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DavidHume)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악을 기꺼이 방지하실 것인가,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기력하다.그는 하실 수 있지만,기꺼이 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가 있다.그가 방지하실 수도 있고 또한, 기꺼이 그렇게 하신다 면,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David Hume,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part 10.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causality)에 근거한다.”34)
목창균, 「현대 신학 논쟁」(서울:두란노,1999), 456.
조로아스터교의 핵심 경전인 「가타스」에서 이원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야스나” 30장 1-7절에 등장한다.이 내용에서 이원론적인 부분만 발췌 해 보면 다음과 같다:
2.가장 귀한 진리를 귀 기울여 듣고 깨인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한 다음,선과 악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하라.위대한 날,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너희들 모 두 일어나 아후라의 말씀(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하라.
3.태초에 생각 속에 들어 있던 쌍둥이 영(靈)이 언어와 행동을 통해 선과 악의 모 습으로 나타났다.지혜로운 자들은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사이에서 바른 것을 선 택하겠지만,어리석은 자들은 바른 선택을 못하고 죄의 길에 빠질 것이다.
4.생각 속에서 존재하던 두 영이 서로 만나 생명과 비 생명이 생겼다.거짓을 따 르는 사악한 자들은 가장 저급한 정신 상태에 떨어지지만,진리를 따르는 의로운 자들은 최고의 정신 상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영원히 계속 되리라.
5.두 영 가운데 거짓 영은 가장 악한 행동만 일삼으며,순결한 마음과 썩지 않는 지혜의 빛을 덧입은 가장 경건한 영은 진리를 택한다.순전한 믿음으로 칭찬 받을 행동을 하는 사람 역시 진리를 택한다.38)
나종근, 「샴발라총서」,제4권 「조로아스터」(서울:시공사,2000),32-34.
마니교의 이원론, 선과 악의 이원론.
J.D.레벤슨은 그의 책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악의 끈질긴 잔존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이라는 저서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재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성은 모든 인간의 악행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는 전 능이 아닌 악에 의하여 상처받고 망가지는 것을 견디는 전능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성은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완성되는 전능성이며,하나님의 절대주권 역시 인간의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복종에 의하여 완성되어지는 그런 겸손한 절대주권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레벤슨은 악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내재된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본다.46)
이성일,“악에 대한 K.Barth와 JonD.Levenson의 비교 연구 -무성과 혼돈세력을 중심 으로”(신학석사논문,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2006),42-43.
칼 바르트(KarlBarth,1886-1968) 역시 J.D.레벤슨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다. 바르트는 마귀, 악, 죄의 기원 및 본질을 “무”(Das Nichtige - nihil, nothingness,whatisnot)라는 표제하에서 검토한다.그는 하나님의 세계 지배와 반대와 항거가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을 무로 규정했다.이것은 창세기 1:1-3 의 혼돈과 흑암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혼돈과 무적인 것(nothingness)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를 악으로 보았다.이 카오스는 하나님 의 피조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에 항거할 수 있는 무의 권세로 보았다.그 러므로 마귀는 피조물이 아니라 무에서 온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한다고 보면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을 거부했다.48)
목창균,「현대 신학 논쟁」,459.
다.아우구스티누스의 악의 개념:결핍으로서의 자연악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상의 기초에는 회심 이전부터 따라다녔던 악의 문 제가 있었다.이에 대한 증거로는 그가 쓴 초기 저서 뿐아니라 후기 저서들 안 에서도 항상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72) 이와같이 아우구스 티누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악의 문제, 즉 인간의 경우 죄의 문제였다. 그가 젊은 시절에 기독교를 거부하고 마니교와 회의주의, 신플라톤주의에 빠진 것 역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개념을 마니교를 통해서 해결하려 했었다. 마니교는 신을 절대적인 유일신으로 보지 않고, 두 개의 상반된 힘이 서로 투쟁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인 상태는 인간 안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였다.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마니교의 설명은 그에게 이원론적인 선과 악은 혹은 선의 신과 악의 신은 본래적으로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게는 악이 전혀 없으며, 악의 가능성 또한 전혀 없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 님의 통치의 우주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악이 실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고민하고 좌절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 사이의 딜레마를,악과 죄는 완 전한 본성으로부터의 결핍을 의미하며 따라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결핍으로써 악을 찾아내는 일은 순수한 상태가 지닌 본성,즉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찬송과 동일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는 마니교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신플라톤주 의를 만남으로서 이루어졌다. 플로티누스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는 ‘궁극적 일자’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주장한다. 지고의 존재가 충만한 상태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존재를 쏟아 내는 창조의 과정에서 더 이상 쏟아 낼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서 공허한 어두움과 비존재가 유출(emanation)된다는 것이 다.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로부터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악 은 결핍이라는 악의 개념이었다.73)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선의 결핍”(privatioboni)라고 규정하고 하나님은 완전한 선이며,무한한 아름다움이며, 영원하고 초월적이며,불가변적이며, 지고의 실체적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 지고의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하였기에 피조된 세계는 전체적으로 선하다고 하였다.74) 그러나 무한하고,불가변적 인 하나님과는 다르게 피조물의 특성은 가변적이고,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피조물은 ‘변화’하며,그 사물이 지니는 전일성(integritas)를 상실할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의 결핍 즉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와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모 두 거부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다 선하며,하나님의 완벽하신 선하심와 아름다움을 나름대로 나타낼 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이란 없다.악은 그 자체가 실체가 아니며 실재하는 사물들의 결핍이라 할 수 있다. 이 결여 내지는 결핍이라는 개념은 한 사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보다 더 적거나, 본래 적합하도록 되어 있는 사물들이 아닌 다른 것에 맞추어졌을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악은 한 주체에 있는데,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고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 안에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75) 토마스 아퀴 나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이해에 동의하여 악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선 의 결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76)
71)레오 씨 데일리,「아우구스티누스 입문」,25.
72)최경석,“St.Augustine과 MartinLuther비교 연구 -은총론과 칭의론을 중심으로”,16.
73)김요한,“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자와 악의 문제”(석사학위 논문,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1999),13-14.
74)최경석,“St.Augustine과 MartinLuther비교 연구 -은총론과 칭의론을 중심으로”,18.
75)서병용,“Augustines의 「Denaturaboni」에 나타난 존재의 선성과 악의 문제”(석사학위 논문,서강대학교 대학원,199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