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

형람서원 2015. 8. 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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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


서 창원 목사(삼양교회)

이끄는 말

 

오늘날 예배처럼 기독교 교회에서 혼란이 많은 주제는 일찍이 없었다고 본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세상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크리스챤 부모들의 가르침이 문제라기 보다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특히 예배의식이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모든 문제를 교회 자체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목회자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한마디로 교회가 구식이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흥미로운 것들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교회에 붙들어두려면 새롭고 발랄한 예배풍이 교회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시도가 요즈음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소위 <열린예배> 또는 <구도자 예배> 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상당수의 교회에서는 {경배와 찬양} 모임을 주도하는 젊은이들의 손에 의하여 예배진행이 이루어 지고 있고 성직자들은 설교순서에 잠깐 나와서 설교아닌 설교를 하고 마는 것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덕목으로 여겨진 정중함과 질서 그리고 엄숙함이 이제는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도리어 영적 예배를 방해하는 주범이 된 것이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들 왁작지껄하고 행동적인 예배에 자유롭게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예배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움이 경건을 대신하고 있고 천박함이 성숙을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슬프게도 우리들 주변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그러한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기발한 노래들, 기발한 몸짓들, 기발한 어릿광대 짓들, 그리고 선배들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예배하였던 장소를 기발한 분위기로 치장하는 일들이 신세대 교회의 예배갱신이요 경건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와 같은 논리에 많은 목회자들이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무엇이 바른 성경적인 예배인지를 오늘 우리들이 믿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과 그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 그리고 그들의 성찬 예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 모범

 

1560년 5월은 스코틀란드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대 전환점이었다. 존 낙스 목사는 다른 다섯명의 ‘존’ 목사들과 함께 교회개혁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스코츠 신앙고백서>와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을 제정하였다. <스코츠 신앙고백서>는 ‘간단하고 명확하며 명백한 말로 일반적인 신앙원리를 기술한 정직한 문서이다. 신앙의 확신과 결단 및 열정을 나타낸 고백서이다. 그 안에는 단순히 항거하였던 자세로부터 범국민적인 종교로 자리잡게 한 적극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The Scots Confession of 1560, ed., G. D. Henderson, The Saint Andrew Press, Edinburgh, 1960,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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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문서는 ‘하나님의 분명한 성경말씀’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드렸다. 존 낙스는 그의 스코틀란드 교회사에서 이 두 문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얼마나 철저하게 인정하였는지를 밝히고 있다: 'Sacra scriptura est principium theologiae doctrinae'. 이것은 ‘성경만이 개혁교회의 신학원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스코츠 신앙고백서>에서 그동안 로마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에 예속된다는 것을 부인하고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훈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확신속에서 개혁교회의 표준 예식서라고 부를 수 있는 <제일 치리서>를 제정한 것이다. 이 문서는 의회에서 재정사용 사항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함으로서 통과되지는 않았다.. 목사들에 대한 재정지원과 교회 재산 분할문제로 인하여 당시 전통적으로 로마교회의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의원들과의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은 로마교에 몸담고 있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그대로 가지되 말씀선포 사역과 올바른 성례거행을 위한 교회의 모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용했을 뿐이지 재정에 관한 조항을 법적으로 인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당시 종교개혁의 원리에 입각한 개혁교회의 올바른 모습을 세워나가는 원리를 충분히 제공하였다. 물론 이 두 문서에서 예배에 관하여 규정한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성례에 관한 규정은 교회의 공 예배에 관한 개혁자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존 낙스목사는 스코틀란드에 오기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과 함께 사역할 때 1556년에 제정하여 사용한 <Genevan Service Book>을. John Knox's Genevan Service Book 1556, William D. Maxwell, Oliver and Boyd, 1931 기초로 하여 조국의 교회의 예배갱신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제네바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모범은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근저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문서에서 낙스는 주일 오전 예배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예배의식의 중요성 및 예배에, 있어서 목사의 위치를 언급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칼빈이나 낙스 및 다른 종교 개혁가들은 하나같이 그 당시에 발간하였던 예배 예식서 또는 기도 예식서등은 반드시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제정되어야 할 것을 언급하였다. 개혁가들은 항상 초대 교회의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여 교회 개혁의 표준으로 삼고 그들의 전통을 유지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결과로 그들은 주일 예배가 반드시 성찬식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예배의 범위와 내용이 이것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보편적인 가르침이요 복음이라고 하였다. 성찬 테이불은 크리스챤들의 기도와 헌신의 장소이며 강단은 예언(말씀선포를 가리켜 당시에는 예언이라는 말을 썼다)하는 처소이다. 따라서 성찬 테이블과 강단의 그 구분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였다.. ibid, p. 39.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했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예배부름,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 시편 찬송,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 설교, (성례), 헌금, 긴 기도와 주기도문 암송, 사도신경(목사 혼자 했음, 그러나 성찬예식이 있는 주일이면 성도들과 다같이 하였다), 시편 찬송, 축복선언.


스코틀란드에 돌아와 종교개혁을 성사시킨 낙스는 1564년에 이른바 예배지침서를 만들었다. 이것을 우리는 낙스 예식서(Book of Common Order, or Knox' Liturgy)라고도 부른다. 적어도 예배와 교회정치 및 신학적 입장은 통일된 모습을 간직하였던 스코틀란드교회는 1648년에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와 예배지침서를 승인함으로서 새로운 전기를 맏이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17세기 에배지침서에서 확증된 예배순서는 이러하였다: 예배부름, 은혜와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 시편찬송, 죄 회개와 중보기도, 설교, 감사와 간구의 기도, 긴 기도와 주기도문, 시편 찬송, 축복 선언. 이와 같은 순서가 지금까지 장로교의 전통적인 예배순서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시 여길 것은 예배의 중요한 네가지 요소는 변함없지만 예배 순서는 시간이 자나면서 약간의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예배부름이나 회개기도와 중보기도, 그리고 찬송과 성경읽기와 설교등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하여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고백은 성례식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헌금시간이 따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도 특이한 것이었다. 물론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순서에다 삽입하는 것을 용납하기는 했지만 1549년 이후의 자신의 예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하게 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개혁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실천이다.

 

또 하나 눈 여겨 볼 것은 예배 기도가 둘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져진 목회기도는 한국식처럼 장로나 평신도를 대표하여 누군가가 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도록 했다. 그리고 회개와 사죄를 위한 기도와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및 중보기도를 나누어서 두 번 대표기도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오늘날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로 묶어 목사가 그야말로 목회기도를 한다.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잉글란드에 최초로 장로교회를 세운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예배의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네가지 성경적 기준을 제시한 것을 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The Works of John Whitgift, Coolidge, p.5.


첫째,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전 10:32).

둘째, 질서정연하게 시행되어야 한다(고전 14:40)

셋째, 교훈하고 훈육적이어야 한다(고전 14:26)

넷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전 14:6-7)


이것은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어떤 사항은 개 교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세대, 장소, 회중, 그리고 다른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에 결정해서 영원한 표본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예배모범과 맞물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내세운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이 취해야 할 초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글에 담긴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이것이 종교와 예배, 그리고 섬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유일한 정경이요 규범이라고 믿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록한 말씀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법적이지 않다’.. William Bradshow의 1605년도 논문임, quoted from Leland Ryken, Worldly Saints, 생명의 말씀사, 1995, p. 237.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매우 적법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의식이 극성을 부릴수록 진리는 줄어든다. 예배의 단순화는 장로교 예배나 청교도들의 예배의 특성이었다. 그들은 사제복장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종교자유의 침해와 로마 카토릭을 연상시킬 우려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을 멀리하고 오히려 화려함과 겉치레를 조장할 수 있으며 또한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 건물조차도 단순하게 만들었다. 각종 형상과 조각상을 교회에서 치워버렸으며 사제와 회중을 갈라 놓는 예배실도 없애버렸다. 이들 교회당의 특색은 예배당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강단과 강단에 올라가기 위해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과 강단위에 펼쳐져 있는 큰 성경, 그리고 강단아래에 위치한 성찬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다. 강단이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교회에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이들은 구약적 성전 개념을 없애버리고 교회를 예배당이라는 모이는 집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예배를 하늘의 아버지와의 영적 가족들의 만남이라고 해서 예배의 가족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여기에 주일의 축제적인 의미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이나 언약도들은 가토릭이나 성굥회가 만들어 놓은 성일이니 축일이니 하는 날들을 주일 예배로 대체시키고 모든 절기를 폐지하였다. 리차드 그린함 목사는 “우리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이다” 라고 하였다.. Leland Ryken, op.cit., p.249

 

또 이들은 교회 음악을 단순화 했다.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오로지 시편만이 합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화음을 이용한 작곡이나 애매모호한 라틴어 노래들 그리고 직업적인 음악가를 배제시켰다.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된 시편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찬송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스코틀란드의 개혁장로교회인 자유교회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 예배 찬송은 시편만을 부르고 있다. 신학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논하기에 앞서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예배시에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한미디로 이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들을 교화하며 영적 지식과 거룩함, 형제들을 향한 기쁨을 피차 나누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예배와 관련하여 존 카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요관심과 소원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의식을...잘 집행하는 것이다...이 때 우리는 인간적인 잔꾀를 덧입힐 생각을 버리고 그것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과 단순함을 보존해야 한다’.. ibid, p. 252.

 

 

2. 장로교 예배와 성찬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따르면 성찬식은 ‘자주 집전 되어져야 한다’ 고 했다. 물론 여기에는 얼마나 자주 해야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명시하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성찬식은 오전 예배시 설교후에 또는 마지막 시편 찬송을 부른 후에 집전 하도록 했다. 이 지침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성찬식이 공 예배에 붙어있는 하나의 첨가물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스코틀란드 장로교가 성찬식을 자주 하지 아니하고 일년에 두 번 하는 것과 연계하여 나온 비판의 소리였다. 사실 칼빈은 성찬은 매 주일 오전 예배에 병합하여 집전 되어져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 자신도 성찬식이 매 주일마다 집전 되어져야 함이 바람직하나 인간의 죄성 때문에 성찬을 남용할 소지가 있어서 가능한 자주 하되 한 달에 한번 또는 일년에 4번 정도로 권장한 것을 간과한 비판의 소리이다. 또 하나는 스코틀란드 교회가 성찬식을 일년에 두 번만 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비판이라고 본다. 장로교에서는 한번도 성찬식을 예배의 한 부가물로 간주한 적이 없다.


그들은 성찬을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 믿었지만 주의 몸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실 우려 때문에 칼빈의 권유를 따라 집전 횟수를 제한 시켰으며 그것도 일년에 두 번 하는 것은 당시 노회별로 연합하여 공동 성찬식을 가졌고 또 한번 성찬식이 공포되면 두 주일 동안 이른바 성찬시즌이 지속되기 때문에 일년에 두 번만 해도 10개 교회가 연합하여 한다면 일년에 모두 20회의 성찬 시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년 40주를 성찬시즌으로 보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년 3회라고 하면 일년 내내 성찬시즌을 가지게 되어 그 횟수를 제한시킬 수밖에 없었다. 칼빈 자신도 그 횟수를 매 주일마다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도 실지로 제네바 교회에서 년 4회밖에 실지 하지 않았다.

 

누구를 성찬에 참여시킬 것인가?


일반적인 권면은 ‘무지한 자나 문제를 일으킨 자,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 죄가운데 거하고 있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칼빈은 성찬 전에 성도들의 성결된 삶을 점검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에서는 장로들이 구역을 맡아서 개별 심방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합격을 하는 자들에게만 성찬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성찬 테이블에 참여자를 나오게 하여 함께 앉아서 떡과 잔을 나누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비 국교도 청교도들은 성찬 테이블에 무릎을 꿇고 성찬에 임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스코츠 대표단들은 성찬 참여자들이 성찬 테이불에 나오게 하여 참여치 아니하는 다른 회중들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회중 교회 지도자들은 회중 석에 앉아 있으면서 떡과 잔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주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곳은 희생제단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 떡과 잔을 받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성찬 테이블 앞에 나와 무릎을 꿇는 것이든 좌석에 앉아서 받는 것이든 사실 예수의 제자들은 떡과 잔을 비스듬이 기대어 누운 채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자세는 성도 수가 많은 교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스코틀란드 교회에서 하는 방식은 교회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은 모두다 한 자리에 앉는 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 칼라미 교수가 지적한대로 성도의 연합은 성결의 연합에 있는 것이다. 토마스 구드윈의 지적대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것은 테이불에 앉아서 성찬을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는 것에 있다’는 말은 옳은 지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성찬에 임하는 자들에게 십계명 암송과 사도신경 및 주기도문 암송을 하게 하였다. 주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성결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특별히 장로교회의 성찬식에서는 성찬 참여자의 올바른 참여를 위하여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언급된 성찬에 관한 규례는 다음과 같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성례를 제정하셨으니, 곧 주님의 성찬이다. 그것은 세상 끝날까지 그의 교회에서 계속 지켜져야 할 말씀이다. 성찬의 의미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영구히 기억케 함이요, 신자들에게 그의 죽으심의 혜택이 임한다는 보증의 표요,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이 공급되어 자라게 한다는 것이며, 그들이 행해야 할 의무에 헌신한다는 것이며, 신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통을 가지도록 매는 줄과 보증이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로서 신자들끼리 가지는 교통이다.


성찬거행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성부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실제로 다시 제물로 드려진다는 의미도 아니다. 성찬 거행의 올바른 의미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위에서 단 한번만 자신을 영원한 제물로 바치신 그 사건에 대한 기념행사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에 대한 신자들의 영적 찬송에 불과한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성찬을 “미사”라고 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찬 거행시마다 그리스도를 실제적 속죄 제물로 거듭거듭 바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단 한번만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으로 충족했던 그리스도의 속죄적 희생의 절대적 완전성에 대하여 가장 해로운 교리이다.


성찬을 거행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의 사역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1)그가 성찬을 제정하신 때에 주신 말씀을 회중에게 선포하심, 2) 떡과 포도주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여 그것들을 성별하게 하심, 3) 떡을 떼고 잔을 들어 수찬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시되 자신도 참여케 하심, 4)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주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신부의 기도나 감사로 인하여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성경과 위배될 뿐 아니라 일반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된 것이며, 성찬의 성격을 뒤집는 교리이고, 많은 미신과 우상주의의 원인이 되어 왔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요소들을(떡과 포도주) 받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및 그의 죽으심의 모든 혜택을 믿음으로 받는다. 이와 같은 섭취행위가 참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적인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이다. 그 섭취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물리적으로 그 요소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섭취자 들의 신앙에 영적으로 현림한다.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할 때에 그들이 물질적인 요소를 받지만 거기에 상징된 실체는 받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성찬 참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며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누리는 데 적합하지 못하니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동안에는 사실 상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될 수도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9장, 박윤선 역, 영음사, 1988

 

 

3. 맺는 말


마지막으로 필자는 장로교 성찬예식의 정신을 닮고 있는 1556년의 제네바 예식서에서 사용된 성찬 순서에 대한 글을 옮겨 싣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본 글은 영어와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한글로 번역하여 여기에 옮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달에 한번 이었던 주의 성찬이 집전되는 날은 목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재현하여 준 바와 같이 주께서 어떻게 그의 거룩한 성찬을 우리에게 제정하여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하시오. 나는(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주께로부터 받은 바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곧 주 예수께서 잡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떡을 먹을 때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1:23-29).


목사가 그와 같이 실시하면 이제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을 선언한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예식을 집전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권면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다. 바울 사도는 우리들이 떡과 잔을 받기 전에 신실하게 우리 자신을 잘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의 유익이 큰 것인 만큼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과 산 믿을 가지고 주 앞에 나온다면 우리는 그 성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거하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을 함부로 먹고 마시게 되면 엄청난 위험스러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의 몸을 범하는 것이 되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몸을 생각지 아니하고 우리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양한 질병과 여러 유형의 죽음과 더불어 나타나는 재난을 하나님께서는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중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였다든지 그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훼손시켰다든지, 간음을 했다든지, 악의를 품었다든지, 질투를 하였다든지, 또는 어떤 종류의 탐욕스러운 일을 하였다든지, 은밀한 죄가 드러났다든지 할 때는 성찬에 참여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성찬을 받은 후에 사단이 가룟 유다에 들어간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속에 사단이 들어가지 아니하기 위해서라도 성찬 참여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속을 모든 허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 자신을 살피시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심판의 저주를 받지 아니하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과거 모든 죄악들을 회개하시오 그리고 살아았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구주 그리스도안 에서 그의 죽음심의 공로와 사랑을 의지하여 주님의 자비하심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그 때로부터 우리는 그를 피난처로 삼게 되고 모든 악의를 잊게 되며 언제든지 형제애를 가지고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영적 대화를 나누며 매일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완전치 못하여 우리속에서 연약함과 곤고함을 느낍니다., 또 종종 우리 자신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말아야 하는데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치 못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며 우리의 마당한 의무인 하나님의 영광을 열정적으로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사랑하시는 주께서는 우리를 자비로 대해 주시며 우리의 심령속에 당신의 복음을 아로새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망과 불신앙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입혀 주시고 우리의 욕정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의를 사모하게 하심을 봅니다. 또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안에서 의로운 자임을 확신케 하십니다. 즉 우리들의 모든 허물과 명백한 불완전함이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한다거나 또는 주님의 영적 만찬석상에 참여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우리가 의로워서라든지 우리들의 삶이 공의로운 것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해지기를 간구합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저주의 자식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가련한 병든 영혼들을 위한 유일한 치료제로서 이 성찬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영혼들에게 유일한 위안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어떤 합당한 것도 요구치 아니하시고 오직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하게 인정하기를 원하시며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이 성찬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로 주께서 간주하실 것입니다. 또 이 성찬이(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가장 안전한 위안과 유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일들과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우리들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에) 더 이상 마음을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육체가운데 이 떡과 잔에 임하시도록 사모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들의 영혼이 영향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새 생명을 얻으며 그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그 모든 것들을 떠나서 오직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며 그에 의하여 영접받게 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측량할 수 없는 아버지의 영광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영원히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와 같은 권면이 끝나면 이제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성찬 테이불에 앉는다. 그리고 성찬받을 모든 남녀 성도들이 준비된 자리에 나와 앉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목사는 떡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말로 기도를 한다:

 

오 자비로우시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 아버지시여 여기에 모인 모든 무리들이 주님을 인정하며 주님을 통치자요 주재자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 자신의 손으로 지음 받은 주님의 일군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 시간마다 주님에게 존귀와 주님의 거룩한 위엄을 나타내야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나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단이 죄라는 수단을 통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우리 인생들을 구하여 주셨나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천사도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었던 것을 은혜와 지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안에서 구속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죄는 없으신 그 아들이 우리들과 같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몸안에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형벌을 받으시고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으며 그의 부할하심으로 죽음을 멸하셨으며 그리하여 아담의 모든 후손이 포로로 잡혀있는 이 세상에 다시금 생명을 가져다 주셨나이다.


오 주 여호와여 어느 누구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이 세상에 자비하심을 보이도록 당신을 움직이게 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음을 고백하나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생을 약속하시고 영생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누가 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공의를 대적하는 것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를 당신의 은혜로 받아 주셨나이다.


오 주 여호와여,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어두움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확실한 은총을 버리도록 괴롭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안에서 우리 자신을 이 성찬 테이불에 드리나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하여 오직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와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선언하옵나이다. 또 그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임을 주게서 인정하심을 증거하나이다. 오직 그로 인하여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옴을 증거하나이다. 오로지 그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나라를 소유하게 되며 그의 테이블에서 먹고 마시나이다. 하늘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할 것이며 흙더미로부터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비의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택하여 주신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기쁨의 장소에 머물 것입니다.


이 모든 측량할 수 없는 복을 받게 됨을 믿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주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하심을 받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나이다 아멘!

 

이러한 기도를 드린 후 목사는 떡을 떼어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잔도 분배한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에 관련한 성경구절을 읽는다. 그리하여 떡과 잔을 받음으로 인하여 단순히 우리들의 시각과 감각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이 이 성찬이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명상케 한다. 그 일이 끝난 후 다음과 같은 감사 기도를 드린다: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비천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누셔서 우리를 주님이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주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영의 충분한 양식으로 영생을 얻도록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께 간청하옵나이다. 주께서 우리게 그 좋은 은총을 베푸시기를 잊게 되는 고통이 없게 되기를 소원하옵나이다. 그 모든 주님의 은총을 우리들의 심령안에 깊이 새겨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은혜안에 자라며 참 믿음이 날마다 증폭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행에 힘쓰는 참 믿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우리를 넘어드리려는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선언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주님은 이 모든 것 위에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나이다. 찬송을 받으실지로다 아멘!

 

이처럼 기도한 후 성도들은 시편 103편을 찬송하였고 그리고 축복의 선언이 있은후 테이불에서 일어나 흩어진다. 성찬예식이 끝난 후 다음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시간에 다시 모여서 성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가지며 주님에게 연합된 주의 백성으로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다짐과 결단을 되새기며 돌아 간다. 이것이 성찬시즌에 볼 수 있는 장로교의 성찬식 모습이었다. 이 집회를 통해서 수많은 삼령들이 주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교회가 새로운 주의 은혜와 자비를 맞보며 힘있게 복음을 증거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도 형식적인 성찬식을 떠나서 성찬의 바른 의미를 되 살릴뿐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촉진시키는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장로교회의 전통인 말씀잔치(예, 부흥사경회)를 중심으로한 성찬시즌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하며 글을 맺는다.

 

[출처] [본문스크랩] 스코틀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 (성경과 외국어) |작성자 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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