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타임스

[송다니엘 편지]보수적인 사람을 쫓아내는 독일 사회

형람서원 2025. 4. 19.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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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일에서 한 대학교수가 우파라는 이유로 표절의 혐의를 씌워 대학에서 해고를 당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녀는 Bonn 대학의 유명한 정치학 교수 게로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독일 사회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나오는 오세아니아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녀는 상도 많이 받고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녀는 그간 독일의 난민 수용 정책과 정부의 코로나 정책을 비판하고, 러우전쟁에서 마이클 심 박사와 비슷한 논조로 주장(전적으로 러시아의 잘못이 아니다)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사회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동료들도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그녀가 본 인터뷰에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다양성의 포용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아야 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정중하고 공정한 논쟁과 상호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현 독일은 민주주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공정한 논쟁이 아니라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게로 교수와 비슷한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일단 이것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송다니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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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사회를 권위주의적으로 닫아버린다」

(„Die autoritäre Schließung der Gesellschaft“)

인터뷰: 울리케 게로(Ulrike Guerot, 1964-)는 독일에서 정치와 언론의 매우 부정적인 담론 태도를 몸으로 체험했다. 현재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명한 이 정치학자는 독일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진행자: 모리츠 슈바르츠(Moritz Schwarz)/ Junge Freiheit

번역 송다니엘

게로 교수님, 마린 르펜(Marine Le Pen;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우파 포퓰리스트)에 대한 판결은 스캔들입니까?

울리케 게로: 저는 법률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신뢰하는 매우 해박한 프랑스 전문가가 말하길, 이 판결은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게로: 법적으로 정당할 수는 있어도,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특히 문제되는 금액이 500만 유로로 비교적 적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4억 유로가 관련된 사건에도 불구하고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의 백신 관련 부패에 대한 유럽사법재판소(EuGH)의 판결도, 바로 다음 날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옌스 슈판은 — 아마도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후계자가 될 인물인데 — 마스크 거래에서 수천만 유로에 달하는 금액이 오갔음에도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멈출 일은 없을 듯하고, 그가 실제로 고소당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르펜이 우파가 아니었다면 판결이 더 관대했을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게로: 꼭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유럽에서 내려진 정치적 판결 중 가장 중대한 것일 수 있으며, 확실히 역사적인 판결입니다. 만약 짐작이 사실이 아니라면, 용감한 여성 판사가 마침내 프랑스 정치 부패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이고, 만약 짐작이 사실이라면, 선거를 법원 판결로 대체하려는 위험한 현대적 경향을 강화하는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옛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향후 판결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에 대해 검찰은 부패 혐의로 7년형을 구형한 상태입니다.

선거에 나오지 못하도록 사법부에서 막는 것을 의미합니까?

게로: 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트럼프를 선거 전에 감옥에 보내려는 시도라든지, 루마니아에서는 대선 1차 투표에서 승리한 칼린 게오르게스쿠의 출마를 금지한 일, 독일 내에서는 AfD(독일을 위한 대안당)를 금지하려는 논의, 그리고 현재 터키에서는 야당 지도자 에크렘 이마모글루의 체포 등이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가 합법적(legal)일 수는 있지만, 정당한 것(legitim)은 아닙니다. ‘정당성’을 ‘합법성’으로 축소하는 것은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의 전조입니다!

그렇다면 유럽 민주주의에 어떤 위협이 닥치고 있는 겁니까?

게로: 정치학자 요하네스 아놀리(Johannes Agnoli)가 말한 것처럼, 권위주의로의 전환의 위협입니다. 그는 이를 ‘내향화(Involution)’라고 표현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적 수단을 이용하지만, 실제로는 내부로부터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상 민주주의가 폐지되는 건 아니지만, 그 내부는 권위주의적 요소로 채워지게 됩니다.

교수님은 이 과정을 몸소 겪으셨지요. 한때 각광받던 정치학자에서 '기피 인물'이 되셨습니다.

게로: 제 해임이 아마도 명분만 그럴듯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 각도에서 바라보면, 민주주의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삶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요?

게로: 요즘은 나라의 문제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자기만족적인 부유층 시민들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예전에는 저도 정치- 언론 시스템 속에서 일했어요. 각 정당의 정치인들, 기자들, 그리고 볼프강 이싱어, 클라우디아 마요르, 볼프강 쇼이블레, 젬 외즈데미르, 프란치스카 브란트너, 프리드리히 메르츠 같은 인물들을 자주 만났죠. 끊임없이 열거할 수 있을 만큼 이러한 사람은 많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정보 교환, 배경 설명, 회의, 컨퍼런스, 인맥이 핵심입니다. 저는 그 안에 있었고, 그게 본질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죠.

저는 제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전공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었고, 올바른 분석과 비판적 사고는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고, 또한 무엇이든 논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하루아침에 배제된다면 이것은 정말 가혹한 일입니다. 사회적 맥락, 즉 나를 감싸고 있던 사회적 조직망을 몽땅 잃게 되죠 — 게다가 처음에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저는 본 대학에서의 교수자리도 잃었고,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수입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표절 의혹 때문입니다. 1심에서 노동법원은 교수님의 소송을 기각했고, 현재 항소가 진행 중입니다.

게로: 저는 이 완전히 과장된 혐의들을 반드시 반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쾰른 주노동법원이 5월 16일에 이 해고가 법적으로 무효라고 판단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사회적 메커니즘과 우리의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 놓습니다(Dennoch verändert eine solche Erfahrung den Blick auf die gesellschaftlichen Mechanismen und unsere Demokratie). 예전에 FAZ는 저를 두고 “말이 빠르고 매우 똑똑한 울리케 게로”라고 썼습니다.

그러니 “매우 지적인” 울리케 게로가 코로나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녀의 직업적 주변 사람들은 한번쯤 멈춰서 “그럼 정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동안 들었던 모든 찬사와 인정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줄리안 어산지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의 가장 큰 실망은, 지성과 용기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고 했죠.

지금은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게로: 저는 제 직업적 환경(동료 교수들)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곳의 사람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에서는 자유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 – 이것은 기본법(헌법)에도 명시된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 입장을 지켰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저를 공격하고, 시스템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이들을 도저히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자신을 대단히 민주적이고, 사회적이며, 관용적이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다고 보십니까?

게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환경 속에 완전히 젖어 있다 보면, 그 환경에서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믿게 된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 과거의 저도 그랬듯이 – 다른 생각이나 다른 주장을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혹시 인식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위협적으로 다가와 철저히 거부하게 되죠. 오늘날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민주주의 수호”(„Demokratie retten“)라고 부릅니다.

그런 고착된 태도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게로: 그럴 수 없습니다. 고대 시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가 말했듯이, 인간의 본성은 이미 쓰러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를 향한 혐오 기사만 해도 주요 언론을 가리지 않고 180건이 넘었습니다.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저와 접촉조차 시도한 적 없는 사람들이, 마치 제가 ‘당국이 쏘아 죽이도록 허락한 사냥 짐승’(als ich quasi zum Abschuß freigegeben war)과 같이 저를 짓밟았습니다. 그들이 제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발언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핵심 이유는, 제가 우크라이나어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례지만, 클라우디아 마요르(Claudia Major), 로데리히 키제베터(Roderich Kiese- wetter), 아그네스 슈트락-침머만(Agnes Strack-Zimmermann)은 우크라이나어를 하나요?

그래서 저는 그 편집국의 두 명의 매우 친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 그중 한 명과는 2019년에 함께 휴가를 갔을 정도였죠. 누군가 한마디라도 경고했으면 그런 기사가 인쇄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잖아요. Der Spiegel에서도 저를 향한 터무니없는 증오 기사가 실렸고, 저는 그 편집부의 절친한 친구에게 불만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돌아온 답변은 회피하거나 나에게 분노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외면은 정말 아프고, 고개를 절로 흔들게 만듭니다.

Süddeutsche Zeitung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의 제 오랜 친구는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가 죽기 전에 그에 대한 부고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그의 학술보좌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 기사에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들로르가 정작 2023년에 사망했을 때,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편집국에서 제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는 겁니다.

뭐라고요? 이건 마치 오웰 소설 같잖아요!

게로: 맞아요. 제가 그에게, 그런 부고 기사를 그대로 싣는다면 그가 무슨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지를 묻자, 그는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했어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이건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가장 극심한 위기의 순간에는 적의 말이 아픈 것이 아니라, 친구의 말이 없다(도와주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더 아프다.” 대학 동료 한 명이 저에게 악수를 하지 않았던 일이라든지, 베를린의 유명 문학 에이전트가 저 때문에 일부러 식당을 떠난 일은, 동시에 매우 고통스럽고 또 눈을 뜨이게 하는 경험이었어요.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 사람들처럼 그냥 맞춰서 행동해볼 생각은 안 하셨나요?

게로: 그런 걸 피하려고 “맞춰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이렇게 권위적으로 사회가 닫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충격에 휩싸였고, 거의 충동적으로 인터뷰, 글, 책으로 반응했어요. 저는 이 나라의 표현의 자유를 믿었고, 정치학자로서 입을 여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그 모든 걸 잘 버텨낸 것이 지금은 기뻐요. 왜냐하면 몇 달 동안 정신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거든요.

이건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일을 겪고 있지만 아무도 인터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회복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한 비판적 목소리들을 복권시켜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도, 민주주의도 회복되지 못할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고, 그 정치적 결과로 방화벽 같은 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유권자나 시민의 약 3분의 1이 정치적 담론에서 배제되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용기를 준 경험도 있었어요.

예를 들면요?

게로: 갑자기 “제 목소리”에 대해 시민들로부터 격려, 편지, 꽃, 시, 온갖 선물을 받기 시작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고, 손수 뜬 양말, 직접 구운 쿠키, 집에서 만든 간 소시지 등을 보내왔어요. 예술가들은 제 초상화를 보내주었죠. 다들 자기가 직접 만든 것들이었어요. 그게 중요한 포인트예요. 사람들은 제게 뭔가 자기 자신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깨달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제 발언이 일종의 ‘말의 선물’이 되었구나. 그리고 그 손수 만든 선물들은 일종의 ‘응답의 선물’이에요. “당신의 공개적 저항에 감사해요 – 그래서 이 선물을 드려요!”라고요. 무기력함을 느낀 많은 분들이 제게, 제 말이 코로나 시기를 버티게 해줬다고 했어요.

그제야 제 책이 단지 정치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저는 이른바 기득권 층에서 쫓겨나 “보통 시민들”, 말하자면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 거기엔 제가 기득권층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따뜻함이 있었어요. 이 두 세계를 다시 화해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해요. 예전엔 정치적 지혜, 품격, 용기, 유쾌함을 겸비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잖아요. 빌리 브란트나 헬무트 콜처럼요.

사람들은 당신도 시스템의 일부였다고 하셨는데요. 마르틴 호만(2003)이나 에바 헤르만(2007) 같은 비슷한 사례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공범이 되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게로: “시스템의 일부”라는 표현 자체가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말이에요. 우리는 한때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공존하는, 분열되지 않은 공화국이었어요. 그 안엔 배제가 없었죠.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 대 “다른 우리”를 설정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사회가 되었어요. 일부 극단화된 중도층(Eine extremisierte Mitte)이 “민주주의를 구하겠다”며 방화벽을 세우고 있고, 그것이 독일 민주주의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 이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스타시스(Stasis)”, 즉 사회적 정체 상태나, 나아가 내전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 외에는, 저는 배제에 가담한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연대의식이 부족했을 수도 있어요. 에바 헤르만의 조기 배제나, 작가 우베 텔캄프 같은 사람들의 사례는 제게 그다지 각인되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고, 독일 내 정치 상황을 자세히 따라가지 못했던 탓이겠죠. 하지만 어떤 부조리도, 자신이 직접 피해자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건 맞아요. 그건 인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지금도 많은 독일 시민들은 표현의 자유에 문제가 있다고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제 사례를 공적으로 – 그리고 다른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신해 –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누구나 마르틴 니묄러의 유명한 말을 알고 있잖아요.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초기 징후에 저항해야 할 때”예요! 이게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예요. 어떤 사람들은 대안당(AfD)를 경계하며 초기 징후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극단화된 중도층”을 보고 이들에 저항해야 한다고 해요. 이 논리에서 우리는 시급히 벗어나야 합니다!

어떻게요?

게로: 제 해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그리고 사회적 과제는 이것이에요: 공화국에서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새로운 신조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2년간 많은 새로운 인연을 맺었고, 이른바 보수적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눴어요. 저는 예전부터, 대개는 이유 없이 담론과 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사람들과 깊이 교류했어요. 제가 깨달은 건, 마음속의 장벽만 넘어서면,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는, 열정적인 시민들이라는 거예요. 각자의 방식대로요. 그들은 두려움과 우려를 말할 줄 알고, 그것에 근거도 제시할 수 있어요.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그들을 ‘포퓰리스트’라며 단정해선 안 돼요.

결국 우리는 모두 플라톤의 의미에서 ‘포풀루스(민중)’입니다. 이른바 보수적인 사람들도 대부분은 매우 품위 있고,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바로 그것이 공화국의 본질이죠: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논쟁하되, 인간적으로는 정중하고 공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울리케 게로 교수는 Bonn 대학교 유럽센터의 공동 소장으로 내정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파리, 브뤼셀, 런던, 워싱턴, 뉴욕, 베를린 등지의 여러 대학과 싱크탱크에서 연구와 강의를 해왔습니다. 1964년 그레벤브로이히(Grevenbroich)에서 태어난 정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침묵은 동의하는 것이다』(2022), 『유럽의 종말』(2022)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2025년 5월에는 『시대 전환: 현재의 정신적 상황에 대하여』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더 자세한 정보는 www.ulrike-guerot.d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다니엘 목사, 유럽개혁신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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