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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단] 그리스도인의 견인에 대한 바른 고찰

형람서원 2025. 5. 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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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낙 범 박사(총신 교수, 새순교회)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늘 확신을 갖고 살면 좋겠지만 질문을 하며 산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고심 끝에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을 받았으나 중도에 탈락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나 믿음이 식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 “내가 예수 믿음으로 천국을 향해 가고 있으나 마귀의 시험에 걸러 넘어지면 지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겠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즉 자신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원치 않게 짓는 죄와 허물로 인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미래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보장(保藏)혹은 구원의 확신 앞에서 발생되는 이런 불안과 갈등은 바른 현상이 아니다.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문제로 인해 발생되는 불안과 갈등을 하루속히 불식시켜야 한다. 그래야 확신 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를 위한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견인에 대한 문제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그리스도인의 견인에 대한 바른 고찰」이라는 논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견인(끝까지 참음)의 개념과 성경적 이해, 동시에 견인에 대한 신학적 타당성과 반론, 그리고 이애 대한 반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구원의 영원성과 구원의 탈락여부에 대한 논쟁 종식에 일조하고자 한다.  

견인(끝까지 참음)의 개념

견인이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 보면 영어로 Perseverance이고, 헬라어로 προσκατἑησις(프로스카테에시스)이다. 특히 προσκατἑησις는 προσκατερἑω(프로스테레오;카테굳게 붙잡다)와 κατερἑω(카테레오; 굳게 참는다)에서 인출된 단어이다. 그 뜻은 ‘인내로서 끝까지 참는 것이다.

여기서 견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배를 잘 드리고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잘 하는 자, 신앙연조가 오래된 자, 교회의 직분을 갖고 기도생활과 봉사활동을 잘 하는 자들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확신해도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견인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그를 참으로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받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탈락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산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에서 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들이 받은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끝까지 보호,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견인이란 인간 편에서 영화에 이를 때까지 굳게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붙잡는다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후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에 이르러 영원한 구원을 이루기까지 중도에 탈락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로 끝까지 붙잡아 준다는 뜻이다.

견인(끝까지 참음)의 성경적 근거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견인교리를 놓고 다양한 이해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성경적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요 성경인 요한복음 6:39~ 40, 요한복음 10:27~28, 로마서 8:29~30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복음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들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영생(구원)케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사실을 믿는 자들을 한명도 놓치지 않고 영생(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약속하고 있고, 또 예수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 한 번이지만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구원이 되도록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으로 약속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은혜의 산물이기에 그 누구도, 그리고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중도에 상실되지 않고 반드시 영생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한번 받은 구원은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반드시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다.

2.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내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알고 그의 음성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면서 “멸망치 않게 한다.”고 약속한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게 한다고 약속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안전은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약해지거나 의심을 갖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놓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영생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이다.

3.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미리 예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죽어 가는 자 중에 얼마를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자기의 주권으로 창세전에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다. “부르셨다.”는 것은 복음을 통해 부름을 받은 자를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초청했다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통해 부름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을 때 하나님이 하늘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구원이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고 영원한 구원이기에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혹시 도중에 낙심하거나 시험에 넘어져 타락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품으로 돌아 올 때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으로 참으시면서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로마서8:38~39에서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견인(끝까지 참음)의 타당성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견인 교리를 놓고, 그 타당성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신학적 타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구원이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할 때 첫 번째 타당성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란 선택의 기준을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 등의 어떤 조건에 두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둔 선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 받음이 창세전 하나님이 구속중보자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자신의 기쁘신 뜻(엡 1:4~6)에 따라 무조건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선택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에서, 후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고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결코 탈락할 수가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10:28에 진술한대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기초하고 있기에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구원이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할 때 두 번째 타당성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구원받은 자가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한 바른 이해는 우선 아담과의 연합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인류의 첫 대표인 아담과 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 하므로 그에게 연합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은 후, 성령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켰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살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이기에 생명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아담의 생명으로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그분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결국 이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원으로부터 결코 탈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 성령의 인침

구원이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할 때 세 번째 타당성은 성령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 쳤다는데 있다. 여기서 성령이 인을 쳤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 믿을 때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농부가 자기 가축에 낙인을 찍는 것과 같다. 그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와 연합된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영접 하는 순간)에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다. 이는 “너희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έσΦραγίσ-θητ; 엡 1:13)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부정과거시상(aorist tense)으로 성령의 인치심의 역사가 과거에 한번 있었음을 증거 한다. 이렇게 성령의 인치심이 일생에 한번만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이므로 후에 다시 받는 것이 아니다. 결국 한번 받는 인침이 즉각적이지만, 최종적이고 또한 영원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놀랍고, 그리스도의 피 값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또 이 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또 다시 죄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인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인치심이 완전하기에 그리스도인의 몸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구원에서 절대로 탈락하지 않고 영생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다.

견인(끝까지 참음)에 대한 반론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견인교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반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언급하고 그 반론이 오해에서 빗어진 것임을 밝히고 반박하고자 한다.

1. 나태와 방종의 삶을 조장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영원하다면 견인(끝까지 참음)은 그리스도인을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만든다고 한다. 이것은 구원의 영원성을 거부하는 자들이 제기하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이미 받아 논 밥상으로 알고 실제의 삶에서 자기 마음대로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받은 구원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영원히 보장한다는 것 때문에 죄와 싸워야 할 거룩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산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중심의 신앙에서 떠나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견인 교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나태한 삶, 방종의 삶을 살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반론에 대해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들이 견인 때문에 나태하고 방종의 삶을 살지 않고 영적인 긴장을 갖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내주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인만 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사는데 있음을 알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구원받았기에, 죄와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실제로 성령의 인도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견인에 대한 이들의 반론은 오해에서 빚어진 것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2. 믿음생활 요구와 상충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신 칭의)이 영원하다면 견인(끝까지 참음)교리는 믿음생활을 바로 하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이것 역시 견인에 대해 반론하는 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견인(끝까지 참음)교리는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생활을 잘하라는 성경의 말씀과 상충된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보장하는데 왜 믿음생활을 하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요 8:31),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을 것이다“(요 15:5).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이들은 견인교리와 믿음생활을 요구하는 말씀이 서로 충돌한다고 보고 견인교리에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 말씀들은 견인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견인(끝까지 참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방편이다. 그러하기에 이 둘은 조화를 이룬다.

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방편인 말씀을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견인교리와 믿음생활을 요구하는 말씀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조화를 이룸으로 이들의 반론은 잘못된 주장이다.

3. 자유의지의 배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견인(끝까지 참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의하면 견인교리야말로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반론은 견인교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와 모순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이들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찬동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견인교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죄 지은 인간의 상태가 전적타락과 전적부패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견인교리에 사람의 자유의지가 나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이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이렇게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고, 또 피 흘리므로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무시하게 된다. 또 현실적으로는 내주하셔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음에서 중도에 탈락하지 않도록 계속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까지도 무시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우리의 구원을 견인해 가시는 하나님께 저항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자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물론 순종할 때 은혜가 따라 오고 순종하지 않을 때 징계가 따라 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사람을 선택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한 후, 그 구원이 영원하도록 견인하시는 사실 앞에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견인(끝까지 참음)해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순종하는 일에 자유의지가 행사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견인교리 앞에 자유의지가 배제된다고 불평하지 말고 구원(견인)을 베푸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다.

견인(끝까지 참음)에 대한 결론적 고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견인에 대한 바른 고찰」이라는 논지로 견인문제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택하신 사람들에게 베푼 구원이 절대 취소되지 않기에, 견인교리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 곧 은혜이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인간의 행위는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다.

그런데도 구원의 취소 가능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능력자나 변덕쟁이로 만드는 꼴이 된다, 또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전능하심을 모독하는 꼴이 된다. 또한 성령 하나님의 적용사역과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무가치하고 효력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따라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지금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바람직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을 획득한 사람이 되면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될 것이다. 또 행함으로 그 구원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행함(행위)이 구원 여부와 구원의 성장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지, 절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행위구원이 옳다고 생각하면 613가지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켜야 되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제대로 지킬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다.

결국, 이런 논의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 구원에는 믿음이 강조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구원은 이미 받은 기본구원,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성화 구원, 장차 받을 영화구원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믿음 생활을 계속하게 하는 견인(끝까지 참음)에 의해 장래에 궁극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최낙범 박사. 중앙대학교 철학과(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 M), 숭실대학교 일반대학원(Th. M). 미, Kernel University 대학원(Th. D. 조직신학). 총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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