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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이젠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하자.

형람서원 2025. 2. 13.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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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이젠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하자.

청교도(淸敎徒, Puritans)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랑은 상당하다. 그 이유는 청교도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청교도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모습은 '추수감사주일'이다(11월 셋째 주일, 미국은 넷째주 목요일). 옛날 추수감사주일 설교에는 청교도들의 고난에서 정착된 이야기를 설교한 목사들이 많이 있었다. 1621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청교도들의 꿈(언덕 위의 도시)을 장로교의 꿈처럼 설명하기도 했다. 메이플라워호에 장로교 신자가 없었다. 메이플라워호에는 있던 분파는 분리파청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형성된 청교도의 한 분파로 보다 더 과격한 행동 양식을 가졌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자기들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들의 길은 제임스 1세(1566-(1603년 잉글랜드 국왕)1625)의 식민지 정책과 연결되어 길이 형성되었다. 1607년에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는 식민지 마을을 형성했다.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선구자들은 청교도가 아니다. 그런데 미국의 조상은 제임스타운의 건설자가 아니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들어온 청교도들, "필그림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한다.

우리는 청교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청교도에 대한 맹목적인 존중이 아닌 자기 위치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청교도에 대한 사랑은 로이드 존즈 목사(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영향이 가장 현실적이다. 로이드 존즈 박사의 글은 개혁사상을 추구하는 사역자들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복음주의적 지성에는 존 스토트 목사(John R. W. Stott, 1921~2011)가 영향을 주었다. 존 스토트는 영혼멸절설 등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 있었음에도 영향력이 감소되지 않았다. 로이드 존즈 박사와 존 스토트 목사는 로잔 언약에서 의견이 갈린 것도 잘 인지해야 한다. 존 스토트는 빌리그래함과 연합하며 로이드 존즈와 연합 사역을 이루지 않았다. 최근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의 목사 도널드 매클라우드(Donald Macleod, 1940 - 2023)가 별세했다. 로이드 존즈, 존 스토트, 도널드 매클라우드는 각각 다른 교파의 사역자들이다.

 

첫째, 필그림과 퓨리턴을 구분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마이애미 대학 역사학 교수 마이클 카라필로(Michael Carrafiello)는 필그림과 퓨리턴에 차이가 있음을 제언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탄 부류를 필그림으로 보았고, 1620년 이후에 잉글랜드에서 들어온 부류를 퓨리턴으로 제언했다. 카라필로는 Pilgrim과 Puritan의 또 다른 주요 차이는 원주민에 대한 태도에서, Pilgrim은 원주민을 존중한 반면에 Puritan은 구원대상으로 여겼다고 했다. 즉 뉴잉글랜드에 들어온 잉글랜드 퓨리턴에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페리 밀러(Perry Gilbert Eddy Miller, 1905 – 1963)는 미국 교회가 청교도주의와 칼빈 사상을 연속적으로 보려는 성향을 거부하는 밀러 테제(Miller Thesis)를 제안했다.

 

둘째, 잉글랜드 퓨리턴(청교도)에게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 의복 논쟁(the Vestarian Controversy, 혹은 vestments controversy, 1564년)이 발생했다. 그리고 1600년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정점으로 좀 더 선명한 잉글랜드 개혁 운동이 발생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적 청교도이고, 윌리엄 퍼킨스는 회중주의적 청교도이다. 잉글랜드 장로주의는 칼빈보다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의 영향을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회중주의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이 잉글랜드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1562년 오를레앙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프랑스 개혁파 교회는 회중주의를 주장하는 모렐리(Jean Morely, 1524-1594)를 파문했다. 잉글랜드 장로파는 1948년까지 다수를 차지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에라스투주의(Erastism)가 경계 사상 중 하나였다. 1643년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에라스투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역자들이 발언했다. 존 라이트 푸트(John Lightfoot: 1602-1675), 존 셀던(John Selden: 1584-1654), 존 핌(John Pym: 1584-1643) 등을 에라스투주의로 배현주는 구분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같은 내용이 아닌 두 왕국에서 발생한 다른 형태의 종교개혁이다. 청교도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발생한 것으로 국교회주의를 거부한 종교개혁운동이다. 마지막으로 국교회주의를 거부하고 이탈한 종파는 감리파(Methodist)이다. 웨슬리(John Wesley)는 1791년에 별세했고, 1797년에 감리파새연회(Mothodist New Connection)이 조직되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헨리8세의 수장령에서 형성되었고, 좀 더 엄격하게 종교개혁을 하려는 진영과 좀 더 개인화시키려는 운동 등 다양한 분파(퀘이커주의)가 발생했다. 청교도는 분리파(separating puritans)와 비분리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분리파 청교도는 "Nonconformists"(국교회거부자), "Separatists"(분리파)로 불리며,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분파이다. ‘비분리파 청교도’(비분리주의자 청교도, Conformist Puritans)는 국교회주의를 좀 더 체계적으로 개혁하려는 분파이다. 1948년 분리파 청교도인 독립파의 윌리엄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비분리파 청교도(장로파) 의원들을 3/4을 축출시키고, 독립파 청교도 1/4로 의회를 조직해서 왕을 처형하고 새로운 시대 commenwealth를 열었다. 크롬웰이 공화제를 수립했다고 하는데, republic이 아닌 commenwealth시대이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왕이 없는 사회가 11년 동안 존재했다. 그리고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면서 왕이 없는 사회를 구현시켰다. 왕이 없는 사회는 분리파 청교도들의 이상적 공동체의 한 모습이었다.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에 대한 개념은 단순하지 않다. 미국의 회중파에서도 옛빛파와 새빛파가 있었고, 장로파에는 구학파와 신학파가 있었다. 한국 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는 회중파가 아닌 장로파 선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신학파적 성향으로 회중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 사역자들은 회중파 사역자인 디엘무디, 조지 뮬러 등을 이상적인 사역자의 모습으로 소개했다.

 

회중주의와 장로파를 잘 어우리면서, 회중주의인 침례파와는 상당히 다른 교리 체계로 이해하고 있다. 미국에서 침례파는 일반파와 특수파로 나뉘어있다. 우리나라 침례파에서는 두 성향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미국 침례파에서는 세대주의적 침례파와 특수파 침례파가 상당하다. 세대주의 침례파는 회중주의적 견해와 잘 부합된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대해서 집착하는 안식교도 회중파의 부당한 아류로 볼 수 있다.

 

셋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크롬웰의 정복전쟁에 의해서 상당부분 희석되었고, 1707년 잉글랜드와 연합해서 한 국가를 형성하면서 구분된 이해보다 유사한 이해 체계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두 왕국으로 엄격한 차이가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와 분리독립을 하려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2014년에 독립투표를 진행되었고 55%가 잔류를 희망해서 부결되었다. 2022년에 잉글랜드 EU를 탈퇴할 때에 스코틀랜드는 62%가 EU 잔류에 찬성했다. 그래서 다시 독립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국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류의 종교개혁으로 분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토마스 보스턴 (Thomas Boston, 1676-1732)을 중심으로 한 매로우 논쟁까지는 유효했지만(매로우파), 결국 1732년 분리교회(에벤에셀 얼스킨), 1843년 자유교회로 분리되면서(토마스 찰머스) 종교개혁의 가치 유지에서 분리된 현상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 총회와 자유교회로 구분되는데,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1560년 종교개혁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집단이다.

미국으로 이주해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장로파는 프린스턴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자유주의를 허용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사역자 메이천 박사를 중심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해서 선명한 개혁파 신학(구학파적 장로파)을 세웠다. 그리고 다양한 장로파 분파들이 교단을 형성했다. 1974년 미국 장로파에서 PCA를 설립해서 분리한 것이 최근 선명한 장로파 교단의 움직임이다. PCA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존중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을 교단의 신앙 표준으로 채택하며, 여성안수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한국 장로교에서 박형룡 박사가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했다고 하는데, 박 박사는 정통주의 장로파를 제언했다. 박형룡 박사가 침례파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청교주의적 종말론인 역사적 전천년기를 신학에 채택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서는 장로파 신학을 추구한다고 했다. 다만 박 박사가 장로파 신학이 아닌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장로파 신학에 소개한 것은 한국 장로파가 개혁파 신학을 모범적으로 생각하게 한 계기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한국 장로파 신학은 청교도신학, 개혁파신학으로 두 메인을 이루면서, 장로파 신학의 정체성을 잘 세워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청교도주의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개혁파 신학으로 장로파 교회를 세우려는 현상도 발생한다. 엄격한 장로파 신학을 위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며,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년)도 합당하게 이해하는 신학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청교도주의(회중주의), 잉글랜드 장로파,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신학의 차이를 잘 구분해서 선명한 신학 기초 위헤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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