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II-2) 원죄(原罪)의 상태

형람서원 2016. 1. 1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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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II-2) 원죄(原罪)의 상태
고경태 목사(한국성경연구원)
기사입력 2016-01-10 오전 1:43:00 | 최종수정 2016-01-10 01:43  

[Inst, II, 1, 4] 첫 범죄(원죄):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불순종

하나님의 엄중한 벌을 보면 아담의 죄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아담의 죄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아담이 절제하지 못한 죄 혹은 과일 먹기를 탐낸 식욕(食慾)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되고 풍성한 처소에서 죄를 범하여 인류 미래를 결정하는 인류의 조상이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무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생명나무를 바랄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아담은 이상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결국 여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열매를 먹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죄를 교만(驕慢)’으로 이해하였다. 교만이 멸망의 선봉이라는 것이다( 18:12). 사람이 자기의 분수에 만족하고 한계를 넘으려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 순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기록에서 시험의 성격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얻을 수 있다.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per infidelitatem mulier a verbo Dei)하였다. 불순종이 타락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씀하였다( 5:19). 이 때 불순종은 여자의 불순종이 아닌 아담의 불순종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무시하고 변역(變易)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경배도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불순종이 타락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하나님을 평가하는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다.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크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무시하였다. (먼지)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인데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얼마나 황당하고 흉악한 상태인가?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면 안 되는 존재인데(結草報恩), 아담의 죄를 관대히 보려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추악한 반역이다. 이런 마음이 아담에게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며 하나님에게 악의가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찬성하며 반역하였다. 아담의 반역은 금단의 열매를 향한 강한 욕망에서 완강한 불순종의 모태가 되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정욕이 이끄는 대로 빠르게 따랐다. 그 때 아담이 사탄에게 귀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참조.  9:21), 오늘날 우리의 귀에 복음이 받아들일 때에 구원(생명)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결코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욕망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인데, 그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사탄의 유혹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시켰다.


5. 아담의 타락은 인류의 타락이고 우주의 타락이다(대표와 연합 원리)

아담은 창조주와 언약으로 연합하여 사는 것이 생의 목적이었는데, 언약(첫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영혼이 죽은 것이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모든 자연 질서를 저버린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에게 죽음의 파멸이 온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도 탄식한다( 8:20-22). 피조물이 탄식하는 원인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부패가 이루어졌다. 현상태에서 편만한 부패와 부조리는 아담의 원죄에서 나온 것이다. 아담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퍼지더라도 불합리하지 않다. 아담이 죄를 지을 때 혼자 지은 것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죄의 부패로 끌어드리는 결정이었다(대표원리).

이렇게 물려받은 부패를 교부들은 "원죄(peccatum originale)"라고 불렀다. 그리고 "(,peccato)"라는 말은 본래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다.

원죄(原罪)에 대한 이해는 교회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그 죄책을 감당해야 되는 보편적이고 유전적인 죄의 개념이 상식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박사들이 합리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Pelagius)는 겁내지 않고 아담의 죄가 그 자신의 손실을 초래했을 뿐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신성모독적인 망상(profanum commentum)을 서슴지 않고 주장하였다. 사탄은 이 궤변으로 원죄 교리를 덮어 침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죄가 전달(transiio)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한 증명이 있다( 5:12). 그러자 펠라기우스는 그 전달을 모방(imitatio)에 의한 것이지 혈통(propago)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궤변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외부로부터 부패한 것을 학습한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결함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 등은 구원을 주는 바른 교리에 대항해서 파렴치하게 고집과 무모한 태도를 일관하였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51:5)은 원죄에 대한 성경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며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악()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 인류에게 공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부패하고 오염되었다. 그럼에도 주의 은혜를 힘입어 더욱 담대하게 원죄를 고백할 수 있다.

기사제공 : 크리스찬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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