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논쟁(726~843)
1. 성상이란
성상(聖像, icon)이란 성스러운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지상에 현재화시키는 특별한 혹은 보조적 표현 수단을 의미한다(1). 성상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이콘(eikon)이라 불렀다. 얀 브레머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에 성상이란 말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되었던 에이돌론(eidolon), 아갈마(agalma), 그리고 에이콘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 중에서 에이콘을 선택하여 사용했다고 제시했다(2). 에이돌론(eidolon)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사람의 영혼이 그 사람의 형상, 혹은 사자(死者)의 망령으로 나타난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유령’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 표현인 성상을 표현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았다.(3) 아갈마(agalma)는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의 신상에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불경건해보인다는 이유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스어 사전에 따르면, eikon은 닮음, 상(像) 또는 초상을 의미하는데,(4) 브레머는 당시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살아있는 자신의 통치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像)을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제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像)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불경하지도 않으며, 살아계심을 표현하는데에 적합한 단어로 에이콘을 선택했다.
1) 이성덕, “성상(ikon)은 우상인가?”,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12집, 2007, 2.
2) Jan N. Bremmer, "Iconoclast, Iconoclastic, and Iconoclasm", 2.
3) (참고) 나무위키: 에이돌론
4) Henry George Liddell, Robert Scott, An Intermediate Greek-English Lexicon, Internet ver.
참조 :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text:1999.04.0058:entry%3Dei)kw/n,
Accessed : 2013. 4. 25
2. 성상논쟁이 있게된 역사적 배경
성상(聖像, icon)은 파괴주의(Iconoclasts)와 숭상주의(Iconophiles)로 분류할 수 있다. 교회에 발생한 성상 논쟁은 의외로 페르시아와 관련되어 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중동 지역의 패권이 되었지만, 그리스와 전쟁을 하면서 중동 지역에 머물게 되었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되었지만, 알렉산더 사후에 메소포다미아 동쪽 지역에 세력을 유지했다. 로마 제국이 헬레니즘 지역을 지배했고, 페르시아(사산 왕조 Sasanian Empire, AD 224-651)는 동쪽에서 세력을 세워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비잔티움(비잔틴 제국)은 7세기 초엽에 큰 위기를 맞이했다. 비잔틴 제국의 마우리키오스(Mauricius, 539-602)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포카스(Phocas, 547-610)를 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건 사산 왕조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우리키우스는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했고, 사산 왕조의 내분이 있는 사이에 아르메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런데 과도한 재정 유출로 긴축 재정을 진행하면서 사회에 불만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무능하고 잔인하기만 했던 포카스가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포카스는 마우리키우스와 비교할 수 없이 무능했다. 그의 집권 때에 608년에 칼케돈까지 진격, 611년 안디옥(안티오키아), 614년에는 예루살렘, 그리고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수백년간 긴장 관계를 유지했는데, 포카스 이후로 페르시아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변경되었다. 페르시아 황제인 호스로 2세는 알렉산더에게 패한 이후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제국의 운명을 수렁에서 구해낸 영웅은 포카스를 살해하고 황제가 된 이라클리우스(Heraclius, 헤라클리우스, 575-941)였다. 그는 오랜 비잔티움-페르시아 전쟁을 끝내고 전임 황제가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특히 페르시아군에게 빼앗긴 "성 십자가"를 되찾아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하는 장면은 7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영광스런 장면으로 꼽힌다. "성 십자가"는 사산 왕조 호스로 2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강탈해서 페르시아로 옮겼다. 성 십자가"는 4세기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해서 보관해 오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614년에 빼앗긴 "성 십자가"를 이라클리우스가 628년에 다시 찾아왔다. 이 사건을 기념해서 9월 14일을 "십자가 현양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사산 왕조는 626년에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페르시아는 주변 족속들과 연합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의 설계가 유효하게 되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 전쟁은 종교 전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세르기오스 1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며 군인과 시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봉헌하며 기도했다. 이럴 때 사산 왕조의 연합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들어오는 함대가 돌풍에 의해서 좌초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철수했고, 성 안에 시민들은 수도를 지켜준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 즉 마리아)를 찬양했다. 아카티스토스 찬미가, 마리아를 찬양하는 행사로 전환되었다.(1)
이로서 은밀하게 진행되어오던 성상에 대한 견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익두스(ἰχθύς, 물고기)는 잘 알려진 형상이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심미적인 본능이 종교로 표출되었다. 기독교에게 '이미지'는 십계명과 연관되어 결코 가볍지 않은 요소이다. 당시 대표적인 유물은 에데사의 만딜리온(μανδηλιον)천위에 새겨진 것)이었다. 만딜리온은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얼굴(聖顔)이 아마포 수건 위에 묻어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어로 ‘만딜리온(μανδηλιον, Mandylion)’이라 부르고, 동방 정교회에서는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étos, 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라 부른다.
사산 왕조가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무슬림에게 정복되었다. 무함마드 사후 지도자인 칼리파의 지도로 사산의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무슬림은 맹렬한 활동으로 비잔틴 제국을 침략했다. 무슬림의 손에 고대 교회의 총대주교좌인 예루살렘(637년), 안디옥(637년), 그리고 알렉산드리아(640년)가 모두 정복되었다. 펜타르키아(πενταρχία, pentarchia, 5두 체계)가 무너졌다. 이슬람의 발흥과 고대 기독교 도시의 함락은 기독교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이다. 기독교인은 문명인이고 이슬람인은 야만인이라는 구도였기에 더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은 형상에 대해서 배격하는 자세였다.
1) 장긍선, "성모찬가", <가톨릭신문> 2017.02.07. *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희랍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모두 24절로 구성돼 있다. 첫 12절은 복음에서 유아기의 내용을 노래한다. 나머지 12절은 강생의 신비와 마리아의 신적모성에 대한 관상이다. 그 다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마리아께 집중해, 13절부터 24절까지는 마리아의 동정, 잉태, 신적 모성, 동정 출산, 동정녀들의 동정녀, 크리스찬 제국의 수호자이신 마리아를 노래한다."
3. 성상 논쟁
성상논쟁은 8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시작되어 9세기까지 지속된 신학적, 정치적, 예술적 갈등이다. 성상의 사용을 둘러싸고 황제와 교회, 신학자들 간의 대립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논쟁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 개입과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rd, 680, 681)에서는 단성론(하나의 성질), 단의론(하나의 의지)에 대한 주장을 이단으로 확정하며, 한 인격에 두 본성(451년 칼게돈 결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동방 교회에서는 6차 공의회를 자체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691년과 692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한 퀴니섹스트(Qinisext) 공의회, 트룰로(Trullo) 공의회를 준용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황제 유스티아누스 2세가 주도했는데, 동방 교회가 인정하고 서방 교회는 인정하지 않아 갈등의 분기점이 되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102개의 교령(Canon)을 채택했다. 내용은 성직자 윤리 규범(혼인 문제 - 독신 문제와 재혼 금지 - 세속적 사치, 경제 활동, 이자 금지 등, 복장 규범 확립), 성사 전례 규정(유대교적 영향력 배제. 교령 11조. 사제는 유대인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며, 유대인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갈 수 없다), 교회 행정 및 재산권 문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상논쟁의 촉발은 726년, 황제 레오 3세(717-741)는 성상이 우상숭배를 조장한다고 판단하고 제국 내 성상 제거를 명령했다. 7세기에 성상 반대 운동이 일어난 동부 소아시아 지역에서 교회들이 성장한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레오 3세가 황제가 되기 전 서부 소아시아 총독으로 일할 때 경험도 영향이 있었다. 그가 지역을 통치할 때에 일어난 지진 참사와 그리고 전쟁 패배 그리고 우상 숭배를 금지한 구약 율법(모세 십계명)과 우상 숭배를 금지한 이슬람의 발흥 등이 복합적으로 레오 3세를 자극했을 것이라고 교회사가들은 분석한다. 이 칙령은 제국의 소아시아와 일부 성직자, 지식인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고대 헬라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는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유럽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다.
730년 레오 3세는 성상을 옹호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게르마누스를 폐위하고 성상파괴 정책을 강화했다. 성상파괴자들은 성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왜곡할 위험이 있으며,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1) 반면 성상주의자들은 성상이 숭배(latria: 숭배)가 아닌 공경의 대상(dulia)이며,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반박했다.(2)
그런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690-741)는 성상주의를 지향했다. 오히려 성상파괴주의자들을 정죄하며, 교황권을 강화시켰다. 그레고리우스 3세의 역할로 서방 교회에 성상주의가 강화되었다. 그레고리우스 3세는 731년 시노드(Synod)를 개최해서 성상파괴주의자들을 정죄했다.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함대를 파견해서 통제하려고 했는데, 함대가 아드리아 해에서 난파되면서 실패했다.
동방의 성상주의와 서방의 성상주의는 같은 성상주의였지만 차이가 있었다. 서방은 교육적, 예술적 가치와 성인숭배에 대한 방향이었고, 동방은 신성한 힘에 대한 지향성으로 기도와 교통(communion)의 도구였다. 서방은 교황이 주도하며 교회의 권위를 주장했고, 동방은 황제가 주도하며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754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는 히에리아 공의회(Council of Hieria)를 소집하여 성상주의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상이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예배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인격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뿐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성상주의자인 다마스쿠스의 요한을 강하게 비판하며 그 사상을 저주하는 내용을 공의회 결의문에 삽입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파괴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고, 성상주의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 449년 에베소 공의회가 도적회의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규정이 무효가 되었다.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의 결정도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 효력을 거부하며 무효가 되었다. 449년 에베소 공의회는 도적회의로 잘 알려진 반면,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의 결정이 무효가 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성상주의자들은 성화나 성상이 예수의 인격만 묘사하는 것으로 제작되었다면 이것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했고, 성상거부자들은 성상주의가 단성론자들의 주장이라고 상호 배격의 위치에 섰다. 신성을 어떻게 성화나 성상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느냐, 그것이 성상에 관련된 기독론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신성이 아닌 교육과 성인숭배로 연결해서 진행했다.
775년에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망 후 그의 아들 레오 4세가 성상파괴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780년, 콘스탄티누스 5세의 손자 콘스탄티누스 6세(780797)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은 이레네 황후는 성상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772795)와 협력하여 성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787년, 동서방 교회의 주교들이 모인 제2차 니케아 공의회(7차 세계 공의회, 300여명의 주교 참석)를 개최했다.
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상파괴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성상을 공경하는 것으로 다시 결정했다. 성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실체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의회에서는 성상을 '하늘로 들어가는 창문'이자 '문맹자들을 위한 책'으로 규정했다. 성상에 대한 적절한 공경은 신앙적으로 정당하다고 결정했다. 또한 "성화상을 우상이라 부르는 자들을 저주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성상주의는 공식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었고, 성상파괴주의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787년 9월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저주문
1. 우리 주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복음적인 장면들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3. 우리 주님과 성인들을 대표하는 것에 예를 표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4. 기록된 것이나 기록되지 않은 것이나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김성수, "성상파괴론의 등장", https://fluorf.net/lectures/lectures2_6.htm
레오 3세가 성상파괴정책을 실행한 726년 이후 약 60년의 세월이 지난 뒤 성상파괴 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813년, 황제 레오 5세(813820)가 즉위하면서 다시 성상 논쟁이 등장했다. 그가 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히에리아 공의회의 성상파괴 결정을 정통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후계자인 미하일 2세(Michael II. 770-829)와 테오필로스(813-재위829~842: 성상파괴주의 마지막 황제)도 성상파괴 정책을 유지하며 성상옹호론자들을 탄압했다.
842년,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부인 테오도라 황후가 어린 아들 미하일 3세(Michael III, 840-867)의 섭정을 맡았다. 테오도라 황후는 성상주의를 지지했고, 843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토디우스(Methodios, 790-재위 843-847)와 협력하여 성상 공경을 합법적으로 승인했다. 843년 3월 11일, 성상 공경이 정식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정통 신앙의 승리(Orthodoxy Sunday)’가 선포되었으며, 이를 통해 117년간 지속된 성상파괴 논쟁이 종결되었다.
1) [참고] 레오3세가 성상을 거부한 것은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동쪽의 단성론자, 바울파, 그리고 유대교와 이슬람교까지 성상에 대해서 거부 의식을 표현했다. 그래서 유대교와 무슬림이 성상이 있는 교회에 개종하는 것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성상을 철폐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2) [참고]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성인숭배(dulia)와 예배(latria)를 구별하여, 형상물에게 표하는 존경을 dulia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구별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죽은 자들과 천사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한 교묘한 계략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교황주의자들은 예배(latria)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추호도 상처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고 변명한다고 칼빈은 명확하게 성상에 대해서 거부했다(Inst., I.12.2).

제7차 세계 공의회로 공인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모습을 그린 성화
4. 성상논쟁은 끝났는가?
성상논쟁은 종결되었지만 종결되지 않았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의지를 꺽지 않고 교회 안에서 밖에서 믿음의 내용을 유지했다. 우리는 성상거부주의에 속한다. 성상거부주의 대표 위인은 존 칼빈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대부인 마틴 루터는 성상에 대해서 아디아포라를 선언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성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성상을 거부한 또 한 세력은 재세례파이다.
권현익은 바울바 - 왈도파 그리고 칼빈에서 장로파의 기원이 있다고 제언했다. 사뮤엘 밀러는 왈도파 그리고 칼빈에서 장로파의 기원이 있다고 제언했다. 송다니엘은 마틴 루터 그리고 칼빈에서 개혁파(장로파)의 기원이 있다고 제언했다. 모든 이의 공통점에는 왈도파가 있다. 왈데시안에 피터 왈도가 들어가면서 왈도파가 대표가 되었다. 그런데 안식교에서도 왈데시안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안식일 준수의 역사적 흔적이 왈데시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완전한 모범을 갖을 수 없고, 현재에서도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없다. 우리에게 완전은 계시된 말씀, 계시의존사색.. 더욱 더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는 경건과 지식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21세기 영상 미디어 시대에 성상은 전혀 다른 문제로 우리 눈 앞에 그리고 생활에 있다. 움직이는 그림에서 이제는 입체 영상까지 구현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미디어, 이미지에 대한 이해는 매우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람서원 고경태
참고 사이트
1) https://fluorf.net/lectures/lectures2_6.htm
fluorF's Laboratory: 동서교회 대분열 - 6. 성상파괴론의 등장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 6. Iconoclasm)
종교 2-6 Religion 2-6 동서교회 대분열 6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6 성상파괴론의 등장 Iconoclasm 목차 성화상의 등장 제1차 성상파괴운동의 진행 제1차 성상파괴운동의 종료 제2차 성상파괴운동의 진행 제2차 성상파괴운동의 종료 성상파괴논쟁의 결과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성화상의 등장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 초엽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전임 황제인 마우리키오스(Μαυρίκιος)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포카스(Φωκάς)는 제위 찬탈을...
fluorf.net
2) https://knowingandliving.tistory.com/9
성화상논쟁과 개혁주의: 본질과 아디아포라의 문제와 관련하여
I. 들어가는 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두가 인정 가능한 규준이 없는 포스트모던에서는 이러한 잣대를 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기준 아래에서 통일적인 가치를 좇는 공동체라면 그 기준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현 시대는 그렇지 않다. 또한 그렇다 할지라도 해석적 차이라는 이름 앞에서 판단의 갈피를 잃어버리고 말게 된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실 많은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양한 가치체계 아래에서 다양하게 발...
knowingandliving.tistory.com
3) https://m.pckworld.com/article.php?aid=8232125650
성상파괴주의 vs 성상옹호주의
성상파괴 논쟁 그리스도교 신앙과 예배에서 성화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과 논쟁이 있어…
m.pckworld.com
4) 신규민, "성상논쟁에 대한 연구 : 13세기 이전 동·서방교회를 중심으로",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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