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성경] 마태복음 20장. 가까워진 구원의 실체, 셋째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심(찬 459)
1. [마 20:1-16] 포도원 일당 노동자 비유. 포도원 품꾼(일당 노동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과 인간 생존권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16절). 하나님의 경륜은 크고 놀랍기 때문에 인간이 수용하기 어렵다. 이 본문을 경제와 공동체 원리(정의 실현, 복지 구현)로 해석할 때가 많다.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해석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어떻게 이해할까? 포도원 품꾼 비유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포도원 일꾼(일당 노동자, 한 데나리온)을 부리는 주인이 삼시(9시), 육시, 십일시(오후 5시)까지 일꾼을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다. 이런 주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부터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주인이 자선사업가라고 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주인이 모두에게 한 데라니온을 지급한 것이 더 큰 문제다. 왜 주인은 각 시간마다 일꾼을 데려왔을까? 시간마다 들어오는 일꾼들을 보면서, 먼저된 일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로운 일꾼이 들어오면 일의 효율이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포도원 주인은 그렇게 일을 진행했고, 일당(日當)도 모두 한 데나리온씩 지급했다. 그리고 자신을 선하다고 선했다. 일꾼들이 보았을 때 주인은 공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선하다고 선언했다. 일꾼들은 어떻게 할까? 이것은 경제 원리로 생각하면 매우 위험함을 알 수 있다. 주인에게 종이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기업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업이지만 일정의 공익성을 세운 것이다.
2. [마 20:17-19] 셋째 죽음과 부활 이야기. 예수께서는 다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심오한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 대해서 겸손으로 나가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 이해로 이해할 수 없다. 실제 경험했던 베드로가 저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예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잠잠하고 겸손해야 한다.
3. [마 20:20-28] 세배대 아들들의 어머니의 요구. 예수께 세배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청탁을 했다. 야고보 사도는 가장 먼저 순교했고, 요한 사도는 가장 오래까지 사역했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의 요구가 황당했지만(20-23절), 두 아들은 충실하게 주의 사역을 이루었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의 청탁에 열 제자가 분노했다(24절). 예수께서는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심을 밝히 셨다(28절). 죽으시고 삼일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따르지 않고, 자기 경륜 안에 예수를 포함시키려는 행동은 무모하며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지금까지 그러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이 포함한 신(神), 인간이 이해한 신(神)만을 정당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까지 묻고 계신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4. [마 20:29-34]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심. 예수께서 여리고로 내려가시는 길에 맹인 두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에게 자비를 호소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져 보이게 하셨다(34절). 그들이 예수를 따랐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고침을 받았는데, 십자가에서 왜 침묵했을까? 그들이 가난하고 사회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소리 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런 약한 자와 함께하며 그들을 강하게 하셨다. 오순절 성령 이후에는 어떤 약한 자라도 자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도 베드로까지 십자가 재판정에서 도망갈 정도였으니, 다른 고침을 받은 사람들 누구도 함부로 예수의 정당성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5.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머리를 숙여 경배하며 정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적기 때문에 믿음을 구하나이다. 주여 믿음이 적은 자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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