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스크랩] 칼 바르트의 신학을 분별하기

형람서원 2017. 9. 1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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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신학을 분별하기
칼 바르트를 비평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르트의 학문이 어렵기도 하지만, 비평적으로 탐구하는 과정도 외롭다. 칼 바르트를 비평하는 것은 어렵고도 외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칼 바르트를 비평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산이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연구자들을 보면 각 교파에서 연구자들이 포진되어 있다. 칼 바르트는 어쩌면 한물간 고전적 신학자일 수도 있다. 칼 바르트 이후 신학자들은 이보다 더 과격하게 신학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폴 니터(Paul F. Knitter)는 <오직 예수이름으로만?>(변선환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6 개정판)이란 저술에서 신학에서 예수 이름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폴 니터 신학은 불교에서 기독교와 대화가 가능한 구조이기에, 타 종교와 대화가 가능한 신학 내용이다. 한국에서 김경재 교수는 <이름없는 하느님>(삼인, 2001)이란 저술로 종교다원주의 기독교 체계를 제시했다. 현재 기독교 신학은 ‘신성 없는 예수’가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Christocentrism, Christ-Centered Theology)이라고 하고, 현재는 신 중심 신학(Theocentrism, God-Centered Theology)이라고 한다. 필자는 예수가 없는 현재 ‘신 중심 신학’의 시작을 칼 바르트가 시작하고 체계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신 중심 신학에서 인간 중심 신학(Man-Centered Theology)까지 진보하고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신학이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우리는 80년 전에 형성된 칼 바르트의 신학 영향에서 빠져있는 현대신학과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의 방향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단순하게 개인의 주장인 칼 바르트의 사상 위에 거대한 담론을 구축하고 있다. 개인을 따를 것인가? 공교회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다시 질문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라고 질문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평가하고 규정하지만 진정한 답은 아버지께서 계시한 지식이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진리이다(마 16:15-20). 그럼에도 지금은 예수를 정치 혁명가, 사회 혁명가로 이해하며 신학하거나, 논의에서 예수 이름을 제외하기도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 대한 정의’를 확립해야만 신학을 분별할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신학 분별도 동일하다. 칼 바르트에게 접근하는 연구자는 기독교에 대한 자기 정의(self-definition)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거의 대부분 칼 바르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칼 바르트에 대해서 억지로 거부하고 고집부리지 않도록 훈련하고 있다. 학문은 자기 정의를 확고하게 하는 것과 자기 정의를 확장하는 것에 있다. 칼 바르트의 신학 내용이 자기 정의에 부합되는지, 자기 정의의 확장에 부합되는 신학 정보인지를 판단하는 훈련이다. 거짓 신학을 연구할 때도 긍정적으로 자기 정의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유도해야 한다. 칼 바르트 신학을 거부하는 것을 우리 훈련의 고유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학문은 장황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논리적인 글은 아무리 거대한 문장이어도 장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명료한 문장을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기독교도 한 문장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기독교를 “죄사함과 영생의 종교”라고 제시한다. 종교(宗敎)는 신(神)을 섬기고(예배) 연구하는 행위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가르침의 집단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고 죄인을 구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영원히 함께하는 것을 추구한다. 

분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화는 위조지폐(僞造紙幣) 감별이다. 위폐감별사는 위조지폐를 감별하기 위해서 진폐(眞幣)를 많이 본다고 한다. 진폐를 정확하게 알아야 위폐를 감별할 수 있다. 칼 바르트 신학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학문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연마를 게을리하면 강력한 칼 바르트의 흡인력을 저항하고 통제할 수 없다. 결국은 칼 바르트의 흡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결국 바르트에게 지배된 자기를 정상으로 판단하는 학문 노예가 될 것이다. 노예는 영적 노예, 경제(돈) 노예, 명예 노예, 학문 노예 등이 있다. 노예는 파우스트처럼 자기 영혼을 팔아서 자기 목적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자기 영혼을 바르트에게 흡입하여 학문적 영예를 얻게 된다. 그렇게 학문 노예로 얻은 영예를 누릴 것인가? 자기 주체적 양심에 근거한 지식으로 설 것인가?도 결정해야 한다. 

좋은 교사는 제자가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자기 학문 체계를 잘 전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 학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와 상호 관계에서 상호 증진된다. 그래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이루어진다. 어떤 위인도 혼자 서는 경우는 없다. 독생자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참빛으로 독존자이시다.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되어 참된 학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못하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진리가 없기 때문에 노예로 학문을 할 수밖에 없다. 노예의 탐욕으로 학문을 할 것인가? 자유자의 기쁨으로 학문을 할 것인가? 학문을 닦을수록 자기 정체성을 명료해지는 것이 참된 학문이다. 학문을 할수록 미로(迷路)로 들어가는 것은 노예 행동의 양상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칼빈은 미로로 들어가는 첩경은 ‘쓸데없는 사변(idle speculation)’이라고 했다(기독교강요, I, 6, 2). 칼 바르트는 정통 교회의 교리 체계를 과거의 모방 혹은 반복이라고 하며, ‘쓸데없는 사변’으로 규정한다. 

어떤 신학자를 공부하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생의 자기 정체성을 명료하게 세워야 한다. 사람은 개별자로 타인과 관계에서 자기를 세우며 확장시킨다. 자기 이해가 없는 학문 행위는 물고기가 통발(유리 어항/어포기)에 들어가서 입구를 찾지 못하는 경우와 동일하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출처 : 한국개혁신학 연구원
글쓴이 : 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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