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東學) 1860년에 경주 출신 최제우가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양 종교(西學: 로마 가톨릭교회)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창안했다. 주요 사상은 유(儒)·불(佛)·선(仙)을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사상, 즉 사람이 곧 하늘이기 때문에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사상이 왜 호남에서 무장봉기로 발흥되었는가?
그 중심 인물은 '전봉준'은 '동학의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장군'으로 표시하고 있다.전봉준이 일으킨 무장 봉기는 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민족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동학은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천도교는 1919년 3.1 만세 운동에서 33인 지도자에서 기독교와 동등한 위력을 발휘했다, 천도교는 일제 시대에 박해를 받았고, 보천교 등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지금에는 천도교,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으로 분파되었다. 증산도는 상생방송을 설립하여 민족종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호남 들판 곳곳에는 동학 혁명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동학 운동은 민족의 방향성을 세운 혁명이었다. 실패했음에도 혁명이라는 명예를 준 것은 일제에 가장 강력하게 항거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 때 조금만더 전략을 발휘했더라면 우리나라는 동학의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의 왕들 중에는 서학(로마 카톨릭 종교)을 좋아했던 왕도 있었다. 대표적 위인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이다. 조선은 몇 번 종교가 바뀌는 혁명을 맞이했었다. 그럼에도 희안하게 좌절되었다. 그런데 개신교가 들어올 무렵에는 왕실과 민중들이 개신교에 크게 의지했다. 개신교는 의료, 교육, 구제 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동학은 서양 종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내에서 창안된 종교이다. 전봉준은 동학의 지도자였고, 동학 농민 봉기는 동학 교도들이었지만, 민족 부흥을 위한 투쟁이었다. 동학은 민족자결을 주장하면서 외세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 동학의 상처는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동학혁명기념비이지만 일본 군사에게 무참하게 죽어간 청년들을 기억하자. 그냥 세워 놓은 무의미한 기념비가 아니라 기억하는 기념비가 되길 기대한다.
종교의 맹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민중이 돌파구가 없을 때 택한 종교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 수 있다. 종교는 현세 문제를 타파하거나 변혁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종교를 세운 설립자, 신(神)을 예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