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탐구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김 차 규

형람서원 2025. 1. 22.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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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 김 차 규

 

I. 머리말

II. 754년 이전의 종교정책

III. 754년 종교회의와 박해

IV. 맺은말

 

I. 머리말

 

718년에 태어난 콘스탄티누스 5세는 2살 때 아버지 레오 3세(717-741년)의 협력자가 되었으며, 훗날 수많은 군사원정 중에 실질적으로 아버지를 보좌했다. 그는 외적으로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내적으로는 레오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상파괴 정책에 대해 인내와 잔인함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주면서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성상애호가 연대기 작가들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들 중 특히 테오파네스는 여러 면에서 이 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역사는 콘스탄티누스 5세가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전혀 부인하지 않으면서, 콘스탄티누스 5세는 34년(741-775년)동안 통치하였으며, 수많은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의 신학적인 사상을 확인하는 종교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그리고 성상숭배를 반대하는 종교정책을 펼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사료적인 측면에서 볼 때 테오파네스나 니케포로스의 저서들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연구사적인 면에서 볼 때 콘스탄티누스 5세에 관한 연구는 레오 3세에 비해 많지 않으며 최근의 연구도 별로 없다.1) 지금까지의 연구도 정치사적인 면과 종교사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정치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종교정책을 정치와는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려고 하였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가 베리와 루이 브레이에이다.2) 또한 종교사가들은 황제가 신학자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종교정책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는 앙드레 그라바르와 제르베 뒤메즈이다.3) 그외 오스트로고르스키와 유디드 헤린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을 초기에는 아르타바스도스(Artavasdos)와 후기에는 교황과 롬바르드족 그리고 프랑크왕국과 연계시키고 있다.4)

그런데 이들의 관점은 각자의 측면을 너무 고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볼 때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은 첫째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둘째 아르타바스도스와 교황,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뿐만 아니라 슬라브족 그리고 특히 불가리아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콘스탄티누스 5세와 성상파괴 논쟁을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II. 754년 이전의 종교정책

 

콘스탄티누스 5세는 740년 6월 레오 3세가 사망하자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떤 특별한 이유없이 성상숭배자들의 측면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잔인한 자로 평가되어졌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정력적인 군대의 수장일 뿐 아니라 능숙한 행정가였다. 외적으로 그는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내적으로 그는 끈기와 잔인함으로 레오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상파괴 정책을 강화시켜 나갔다.5) 사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은 제국의 안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제국의 안전을 위협한 첫 번째 사건이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이었다.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은 레오 3세에게 충성을 받쳤던 콘스탄티누스 5세의 매제이자 아르메니아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였던 아르타바스도스가 콘스탄티누스 5세가 권력에 도달하자말자 옵시키온(Opsikion) 테마 특히 유럽테마들의 군대를 동원해서 일으켰던 반란이었다. 그런데 이들 테마지역은 성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파괴주의 독트린의 중심지인 소아시아의 대부분의 테마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6)

이 시민전쟁은 옵시키온(Opsikion) 테마에 대한 아랍인들의 공격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때인 741년 6월에 일어났다.7) 741년 7월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소환에 굴복하기보다는 파트리키우스(Patricius)인 베제르(Beser)의 명령하에 있었던 제국군대에 대항하여 베제르를 죽였다. 이에 놀란 황제는 아모리움(Amorium)으로 그 다음에는 그를 지지하는 오리엔트(Orient) 테마로 도주했다. 이에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그의 승리를 알렸고 콘스탄티노플을 책임지고 있었던 행정관(magister)인 테오파네스 모노테스(Theophanes Monotes)는 도시민들을 성 소피아 성당에 모으고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망하였으며 아시아의 모든 테마가 아르타바스도스를 황제로 승인했다고 알렸다. 곧이어 아르타바스도스를 "정교황제 및 신의 독트린의 참피온"으로 선언하였다.8) 얼마 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아르타바스도스는 도처에 성상을 세웠다. 이어 그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아나스타시오스(Anastasios) 총대주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이 당시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누스 5세가 파렴치하게도 크리스트의 신성을 부정하는 가증스러운 이교도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 아르타바스도스와 성상숭배를 지지하였다고 주장한다.9) 그런데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가 레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성상파괴에 대한 글을 썼다는 기록으로10) 볼 때 테오파네스의 기록이 옳다면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성상파괴에 대한 그의 신념을 바꾼 것이다.

741-742년 겨울 콘스탄티누스 5세는 보스포로스 해협의 맞은 편 쪽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에서 시위행동을 벌인 후 아모리움에서 숙영했다. 한편 아르타바스도스는 그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그의 첫째 아들 니케포로스(Nicephoros)를 공치제로 세우고 그의 둘째 아들 니케타스(Nicetas)를 아르메니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starategos)로 삼아 콘스탄티누스 5세의 군대를 전복시킬 임무를 맡겼다. 742년 5월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누스 5세를 지지하는 아나톨리아 테마를 제거하기 위해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르타바스도스를 추적하여 카이스트로스(Kaystros) 평야에 있는 사르데스(Sardes) 근처에 이르러 아르타바스도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당시 아르타바스도스는 키지코스(Kyzikos)로 도주하였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5세는 비티니아에서 아르타바스도스의 군대를 격파한 후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을 건너 742년 8월-9월에 육지쪽 성벽쪽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11) 742년 11월 2일 콘스탄티누스 5세는 수도로 입성하였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처벌은 강경했다.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두 아들 니케포로스(Nicephoros)와 니케타스(Nicetas)는 대중 앞에서 두 눈이 뽑혔다.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오스(Anastasios)는 참칭황제인 아르타바스도스에게 지지를 보냄과 동시에 아르타바스도스를 황제로 선포했고 또한 마리아의 처녀 잉태에 대해 콘스탄티누스가 반박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태형의 벌을 받은 다음 당나귀 등에 거꾸로 매달린 채 대경기장(Hippodromos)의 대중 앞에 추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오스(Anastasios)는 총대주교의 자리를 상실하지는 않았다.12) 이때부터 그는 황제의 총신이 되었다.

이 반란과 관련해 오스트로고르스키는 그의 저서 ≪비잔틴사≫에서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은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13) 그러나 730년부터 752-53년까지 성상파괴주의자들의 어떤 활동이나 논쟁이 없었던 점으로14) 보아 아르타바스도스 사건은 성상파괴와 관련된 성격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종교적인 성격보다는 반란에 대한 콘스탄티누스 5세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처벌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은 테마제도와 관련된 제국 내부의 재조직을 가져왔다.15) 콘스탄티누스 5세는 테마제도 체제의 단위 부대로 군대를 개편하고 이 군대를 황궁에 충성하는 사려깊은 장군들에게 맡겼다.16) 746년에는 시리아를 침공, 가문의 탄생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를 점령하고 단성론자 시리아인들과 파울로스파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17) 또한 그는 페스트가 콘스탄티노플을 휩쓴(746-747년) 후 전통적으로 성상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었던 그리스인들과 도서민들의 수부(首府)를 찾았다.18) 그 후 다시 시리아 원정을 떠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랍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도록 만들었다.19) 이 바그다드에서 옴메야드(Omeyades) 왕조를 계승한 압바스(Abbasside) 왕조가 탄생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 아랍인들의 영토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벌렸다. 747년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출발한 아랍의 한 함대가 키프로스(Kypros)의 해역에서 파괴되었다.20) 그리고 752년에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이 모두 성공적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 군대는 테오도시오폴리스(Theodosiopolis)와 멜리테네(Melitene)를 점령하였고 포로들은 불가리아와의 국경선쪽 트라키아로 이주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제국 영토를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제르베 뒤메즈는 콘스탄티누스 5세가 이 지역에 대해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당시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쪽 국경선은 더욱 안전해졌다고 밝히고 있다.21)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 지역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었고 당시의 불가리아 문제도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756년부터 불가리아는 국경선을 종종 침략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많은 수의 슬라브인과 권력을 장악한 초기 불가리아 귀족간에 불화가 항상 존재했다. 급진주의자 볼리아드(Boliad)파가 동로마 제국에 대해 공격적인 인물인 텔레츠(Teletz)와 함께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에 수많은 슬라브인들이 동로마로 이주하게 되고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들을 비티니아(Bithynia)에 정착시키게 되었다. 이는 소아시아 테마에서 슬라브족 요소가 성장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는 더욱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결국 762/3년 안키알로스(Anchialos)에서 중요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불굴의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계속 괴롭혔고 이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773년까지 9차례에 걸쳐 불가리아를 원정했다.22)

한편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당시 콘스탄티누스 5세는 교황청에 대해 레오 3세가 보여주었던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테파누스 2세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은 동로마 제국에 대해 계속해서 충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는 변화되었다. 당시 황제와 교황들간 외교적인 관계 속에는 성상에 대한 문제가 더 이상 없었다. 종교적인 문제는 부수적인 문제로 전락하였다. 사실 외교적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롬바르드족 문제였다.

그레고리우스 3세는 741년 12월 10일 사망했다. 그의 계승자 자카리아스는 교회의식을 따라야 한다는 종교회의의 서한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게다가 자카리아스의 특사들은 아르타바스도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던 순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당시 아르타바스도스를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던 자카리아스의 특사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전달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5세가 권력을 회복하기를 기다렸다.23) 자카리아스의 모든 서한은 743년 4월까지 콘스탄티누스 5세의 통치 날짜로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게르마니아의 사도인(게르마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에게 보낸 2개의 서한은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아들 니케포로스의 통치시기 744년 7월로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아르타바스도스와 니케포로스는 742년 11월에 권력을 상실하였다.24)

외교적·정치적 계획 위에서 자카리아스와 콘스탄티누스 5세의 관계는 성의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교황 자카리아스는 리우트프란트(Liutprand)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개입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로마 제국과 롬바르드족간의 중요한 중개인이 되었다. 그는 토스카나(Toscana)지방의 도시들을 복구시키는 문제와 741년 20년간의 휴전에 사인하는 문제를 혼자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휴전으로 말미암아 리우트프란트는 라벤나를 공략하려는 그의 생각을 철회했다.25) 다른 한편으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자카리아스가 몇가지 요구와 함께 제국의 라티움(Latium)에 있는 부유한 영지인 님페아(Nymphaea)와 노르미아(Normia)를 교회에 헌정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26) 아마 이것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콘스탄티누스 5세는 시칠리아(Sicilia)와 칼라브리아(Calabria)의 파트리모니움(patrimonium)을 몰수한 것에 대해 보상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제국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황청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더 많은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 5세는 불가리아 문제로 더 많은 군사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의 편지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교황은 더 많은 군사적인 도움이 올 때까지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27)

그러나 749년 아스톨프(Astolf)가 롬바르드족의 왕으로 즉위한 것과 751년에 롬바르드족에 의한 라벤나의 함락 그리고 752년 3월 자카리아스가 사망할 즈음에 있었던 롬바르드족의 로마 침략은 당시의 상황을 변화시켰다. 즉 롬바르드족 문제에 대한 프랑크족의 개입으로 교황청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28)

당시 종교적인 역할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던 신학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는 황제들이 제국의 화합내지 통일성과 정교에 대한 황제의 개인적인 확신과 동일하거나 혹은 매우 유사한 확신을 제국에 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의 선임자 황제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 아나스타시오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보다 휠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의 군대와 성직자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754년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아스톨프 왕이 이끄는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있는 동로마 제국 영토를 조금씩 빼앗았다.29) 로마 또한 롬바르드족의 손아귀에 떨어질 위험에 처했다. 752년 3월에 교황에 취임한 자카리아스의 계승자인 스테파누스(Stephanus) 2세는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훌륭한 장군을 보내주도록 간청했다.30)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는 스테파누스 2세의 간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롬바르드족보다는 성상숭배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31) 이에 교황은 프랑크족의 왕인 페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32)

 

III. 754년 종교회의와 박해

 

754년33)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가 사망한 후34) 그의 제국에 살고있는 주교들을 소집하여 히에리아(Hieria) 황궁에서 대(大)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35) 그런데 이 종교회의의 회기가 몇 번 있었는지, 토론의 양식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일들을 어떻게 추진시켜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성상숭배자인 예루살렘의 요한은 히에리아 종교회의를 불법적인 종교회의로 또한 ≪우두머리가 없는(akephalos)≫ 종교회의로 규정하고 있다.36) 당시 선임 황제인 티베리우스 3세 황제의 아들인 에페소스의 테오도시우스가 회장 자격으로 이 종교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팜필리아(Pamphylia)의 시시니오스(Sisinios de Pergè)와 피시디아(Pisidia)의 바질(Basile d'Antioche)이 부회장으로 보조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황과 총대주교들은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도 공석이었다.

이 종교회의 기록 서문에는 "제7차 공회의"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37) 이 종교회의의 토의는 6개월38) 동안 이어졌다. 니케포로스에 따르면 이 긴 기간은 황제와 주교들간에 나타난 상반되는 의견으로 설명되어진다. 주교들은 성상숭배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황제의 의견을 따랐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부터 개최되었던 6개의 공회의에 의해 결정된 도그마를 문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였다. 크리스트의 신성과 인성과 성모 마리아, 성인, 성유골에 관한 황제의 독트린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없이 철회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도그마들은 토의의 목적이 되었다.

연대기들과 니케포로스의 저서 속에 산재한 몇몇 증거를 제외하고 이 종교회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787년 니케아 제2 공회의의 기록에 포함된 754년 종교회의의 마지막 결정사항이다.39) 이 결정사항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저서 속에 대부분 나타나고 있다.

754년 종교회의는 모든 신성모독, 대건축물들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 혹은 종교와 관련된 물건(가구나 집기) 그리고 성상으로 장식된 예배에 사용하는 물건들의 사용을 모두 금지시켰다. 그리고 교회는 황제나 총대주교의 허락없이는 어떠한 변화도 시도하지 못했다. 또한 관리들로 하여금 교회에 누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754년 8월부터 종교회의의 회기는 성 마리아 성당(l'église Sainte-Marie des Blachernes)에서 열렸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결국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실레이온(Sylaeion) 수도원의 수도사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뽑았다.40) 8월 27일 총대주교와 함께 포룸(Forum)에 나타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종교회의의 법령을 민중들에게 읽어나갔다. 이어 총대주교 게르마노스(Germanos), 키프로스의 게오르고스(Georgos) 그리고 요한 다마스케네스(Damascenes)를 비롯한 성상숭배자들에게 파문선고가 내려졌다.41)

결국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들을 이교도로 취급했다. 얼마 후에 종교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제국의 칙령이 성상숭배자들을 따르는 자들을 반역자로 취급했다.42) 754년 종교회의 이후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들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공공여론을 조성해 오면서도 불가리아인들과 슬라브족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43)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들 중에 주요인물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수도원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소(少)스테파누스(Stephanus)를 설득하는 작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44) 주요인물들은 유배를 갔다.

한편 754년 1월 6일 폰티온(Ponthion)의 황궁에서 페핀은 교황에게 교황청국가(respublica)의 설립을 약속하면서 스테파누스 교황에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라벤나 관구와 교황청국가의 권리와 소유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45) 의심할 여지없이 "respublica"라는 용어는 그 당시의 언어로 볼 때 로마제국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페핀은 이 용어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교황과 연계시키고 있다. 그후 페핀은 754년 7월 28일 성(聖) 드니 성당에서 왕으로 즉위한 후에 ≪로마인들의 보호자≫라는 별난 칭호를 교황으로부터 받았다.46).

755년 페핀은 과거에 동로마 제국에 속했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정복하여 교황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황국가는 롬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에 대해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약한 국가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롬바르드족도 756년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페핀이 요구했던 영토반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4년 종교회의 이후 성상숭배자들의 보호자인 교황에 대한 혐오만큼 라벤나 관구에 대한 로마의 교황청의 병합에 대한 원한으로 점차 성상파괴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5세는 과거의 적인 롬바르드족과 동맹관계를 맺게되었다.

756년 12월에 아스톨프가 죽고 디디에(Didier)가 757년 3월에 별 어려움없이 정권을 장악했다. 757년 4월 26일 디디에(Didier)가 왕으로 즉위한 뒤 스테파누스 2세 교황이 사망하고 곧이어 파울로스가 교황으로 뽑혔다. 그는 페핀왕에게 스테파누스 2세가 사망했다는 것과 그 자신이 교황으로 뽑혔다는 것을 알리면서 선임자의 약속을 지킬 것을 알렸다.47) 얼마 후 757년 5월 29일 파울로스는 프랑크 왕국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교황으로 즉위했다. 몇 주 후 프랑크족으로부터 몇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 편지 중 하나는 로마의 귀족들과 로마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이들에게 새로운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로마와 프랑크왕간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파울로스 교황은 757년 말에 태어난 기젤르(Gisèle) 공주의 대부가 되었다.48)

이러한 상황은 결국 콘스탄티누스 5세로 하여금 성상파괴 정책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762년49) 안키알로스(Anchialos) 전투에서 불가리아인들을 격파한50) 콘스탄티누스 5세는 제국이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조금 안정되었다는 판단 하에 성상숭배자들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더욱 강하게 취하면서 성상파괴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인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773년까지 불가리아 원정을 계속하였다.51)

그런데 성상과 종교적인 장식들의 파괴와 관련된 754년 종교회의의 칙령의 적용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의 활동은 주로 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수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총독이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 의해 다양한 모양과 강도로 나타났던 것이다.52) 특히 미카엘 라카노드라콘(Michael Lachanodrakon) 총독이 있는 트라케시온(Thrakesion)테마에서 성상파괴주의자들의 활동은 활발했다.53)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수도승들에 대해 특별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760년 이후 많은 수의 수도승들이 유배를 가고 감옥에 가고 팔·다리가 잘리는 처벌을 받았다.54) 그리고 서방으로 피신한 자도 있었다.55) 유디드 헤린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성상숭배자들이 저술한 원사료들은 성상파괴 행위가 이루어졌던 지역과 희생자들의 수를 과장하고 있다. 또한 서방으로 피신하였던 자들의 많은 수가 성상파괴주의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근동에서의 아랍인들의 출몰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수도승들이 성상숭배자들은 아니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 수도승들이 성상파괴자로 바뀐다는 조건하에서 수도원에 대한 재정도 지원했다.56)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5세의 수도원에 대한 박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도 있다. 즉 수도원이 광대한 토지를 흡수하고 면세권을 향유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을 제압한다는 것은 국가정책에 대한 수도원의 개입을 방어함과 동시에 수도원의 수많은 재산을 차지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당시 불가리아와의 전쟁은 많은 부를 요구했다.57)

그리고 당시에는 속인들 또한 처벌을 받았다. 왜냐하면 성상을 숭배한다는 것이 정치적인 저항으로 보였기 때문이다.58) 성상숭배자에 대한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총대주교의 운명처럼 때때로 정치적인 의미를 띠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들에 의해 ≪박해자, 유대인, 모슬렘교도, 파울로스파, 이교도, 마법사, 야만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59)

756에서 769년까지 동로마제국, 교황청, 프랑크족 그리고 롬바르드족간 의 외교관계는 치열했다. 당시 페핀은 3명의 특사를 영접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 5세는 페핀으로 하여금 성상숭배를 처벌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767년 쟝띠이(Gentilly)에서 성상파괴주의적인 성향을 띤 종교회의가 열렸다.60)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의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769년 스테파누스 3세 교황은 종교회의를 열어 성상숭배의 합법성을 선포하였다.61)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선거를 비준할 수 없게 되었다.

 

IV. 맺은말

 

필자는 위에서 성상파괴논쟁과 관련된 콘스탄티누스 5세의 종교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은 당시의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의 즉위시부터 성상파괴 정책을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으나, 754년 종교회의까지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들은 그가 성상파괴 정책을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첫 번째 사건이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당시 모든 군대가 황궁의 독트린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반란은 곧이어 테마제도와 관련된 제국 내부의 재조직을 가져왔다. 물론 이 반란에 대한 처벌이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 반란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의 전초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정책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은 754년 종교회의 이후부터이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숭배자들을 이단과 반역자로 취급하기 위해 12년(742-754년)을 기다려서 754년에 와서 종교회의가 개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볼 수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탈리아 문제보다는 발칸반도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으며 제국이 안정된 후에 성상파괴 정책을 실시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정책 초기에 아랍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불가리아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상파괴 정책을 적극적으로 쓸 수 없었고 또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군대의 의도를 경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754년의 종교회의는 좀 더 연기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54년 이전에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프랑크족의 개입은 콘스탄티누스 5세로 하여금 종교회의를 754년 2월 10일로 앞당기도록 했으며, 754년 1월 6일 폰티온의 황궁에서 있었던 교황청국가 설립의 약속은 콘스탄티누스 5세로 하여금 754년 종교회의를 성상파괴 정책 방향으로 더욱 몰고 가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5세가 그의 성상파괴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성상파괴자들을 황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성상파괴에 대해 열정을 쏟아낼 수 있는 관료들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 모두가 754년 이전의 만국공회의의 정통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과 성상파괴 정책이 수도와 수도부근 지역인 트라케시온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은 그의 아들 레오 4세가 사망한 후 황궁의 정책이 성상숭배로 되돌아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주>

*명지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1) 성상파괴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레오 3세의 성상파괴 논쟁에 대해서는 명지사론 제 10호(레오 3세와 성상파괴 논쟁, 109-138쪽)에 실린 필자의 논문을 참조하라.

2) J. B. Bury, A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London, 1889. Louis Bréhier, Vie et mort de Byzance, Paris, 1946, 1969 et 1992.

3) 대표적인 인물로는 앙드레 그라바르(André Grabar, L'iconoclasme byzantin, Paris, 1984)나 제르베 뒤메즈(Gervais Dumeige, Nicée II, Histoire des conciles oecuméniques vol. 4, Paris, 1978)가 있다.

4) G. Ostrogorsky, Histoire de l'État byzantin, trad. française de J. Gouillard, Paris, 1983 ; Judith Herrin, The formation of Christendom, London, 1987.

5) 그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그의 시대부터 나온 것으로 그의 사후에 더욱 윤색되어졌다. 이 전설은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자와 용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세례식과 그에 대한 게르마노스의 예언에 관해서는 Theophanes a. 6211(Theophanes, Chronographia, ex recensione J. Classeni, Bonnae, 1839 ; Idem, recensuit C. De Boor, Lipsiae, 1883 ; PG, CVIII)(PG는 J. P. Migne가 1857-66년까지 편찬한 Patrologia Graeca의 약자)를 보라.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5세의 우스광스러운 이야기와 그의 이름 Kopronymos간의 이야기를 만든 최초의 사람은 조나라스(Zonaras)다. 다른 작가들에 따르면 그의 이름 Koproynymos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말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말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그의 또 다른 이름인 Kaballinos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육체적 결함에 대해서는 Nicephorus, Antirrheticus III ; PG 100, 504를 보라. 콘스탄티누스 5세에 대한 가장 가증스러운 인간상을 그려내었던 자는 테오파네스인데(Theophanes, a. 6232)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테오파네스는 콘스탄티누스 5세가 음악과 여러 가지 구경거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까지 못마땅하게 여겼다.(Theophanes, a. 6259). 아랍세계에 널리 퍼진 후대의 전설에 관해서는 Adontz, Les légendes de Maurice et de Constantin V, dans Mélanges Bidez, Bruxelles, Annuaire de l'Institut oriental de l'Université, t. II, 1933-1934, pp. 112 et suiv.를 보라.

6) M. AM. Lombard, Constantin V, empereur des Romains, dans Bibliothèque de la Faculté des lettres de Paris, Paris, 1902, t. XVI, p. 25-26. 당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나톨리콘(Anatolikon), 트라케시온(Thrakesion)과 키비레오투스(Kibyrrheotes) 테마를 보존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부터 성상파괴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소아시아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였다.

7) Theophanes, a. 6233 ;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59-60 ; Denis de Tell-Mahré, trad. Chabot, pp. 24-25 ; LP I, 432.

8) Lichachev, Sceaux de l'empereur Léon III l'Isaurien, dans Byzantion, t. XI, 1936, p. 469 ; T. Whittemore, An Unpublisched Byzantine Seal, in Orientalia Christiana Periodica, XIII, 1947, 1-2, Rome, 1947, p. 376-383 ; André Grabar, L'iconoclasme byzantin, 2e éd. Paris, 1984, p. 137-138.

9) Theophanes, a. 6233. 그런데 ≪황제는 나에게 마리아가 낳았던 크리스트는 신의 아들이 아닐뿐 아니라 보통인간이라고 말했다≫라는 테오파네스의 이야기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의 저서(Interrogations ; Hennephof, Textus byzantinos ad iconomachiam pertinentes, Leiden, 1969, n。 160)에서 크리스트라는 이름은 단지 인간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묘사한다라고 말했다. V. Grumel, Recherches récentes sur l'iconoclasme, Echos Orient, XXIII, 1930, p. 94.

10)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58 ; Theophanes, a. 6221 ; Thedosius Melitenus, Chronographia, edidit Th. L. Fr. Tafel, Monachi 1859 ; Venance Grumel, Les Regestes des Actes du Patriarcat de Constantinople, vol. I, Les Actes des Patriarches, Fasc. II et III, Les regestes de 715 à 1206, Paris, 1989, p. 12.

11) Theophanes, a. 6234.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61-62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기아에 관해서는 Nicephoros, Antirrheticus III, PG 100, 500을 보라.

12) Theophanes, Chronographia, AM 6234-6235 ; De Boor 421 ; PG 108, 848 A-B. 마리아의 처녀 잉태에 관한 콘스탄티누스 5세의 독트린은 수도승 게오르고스의 연대기에서도 보이는데 이 내용도 테오파네스의 글과 유사하다.(Georges le Moine, Chronographia, in HENNEPHOF(Textus Byzantinos ad Iconomachiam Pertinentes in usum academicum edidit, Leiden, 1969) P. 19.

13) G. Ostrogorsky, op. cit., p. 200.

14) Judith Herrin, The formation of Christendom, London, 1987, p. 365.

15) 콘스탄티누스 5세는 옵시키온 테마의 동쪽 부분에 소위 마우리키우스(Mauricius)의 저서로 알려진 스트라테기콘(Strategikon)에 언급된 구(舊)엘리트 부대인 부켈라리이(Buccellarii : 767-768년)와 옵티마테스(Optimates) 테마를 설립함으로써 옵시키온 테마를 분할시켰는데 부켈라리이와 옵티마테스 테마의 수장들(옵티마테스의 수장들은 domestikos라는 칭호를 보존하고 있었다)은 옵시키온의 코메스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Diehl et Marçais, Le monde oriental de 395 à 1081, Histoire général(G. Glotz), Histoire du Moyen Age III, 1936, pp. 256-257.

16) M. AM. Lombard, Constantin V, empereur des Romains, dans Bibliothèque de la Faculté des lettres de Paris, Paris, 1902, t. XVI, p. 89-91.

17) Theophanes, a. 6237, De Boor 422 ;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62, et Antirrheticus III, PG 100, 509. 9세기에도 단성론자 시리아인들의 식민지가 트라키아에 있었다.

18) Theophanes, a. 6237, De Boor 422-23. 이 페스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로부터 그리스 에게해 도서로 퍼졌는데 아마 선박 위의 쥐에 의해 퍼진 것 같다. 망고(C. Mango, Byzantium : The Empire of New Rome, London, 1980, pp. 78-81)에 따르면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페스트가 콘스탄티노플 인구를 감소시켰는데 이 인구감소는 뒷 시대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19) 이 당시 아랍세계는 시민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시리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20) Theophanes, Chronographia, AM 6247 ; De Boor 432 ; PG 108, 865 C ; Nicephoros, Breviarium historicum de rebus gestis post Mauricii imperium, De Boor 64 ; PG 100, 972 C. 테오파네스는 아르타바스데스(Artabasdes)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니케포로스는 아르타바조스(?ρτ??αζο?)라고 표기하고 있다.

21) Gervais Dumeige, Nicée II, Histoire des conciles oecuménique, vol. 4, Paris, 1978, p. 79.

22) Theophanes, a. 6254 ; G. Ostrogorsky, Histoire de l'État byzantin, trad. française de J. Gouillard, Paris, 1983, pp. 197-198. 당시의 슬라브족에 관해서는 P. Charanis, The Slavic Element in Byzantin Asia Minor, Byzantion, 18 (1948), pp. 77 ss.

23) LP I, 432. P. Speck, Artabasdos, der rechtgläubig Vorkämpfer der göttlichen Lehren, Bonn, 1981, pp. 115-18 ; O. Bertolini, "I rapporti di Zaccaria con Constantino V e con Artavasdo nel racconto del biografo del papa e nella probabile realtà storica," Archivio della Società romana di storia patria 78(1955), pp. 1-21.

24) PL 89, 927 : Data X Kal. Julias, imperante domno Artavasdo a D대 coronato magno imperatore, eius III sed et Nicephoro magno imperatore anno III, ind. XII, id., 929. 헤펠르(Hefele-Leclercq)는 이러한 이례적인 상황은 한 로마 성직자의 부주의 혹은 무지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HL III, 690-691).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만족할 만한 답변이라고 볼 수 없다. 자카리아스의 두 서한(M. G. Ep. III, n。 57 ss. et 58)은 아르타바스도스와 니케포로스를 황제로 규정하고 있다.

25) LP I, 426-427 ; Diehl, Exarchat de Ravenne, pp. 415-416 ; L. Duchesne, L'État pontifical, Paris, 1911, pp. 16-17. 743년 6월 29일 회담이 있었다. 또 한번 롬바르드족의 왕은 교황에게 양보를 했다. 그래서 라벤나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26) Mansi XII, 308 ; LP I, 433

27) 743년 라벤나의 총독과 대주교는 자카리아스 교황에게 그들을 대표하여 롬바르드족과 협상해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리우트프란트는 라벤나 총독구를 공격하고 스폴레토(Spoleto)로 가는 남쪽 통로를 통제하는 케세나(Cesena) 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교황은 라벤나로 갔으며 이어 롬바르드족의 수도인 파비아(Pavia)로 가서 리우트프란트로 하여금 케세나를 라벤나 총독구에 돌려주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LP I, 429-31) 그후 749년에도 자카리아스 교황은 외교적인 협상문제로 페루기아로 갔었다. 당시 그는 리우트프란트의 계승자인 라치스(Ratchis) 왕에 의해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라치스를 물리쳤다. 그후 라치스는 수도사가 되었으며 롬바르드족은 749년 7월 아스톨프를 왕으로 선출했다.(LP I, 434)

28) Cf. L. Halphen, Charlemagne et l'empire carolingien, Paris, 1947 et 1948, pp. 318-38 ; R. Folz, Le Couronnement impérial de Charlemagne, Paris, 1964, p. 40.

29) H. Hubert, Étude sur la formation des États de l'Église, Revue historique, 1899, t. LXIX, pp. 34-36, 241-242 ; AM. Gasquet, Le royaume lombard, ses relations avec l'empire grec et avec les Francs, Revue historique, 1887, t. XXXIII, pp. 58-92. 라벤나는 751년 여름초에 아스툴푸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로마가 위협당했다.

30) 스테파누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성상을 다시 숭배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이 내용은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이 콘스탄티누스 6세와 이레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 Mansi XII, 1061). 자카리아스가 752년 3월에 사망할 무렵 라벤나와 펜타폴리스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기구는 완전히 붕괴되었다(L. Duchesne, L'État pontifical, Paris, 1911, p. 19).

31) LP I, 442 ; H. Hubert, op. cit., pp. 39-40 ; Diehl, Etudes sur l'administration byzantine dans l'Exarchat de Ravenne, p. 220 ;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25 vols. Milan, 1723-51), t. IV, p. 350.

32) LP I, 445-447 ; Codes Carol., Epistolae 6, 7, 8, 9(MGH Ep. t. III) ; Duchesne, Les premiers temps de l'État pontifical, Paris, 1911, pp. 34-78 ; L. Halphen, Charlemagne et l'empire carolingien, Paris, 1947 et 1968, pp. 31-46.

33) 테오파네스 연대기에 관한 베리(Bury,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London, 1889, t. II, pp. 425-426)와 위베르(Hubert, Quelques observations sur la chronologie de Théophane, dans Byzantinische Zeitschrift, 1897, p. 504 sq.)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회의는 753년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들 이후의 테오파네스 연대기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회의는 754년 2월 10일에서 8월 8일 사이에 개최되었다(Grumel, L'année du monde dans la chronologie de Théophane, dans Échos d'Orient, t. XXXVII, 1934, pp. 406-407 ; Brooks, The chronology of Theophanes, dans Byzantinische Zeitschrift, t. VIII, 1899, p. 85 ; Ostrogorsky, Studien zur Geschichte des byzantinischen Bilderstreites, Breslau, 1929, p. 14.

34)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의심할 여지없지 종교회의가 개최되기 며칠전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계승자는 종교회의 마지막 회기 때 선출되었다. 총대주교좌가 얼마동안 공석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콘스탄티누스5세가 이 공석기간을 특별히 이용하려고 했다는 흔적은 원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원사료에 대해서는 Theophanes, a. 6245 ;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p. 65를 보라.

35) 히에리아 황궁은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보스포로스 해협의 소아시아쪽에 있는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와 칼케도니아(Chalcedonia)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36) Jean de Jérusalem, Contre Constantin Caballinos, 16 ; PG 95, 332 C. ≪교부들의 영광스럽고 카톨릭적인 종교회의인가 아니면 신으로부터 내쫓긴 우두머리가 없는 종교회의인가? 나에게 다시 답변해다오. 어떤 총대주교가 이 종교회의에 참가했는가? 로마의 총대주교는 감히 오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도,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총대주교가 없는 이 종교회의는 무엇인가?≫. 830년경의 수도승 게오르고스(Georgos, Chronographia, PG 110, 961 C)는 754년의 종교회의의 모임은 불법적이고 범죄적이라고 주장하였다.

37) Constantin V, Interrogations ; Hennephof nos 247, 256-261.

38) 제르베 뒤메즈(Gervais Dumeige, Nicée II, Histoire des conciles oecuméniques vol. 4, Paris, 1978)에 따르면 이 종교회의는 754년 2월 10일부터 8월 8일까지 열렸다고 한다.

39) Mansi XIII, 205-363. 815년 제2차 성상파괴주의자 종교회의를 비난하였던 니케포로스가 쓴 한 저서에 따르면 754년 종교회의의 논쟁은 815년 제2차 성상파괴주의자 종교회의에 의해 수정되어져서 다시 나타났다(Ostrogorsky, Studien zur Geschichte des byzantinischen Bilderstreites, Breslau, 1929, pp. 2-3 und 46-60).

40) Theophanes, a. 6245 ;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p. 66 ; Stephanus constantinopolitanus diaconus, Vita S. Stephani Junioris, PG 100, 1111.

41) Theophanes, a. 6245 ; Nicephoros, Breviarium, édit, De Boor, p. 65.

42) Ch. Diehl, Une vie de saint de l'époque des empereurs iconoclastes, dans Séances et comptes-rendus de l'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1915, pp. 134-150.

43) Theophanes, a. 6254.

44) Stephanus constantinopolitanus diaconus, Vita S. Stephani Junioris, PG 100, 1136 B, 1169 A - 1185 D ; Theophanus a. 6257. 스테파누스는 프로코네세(proconnese)로 유배를 갔다가 764년 11월 20일 갑자기 사망했다.

45) LP I, 447-448.

46) 이 칭호와 관련된 내용은 Liber pontificalis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단지 Notitia de unctione Pippini, MGH Ss I, 18 (776년에 작성된 자료). 이 칭호에 대해서는 Hanton, Titres byzantins dans le Recueil des Inscriptions chrétiennes d'Asie Mineure, Ext. de B. N., IV, 1927, pp. 129-130.

47) LP I, 466 n. 2 ; JW 2336.

48) LP I, 446, n.5 ; JW, 2338 ; Codex carolinus, 14.

49) 루이 브레이에(Louis Bréhier, Vie et mort de Byzance, Paris, 1946, 1969 et 1992, p. 84)는 762년 6월 10일을, 알렝 뒤셀리에(Alain Ducellier, L'Église byzantine, Entre Pouvoir et Esprit(313-1204), Paris, 1990, p. 121)는 762년을, 오스트로고르스키(G. Ostrogorsky, Histoire de l'État byzantin, trad. française de J. Gouillard, Paris, 1983, p. 198)는 763년 6월 30일을 주장하고 있다.

50) 당시 포로들은 대경기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를 당했다.(Louis Bréhier, Vie et mort de Byzance, Paris, 1946, 1969 et 1992, p. 84) 이로 미루어 볼 때 콘스탄티누스 5세가 불가리아에 대해 얼마나 증오감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51) Theophanes, a. 6254. 콘스탄티누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은 773년까지 모두 9차례나 있었다. 773년 콘스탄티누스 5세는 불가리아에 대해 평화협정을 강요했다.

52) Theophanes, a. 6258, a. 6259, a. 6263 ; Nicephoros, Breviarium, 76.

53) Judith Herrin, The formation of Christendom, London, 1987, p. 381.

54) Stephanus constantinopolitanus diaconus, Vita S. Stephani Junioris, PG 100, 1159-1165 ; Nicephoros, Breviarium, 71-72.

55) LP 1, 465.

56) Alain Ducellier, L'Église byzantine, Entre Pouvoir et Esprit(313-1204), Paris, 1990, p. 127.

57) 수도원과 관련된 경제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Paparrigopoulo, Histoire de la civilisation hellénique, pp. 188-91 ; N. P. Kondakov, Iconography of the Holy Virgin, Petrograd, 1915, II, p. 3 ; A. Guillou, La sicile byzantine état de recherches, Byzantinische Forschungen, 1977, pp. 95-145 ; idem. Régionalisme et indépendence dans l'empire byzantin au VIIe siècle, Rome, 1969, pp. 301-307.

58) 764년 8월 25일 19명의 고위관리들이 스테파누스 교황과의 관계 때문에 체포되었다. Theophanes, a. 6257.

59) Vie de Romain le Néomartyr, éd. P. Peeters, A.B., XXX, 1911, p. 413-414 ; Georges le Moine, Chronographia, PG 110, 933 AB.

60) Hefele, Histoire des conciles, trad., française, 2e éd. Henri Leclercq, vol. III, 2, p. 725.

61) Louis Bréhier, Vie et mort de Byzance, Paris, 1946, 1969 et 1992, p. 83.

 

출처: http://mahan.wonkwang.ac.kr/medsociety/jn/jn05/5-, 01.htm http://doc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webdoc&query=%C4%DC%BD%BA%C5%BA%C6%BC%B4%A9%BD%BA+3%BC%BC&qt=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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