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계속하는 교회

형람서원 2013. 10. 1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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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년 카르타고 공회의에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원죄 이해가 확립되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거스틴주의가 아닌 펠라기우스이 가르침을 절충한 형태를 유지했다.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이다. 그런데 이 형태도 529년 7월 3일,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세미 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가 정죄된다. 즉 교회에서는 펠라기안이든지 펠라기우스든지 정죄된 형태이다. 그런데 이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알미니안으로 또 바울 신학의 새관점 학파(박동근, [칭의와 복음])로 계속되고 있다. 왜 교회의 회의에서 거짓 가르침으로 정죄하였는데 교회에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인가?

 

첫째, 교회의 사역자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처음부터 복음을 모르는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십자가(고전 1:23)을 담대히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는(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있는 곳에는 자기부정의 십자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전적부패에 대해서 낙담하는 것은 자연인이며, 은혜의 백성은 전적부패를 해소한 구속의 은혜를 붙든다.

 

둘째, 교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순된 행동이다. 교회는 일치를 위해서 항상 회의를 열어서 바른 교리(Sound doctrine, Othodoxy Theology)를 결정하고, 거짓 교리를 추방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바른 교리를 붙들지 않고 거짓 교리를 고수한 행태가 325년 니케야 공회의 이래로 계속되고 있다. 교회의 사역자와 지체들은 교회의 바른 가르침을 이해해야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다. 혹자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 교리를 사용하자고 한다. 진리의 기둥인 교회가 어떻게 거짓으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거룩과 진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거짓이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따르는 것처럼 가장해서 교회에서 존재하는 형태이다.

 

셋째, 교회는 정죄된 가르침을 유지하지 않아야 한다. 펠라기우스가 정죄되었지만 반-펠라기우스로 유지되었고, 반-펠라기우스의 가르침으로 중세 1,000년을 유지했다.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주의의 부활이었지만, 칼빈파에서는 알미니안이, 루터파에서 경건주의가 형성되어 정통신학을 왜곡시켰다. 이러한 형태에서 정통신학은 현대에 완전히 역전되었다. 현대신학의 세파 속에서 정통신학은 무기력한 상태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정통신학을 대신하고 있다. 정통신학은 언제든지 변하지 않았고, 모든 교회에서는 정통신학을 결정했는데, 교회와 신학교는 현대신학이 난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른 결정을 했지만, 그 결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틀린 결정은 잘 지켜지는 희귀한 현상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재 교회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의 계속(윤리주의, 율법주의)하고 있는 것에 신비주의까지 첨가되어 혼돈이 심각하다. 미국의 기복주의도 첨가되었다. 한국의 무당종교의 형태도 첨가되었다.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에 첨가되어 괴형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백성들이 사랑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높이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의 바른 질서에 순복하는 것이다. 교회의 바른 가르침을 잘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고경태 목사(주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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