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4권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정경, 계시의 보고이다.
복음서를 읽는 성경 독자, 복음서를 설교하는 목사에게서는 기록 목적에 부합되도록 예수 믿음이 일어나야 하고, 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서는 ‘4개의 복음서’이지 ‘두 종류의 복음서’는 아니다. 4개의 복음서를 축소시키는 것은 복음서를 왜곡하며 제한하는 행동이 된다. 복음서의 저자는 교회의 전승에 의한 것이지, 복음서 저자가 밝힌 적은 없다. 그럼에도 교회가 믿고 있는 것은 사도적 전승을 교회의 기초로 삼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교회의 확립을 위해서 사도들을 감동하셔서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마태와 요한) 그리고 제자의 제자들(마가=베드로와 누가=바울)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세 복음서는 AD 70년 이전의 기록이고, 요한복음은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 많은 의견이 있으나 기록 연대를 설정하는 것은 성경 독자의 매우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에 확고한 기록 연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예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한 기록이 예수의 사후 매우 짧은 년도에 기록된 것은 매우 독특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신화과정이 없음을 단편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1. 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된 글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해서' 기록된 글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를 믿도록' 기록된 글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20:31), 요한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 기록자들도 동일한 목표로 기록한 것이다.
복음서를 읽는 독자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예수를 믿는 것에 착념하는 것이다. 메이천(Machen)은 교회와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현재 누구보다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 오순절 이후 많은 유대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 믿는 자는 매우 적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으로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예수에 관해서 거의 알 수 없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매우 제한적이고 왜곡된 역사 사료를 갖고서 예수에 관해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과 인도를 따라 "예수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 사도들은 ‘믿음’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생략하였다.
2. 복음서는 4권이다
복음서는 4권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4권이고 4권이다. 복음서 4권을 두 부분으로 정리하는 경향에 대한 변호적인 문장이다. 복음서를 다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교회의 정설의 가르침이 아니다. 복음서를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으로 나누는 경향은 계몽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공관(共觀, synoptic)은 '공통으로 본다'는 개념으로 한 자료(Q)가 등장하게 되며, 복음서의 역사적 순서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한다. 현재는 마가복음우선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Q의 원자료와 자기의 특수자료로 복음서를 구성하게 되는 구성원리를 갖게 된다. 이러한 구성원리에서는 성령의 영감 원리가 제외되어 성경의 권위가 고대 문헌의 한 종류로 추락하게 된다. 송영목 교수는 ‘공관복음 문제’(synoptic problem)라는 표현이 1585년에 Georgius Sigelius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1774년에 그리스바흐(Johan J. Griesbach)에 의해서 정착된 것으로 제시했다. 마가복음 우선설은 1835년 라흐만(Lachmann)에 의해서 제안된 것에 불과하다. ‘Q’에 대한 것은 1863년 홀츠만(H. J. Holzmann)에 의해서 제안된 것이다. ‘공관복음’, ‘마가복음 우선설’, ‘Q’는 약 200년 전에 시작된 제안에 불과한데 정설(定說)로 정착하고 있다. 제안은 학문적 제안으로 믿음을 추구하는 교회의 신학은 아니다.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권이다. 복음서는 4개 책으로 한 믿음을 구성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교회는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할 때에 내용을 영감된 책으로 본다. 그런데 397년에 결정된 정경목록에도 중요한 의미를 두어야 한다. 정경의 내용에 솔라 스크립투라를 두는 것과 함께 정경의 목록에도 솔라 스크립투라를 두어야 한다. 정경의 목록을 흔드는 것은 곧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시작이 된다.
3. 복음서의 저자는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복음서의 저자는 기록 자체에는 없다. 마태복음서의 저자를 마태로 생각하는 것은 마태라고 믿고 온 교회의 전승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4 복음서가 동일하다. 어떠한 신학자도 ‘마태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바꾸어 부르지 못한다. 정확한 명칭은 복음서1, 복음서2, 복음서3, 복음서4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복음서1을 마태복음서라고 부르겠는가?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에서 정경목록을 채택할 때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믿고 통용된 방식으로 결정한 것이다. 교회 설립에서부터 400여 년 동안 유지되었고 확정되었다. 그리고 1400년을 유지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의문이 제기되었고, 200년 만에 2000년의 유산이 없어져버린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이란 명칭까지도 모두 재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까지 도저히 바꿀 없는 것이다. 즉 형식은 놓아두고 내용을 바꾸어버렸다. 마치 일주일의 첫날을 월요일로 바꾸고 싶은 간절한 열망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마태복음을 마태복음이라 부르고, 마가복음을 마가복음이라고 부른다면 공관복음, 마가복음 우선설, Q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