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부패한 교회, 불편한 교회에 사는 사람

형람서원 2024. 7. 1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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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교회, 불편한 교회에 사는 사람

교회는 시작하면서 부패와 거짓이 함께 한다(참고. 마 13장, 가라지 비유). 그리고 지상에는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필연성이 부패한 교회의 주체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이 부패한 교회의 모습을 해소하지 못해서 다른 길로 같다. 대표적인 사람이 도나투스(Donatus, ?-355)이다. 도나투스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다. 도나투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나티즘(Donatists, Donatism)은 순수하고 거룩한 교회 운동이지만 보편 교회를 이루지 못한 이설이 되었다. 교회는 놀랍게도 거룩한 교회 운동을 이설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보편 교회를 부정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극단적인 주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도 도나티즘의 공격을 변호해야 했었다. 도나티즘과 변호 과정에서 많은 교회 이해들이(세례 부분에서) 구축되었다.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한 세례"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재세례파(Anabaptism)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일치성, 거룩성, 보편성의 가치를 사도의 가르침(사도성)으로 유지하는 기관이다. 거룩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파괴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당하기 때문에 파괴나 정죄가 합당하다는 인식은 부당하다. 사도의 가르침이 교회에서 끊임없이 유지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 역사적(historic) 교회이다.

항상 교회 안에서는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도나티즘의 변형을 재세례파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많다. 재세례파 중에서 자기 근원을 도나티즘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도나티즘은 역사에서 분명하게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의 큰 차이점은 국가는 새로운 헌법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만, 교회는 지역이 바뀌어도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기관이다. 교회가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이유는 교회의 주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왕을 바꿀 수 있고, 국민의 의식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있다. 교회의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불변성을 가진 인격체이시다. 그분의 불변성을 의심하는 신학자나 철학자는 없다. 그래서 근대에 오면서 불변성의 가치를 잘못 인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파도가 형성되고 있다.

"교회가 절대자의 가르침과 의도를 잘못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우문(愚問)이 아니라 악문(惡問)이다. 반대로 말하면 "교회는 절대자의 가르침과 의도를 바르게 인식했는가?"가 된다. 세상은 "O와 X"를 요구하지만, "O와 X"로 답할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교회의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인식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불완전성이 교회가 주님의 합당한 기관이 아니됨의 수준이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에게 보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문제있다고 평가되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교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될지 그 깊음이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보고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경솔한 판단은 새로운 논리를 창출하기 때문에 더 주의를 해야 한다. 우리가 절대자의 의도를 100%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가치를 100% 정당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한 불합리한 세상 구조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럼에도 거룩한 기관인 교회에 있는 부패와 부조리의 현상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부패와 부조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것이다. 부패했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부패 때문에 이전의 역사와 현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의 시작은 도나투스에게 있었다. 도나투스의 주장은 너무나 명확하고 예리한 것이어서 북아프리카에서 너무나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 파도를 변호한 사역자가 어거스틴이다. 이단의 가르침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황홀하고 달콤하다. 칼빈은 주의 말씀이 달콤하다는 말을 성경을 따라서 반복하는데, 그리스도인에게 달콤한 것과 넌크리스천에게 달콤한 것은 전혀 다른 개체일 것이다. 이단의 가르침의 달콤함과 사도의 가르침의 달콤함은 결코 혼합되거나 절충될 수 없는 영역이다. 교회, 그리스도인은 사도의 가르침이 전파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자기부정과 함께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협력한다. 그러나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고 주의 몸된 교회에 대한 배려가 없으며, 한 몸을 찢으며 분열시킨다. 마틴 루터카 존 칼빈은 교회 이해에서 카톨릭(catholic)을 고백한다. 교황주의도 가톨릭(catholic)을 고백한다. 지금 세계에서는 두 기관에서 catholic을 주장하며 공존하고 있다. 동방교회도 카톨릭성을 주장하지만, WCC의 거대 공동체로 구성된 카톨릭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철학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심각한 비판 의식이 있었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덴마크 교회의 부패에 염증을 내어서 새로운 교회 출현을 도모했다고 한다. 헤겔좌파 철학자는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도 <기독교의 본질(1842년)>을 집필하며 복음 이해를 새롭게 제언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절망의 선(The line of despair)"을 제언했는데,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과 키에르케고르에게 두었다. 이러한 사유자의 중간거점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이다. 모든 위대한 사유가들은 부조리를 혐오했다. 탁월한 식견에서 부조리를 쉽게 발견했다. 그리고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서 모든 정념을 쏟아부었다. 그러한 놀라운 사유 체계들이 18세기 유럽을 쏟아부었고, 그 사유체계의 에너지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부조리는 혐오 대상인데, 부조리를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존재 한계의 문제이다. 그런데 헤겔은 놀랍게도 칸트의 "순수이성"이 아닌 "절대이성(정신)"이라는 개념으로 미래에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것을 구상화시켰다. 즉 경험하지 못한 가치가 실재화될 것을 믿는 체계가 헤겔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가치를 절대선으로 여기는 것인데, 그것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경험하지 못했어도 미래에 오는 가치는 절대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구조가 된다면 현재 가치를 부정하고 철폐시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현재 가치를 고수하는 것이 발전을 저해하는 꼴통이 될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사회가 선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다. 미래의 가치는 현재의 가치보다 못하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계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계에도 적용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발달된 기술문명 때문에 인간의 기능 저하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문명의 이기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현재 살고 인간의 부조리이다.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비행기를 타고 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까? 가장 합리적인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는 재세례파(Anabaptist) 아미쉬(Amish) 것이다. 그들의 부조리는 미국이라는 거대 군사 경제 강국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부조리를 피할 수 없다. 사회와 이웃의 부조리를 만난 나 또한 부조리의 자체이다. 부조리를 비판하기 때문에 내가 정당한 것이 아니다. 부조리를 비판하는 내가 가장 부조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에 폭력이 없고 대화와 평등이 구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부조리가 없다는 것일까?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는 부조리보다 더 악한 위선을 보이는 것이다.

부조리와 부패를 만나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자. 자기의 본문을 생각하고 자기 본분을 행하라.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자기 본분이 있다. 자기 본분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행해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자기 본분이 예수님을 높이고 전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행하라. 부조리를 비판할 수 있는데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고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본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조리를 만났을 때에 슬퍼하지 말고 담대하게 일어서서 예수님을 전하라! 누구든지 자기 본분을 다하면 된다. 선한 본분을 받아 선한 일을 하면 그에 합당한 상급이 있을 것이다. 악한 본분을 받아 악한 일을 한다면 그에 합당한 처분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 아니다. 악한 본분을 받은 사람도 구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한다면 결코 악한 본분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자기 본분을 다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힘써 주의 이름을 전하라!! 교회에 세상의 따뜻한 햇볕이 있었을 때는 없었고, 없을 것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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