하려고 한다. 윤치호 일기를 통해, 조선 근대화의 갈림길에 썬 윤치호가, 커다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삶의 끝으로 불변성 강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인식한지 알아볼 시도이다. 또한 “죽음”에 불변성이 있더라도, 장례 문화는 시대 배경에 따라 당연히 바뀔 것이다. 윤지호가 기독교와 일제 통제로 인해 바꿔가는 장례문화에 대한 인식을 추구함으로써 근대화를 늘 우선한 윤치호의 조선 전통문화와의 대립에 대해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윤치호가 젊은 시절부터 조선을 지옥으로 생각했음을 일기에서 알 수 있는데, 조선이 곧 지옥이라면 사후에야 갈 수 있는 하늘은 이 조선의 대안이었다. 나이 많은 윤치호 개인에게도 죽음은 곧 더 행복한 세계의 구상이었다. 서양과 달리 기독교가 지배이념이 아니었던 조선에서, 기독교는 줄곧 윤치호에게 조선의 상태를 분석하는 틀과 문명에 대한 인식적 기반을 제공했다. 윤치호가 친일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백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황인의 해방을 기리던 시기에도 영어로 일기 쓰는 관습을 못했던 것처럼, 그는 기독교적 인식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의 우민관도 극복하지 못했다.

Without doubt, Yun Ch'i-ho (1864-1945) is one of the most well known and controversial figures in modern Korean history. His diaries, covering a huge span of his eventful life, give witness of the thoughts and feelings of a man who struggled between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Korean nationalism and Japanese collaboration. When Yun himself passed away during the morning of December 6, 1945, he had not only witnessed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entire colonial period, but also had parted from three wives and many other family members and friends. In this age of huge transformations in Korea, Yun was also a firsthand witness to such prominent deaths and funerals as those of Queen Min and King Kojong and personally had to struggle with the Japanese meddling to reform Korean burial practices. Although Yun's views on death and burials can by no means be considered representative for the lot of Koreans during the colonial period, his concerns on death and burials will not only help to trace how death had an impact on his singular life and his changing attitudes. This paper also aims to provide insights into how a modern conception of death became a constant in an ever changing ever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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