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Gresham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New York: Macmillan, (1921, reprint 1923, 1925)
김남식 역, [바울 종교의 기원], 한국로고스연구원, 1988년.
고경태 편
서 론
(pp. 3-40/ 번역본 8-56)
메이첸은 “바울의 종교의 변화(바리새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 탐구했다. 19세기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의 창설자이고 기독교 운동의 기원으로 예수로 생각하고,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기독교 기원을 탐구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자유주의 진영의 탐구에서 “예수(예수의 생애 혹은 예수전)”를 합리적으로 기독교 기원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기독교의 기원의 탐구에 “사도 바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사울(바울)이란 인간의 역사적 문서들이 정확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사랑”으로 결정하였다(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등). 기독교의 본질, 교회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성경 묘사를 제거한 “사랑”으로 규정한 뒤 100여년이 지났다. 유럽 기독교의 교회에서 “사랑”이 풍성하지만, 유럽의 교회들은 문을 닫았다. 100년 전에 정의된 “사랑”이 진정한 기독교의 기원이고 본질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시의 학자와 교회에서 다수가 합의하였고 현재도 그렇다지만, 역사적이나 문서적 근거의 연속성이 없다. 19세기에 형성된 교회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단지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형성된 한 아젠다(agenda)에 불과하다.
고대교회의 기독교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중세 교회에서 기독교는 보편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미신화한 “교회의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고대교회의 회복을 위한 믿음 개혁이다. 루터는 믿음을 강조했다. 칼빈은 성령으로 주어진 믿음으로 “연합”으로 성도와 교회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이 2세대를 지나면서, 루터파에서는 “구원의 경험과 삶의 변혁”을 강조하는 경건주의가, 개혁파(네델란드)에서는 “바른 교회 세움”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독교로서의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기독교의 가치는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에 대한 더욱 명료한 인식과 경배이고, 이 지식의 현장이 교회이고 신학교이며 삶의 자리이다.
기독교의 기원을 논함에서 바울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예수와 관계성을 설정하였다. 연속 혹은 불연속의 두 개의 상반된 의견이 있으며, 일치된 주장에서 또 일치의 방법에 따른 다양한 견해가 있다. 메이첸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으로 정확한 일치를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의 종교(믿음)에 대한 연구로 기독교 기원을 탐구할 수 있다.
바울을 연구함에 있어서, 메이첸은 당대(1930년대) 교회에서 바울 서신의 순정성에 대해서 거부한 몇 개의 서신이 있었다. 메이첸은 자신이 바울 서신의 모든 저작을 인정한다할지라도 문제로 올라온 서신들은 기꺼이 제외하고 바울의 종교를 탐구하였다. 바울서신의 순정성과 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한 회의가 있지만 그래도 일부의 가치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사이에 합의가 있다(참고. 신사훈, [바울의 구속론], 22-28. 1940년의 드루 신학교 박사논문을 기념사업회에서 편찬).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으로 바울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한다면 바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의 기원은 사도 바울의 증언과 사도들이 기록한 복음서가 제공하는 역사적 묘사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의 역사적 인물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강하게 의심하여 학문적으로 확증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바울 서신의 진정성은 신학자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복음서의 예수가 역사적 실제적 인물이었을 때에 문제점은 초자연적 인물로서, 자연의 힘에 대해서 주권적인 힘을 가진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모습을 제거하고 역사에 조화시킨다면 성경 본문을 재해석하여 본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내용이 산출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서에 다양한 비평적 해석을 도입시켜 “초자연적인 예수”의 모습을 해석시켜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예수”의 모습을 만들었다. 복음서에서 초자연적인 예수를 믿는 사람과 초자연을 거부한 자유주의 진영이 변론한다면 평행선을 달려 토론의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기원 탐구: 이중(복음서와 바울서신) 근원에서 바울로 탐구함]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기초적인 증거는 이중적으로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의 종교 대상으로 예수”이다. 메이첸은 두 방법을 탐구할 때에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는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일치된 영역인 바울의 종교의 기원을 탐구한다면 기독교 진리를 변호와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첸은 “바울 종교의 기원”을 취급한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사울이 변하여, 기독교인 중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것은 질적인 변화이다. 또한 바울의 감화력은 세계 역사 전체를 바꾼 위대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기원은 아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첸의 제안은 합리적으로 기독교의 기원을 밝히는 주요한 방법으로 바울의 종교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현장에서 복음을 전도하며 다양한 편지를 자신이 사역한 교회와 다른 지역의 교회에도 보냈다. 바울의 영향력은 실제 사역뿐만 아니라 편지에서도 컸다. 영향력은 서신이 더 크고 더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바울 서신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약 성경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바울의 신학(구원론)의 가르침이 2세기말부터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에서 빠졌고,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구원론으로 부흥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바우어(Baur)는 구교에서 비바울적인 성격이 율법주의적인 유대적 기독교와 타협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리츌(Ritschl)은 순수한 이방인 기독교의 기반에서 자연적 퇴보한 것으로 제시했다. 하르낙(Harnack)은 헬라적 사고 관습의 침입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세 신학자가 설명한 것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2세기의 교회가 바울의 구원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메이첸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바울의 은혜 교리의 신비로움 때문에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필자의 견해는 고대 교회에서 구원 교리에 대한 이해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성의 이해 확립에 중심했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바울주의는 교리사상의 효모는 되었지만 초석은 될 수가 없었다고 단정하였는데, 메이첸은 개혁파 신학이 바울주의에서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까지의 핵심 신학으로 하르낙과 다르게 이해했다.
하르낙의 견해가 맞는다면 기독교 역사와 세계 역사에서 나타난 바울의 영향력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이 사역하는 A.D 35년 정도에,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의 위상은 유대교의 이단적 한 분파에 불과했다. 그러나 30년 뒤에(약 A.D 65년경) 기독교는 로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세계 종교로서 기독교 위상이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고 모두가 포교 지향적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시작한 나사렛 한 동네 예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도한 사역자가 바울이다. 바울은 확고히 선점한 동방종교들의 틈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로마 전체에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방인 전도] 바울이 전도하는 이방 지역에는 동방의 여러 종교들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기독교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프리기아의 키베레(The Phrygian of Cybele)는 기원전 204년 이래로 로마에 확립되었다고 침체기를 겪을 후 바울 시대에 수도인 에베소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희랍-애굽의 이시스(Isis)교는 2세기에 승리의 나팔을 불 준비를 할 정도로 강력했고, 페르시아의 미드라(Mithras)교는 이시스교와 함께 로마 제국을 분할 공유할 정도로 세력을 갖았었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이시스 교, 키베레교, 미드라교보다 훨씬 나중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불리했다. 그리고 동방의 여러 종교들은 관용과 포용으로 열심을 다해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동방의 여러 종교들과는 전혀 다른 “배타성”이 있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유일신앙이었다. 바울의 강력한 전도를 결과로 세계는 동방종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바울의 사역이 없었다면, 세계는 키베레, 이시스와 미드라를 받들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종교는 이스라엘의 고대 종교와 같이 “절대이고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이시스와 미드라는 개종한다할지라도 과거의 신앙을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는 “관용(tolerant)”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심을 고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쉬운 동방의 여러 종교를 선택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로마의 중심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사역의 결과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의 사역은 측량할 수 없는 위치가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에도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 대해서] 바울이 없었더라면 유대교가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바울의 선교는 유대교 선교에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1세기의 유대교는 적극적인 선교 종교였다. 성경에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개종자를 얻기 위해서 노력함을 제시했다. 디아스포라 유대교도 포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는 사람들”이라 칭하는 계급으로 회당이 운영되었다. 이들은 이방인을 개종시켰지만 자기들과 하나를 이루지 않은 배타적 자세를 취하며, 회심에 다양한 조건(할례, 음식법 등)들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유일신교와 구약성경의 고매한 윤리를 용납하고 있었다. 바울의 선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유대인은 바울의 전도를 거부했고, 예비된 이방인은 기쁨으로 영접했다. 메이첸은 회당에 모여 영접한 이방인들을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평가했다. 유대인의 회당은 이방인 전도를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 장소로써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교 선교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바울 사역은 끝까지 회당 선교는 아니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자비량 사역으로 삶의 현장에서,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에서 활동하였다.
[구약성경과 유대교 그리고 바울] 유대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선민의식에 근거한 배타성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이방인을 배타했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이방인이 언약에 포함되었고 적극적인 선교 명령이 있음으로 이해한 것이다. 바울 시대에 유대교는 언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규정이나 음식법, 율법의 일부분으로 유대교를 배타적으로 이루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본문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 유대교의 매력은 권위 있는 정경에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는 자신의 정경본문의 의미에서 떠나 자기를 위해 재해석을 근거로 행했다. 이런 유대교에 대해서 르낭(Renan)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유대교가 아닌 미드라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기독교 개종에 할례 요구를 거부했지만, 배타성은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관용주의적인 유대교가 아닌 엄격한 바리새파로 볼 수 있다. 바울이 관용적인 태도였다면 이방인에게 십자가의 교리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첸은 바울을 당대의 유대교의 두 학파 관용주의적인 힐렐학파와 배타적인 샴마이 학파 중에서 샴마이 학파로 구분하는 것이다(김세윤은 [바울 복음의 기원], 75-76.에서 유대인의 세부류, 열심당, 바리새 운동의 과격파 샴마이, 이방인에 개방적인 힐렐로 분류하여 샴마이로 추정했다).
[바울의 선교 활동] 바울의 선교는 당대의 유대교와 동방 종교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종교의 창설자를 “예수”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교리는 예수의 지상 사역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구주 예수와 신적 계시를 발견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보편적인 복음은 무엇인가? 예수에게 바울의 가르침은 불필요한 것인가?
후자는 분명이 부정된다. 예수의 말씀에는 이방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이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방인을 전도하여 기독교를 확장시킨 바울이 창시자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승천 전에 이방인 전도를 명령했다(至上命令). 그럼에도 이방인 개종자에 대한 분명한 방침(메뉴얼)에 대해서는 사도와 교회가 확립하지 못했다. 즉 세례와 할례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여 완성하셨다. 그렇기에 율법의 권위를 지지하지 새로운 양식에 대한 전개는 없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방인 전도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 할지라도 이해가 된다. 외형적으로 제자들은 유대교의 금식과 절기를 준수하는 충실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기독교인으로서 구약성경의 할례, 음식법, 율법 등이 전혀 갈등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를 빼버린 바울의 믿음의 방식의 전개는 개혁적인 것이었다.
고대 교회가 활동했던 중심 지역은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으며, 안디옥 교회도 이름 없는 유대인이 전도하여 시작되었다. 즉 바울이 이방 선교를 전개한 유일한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복음전도의 지리적 분야에서는 바울보다 넓은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은 없다. 바울 사도의 단독으로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 “보편교회”를 설립, 동일한 복음으로 한 교회를 이룸이 역사적으로 확증된다.
바울의 전도 활동에 방해물은 지형, 재정적 장애가 아닌 기독교 종교적 원리였다. “구별주의”(Particularism, 필자 거룩의 명령)는 이방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갖아야 될 기본적 성격으로 구약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과 초기 사도들은 이 원리를 이방인에게 적용하는데 실패했다. 대안으로 “자유주의(liberalism)”이 대두되었지만 관용주의로는 종교의 핵심을 지킬 수 없었다. 사마리아와 이방인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당황하는 교회에서, 바울은 구별주의의 원리를 실제적으로 완벽하게 적용한 선교사이며 신학자이다.
2세기 중엽에 흥행한 마르시온(Marcion)은 구별주의를 극단적으로 실현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바나바 서신(Epistle of Barnabas)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거부하여, 구약의 모든 내용을 단절시켰다. 구약의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유대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었다(갈라디아서). 구약성경(율법)에서 산출된 죄의식,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제시한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 지목한 메시아”가 “예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 영혼을 위해서 구약성경의 원리를 수정하지 않고 확립했다. 바울은 실용적인 어떤 수단도 자신의 영혼에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율법과 자유] 바울에게 율법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에게 율법은 십자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졌다. 구약성경은 임시적인 성격으로 실행한 것이며,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한 가치로 새시대의 시작이 선언된 것이다. 바울을 앞선 제자들에게도 십자가의 의미는 알려졌다. 바울은 그들이 주장한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을 받았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완전히 생생한 역사였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로 이방인의 자유 즉 전체 기독교의 교회, 모든 교회 세대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확립되었다. 초기 사도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였지만 구원의 신뢰에서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역에(Christ had done for them) 두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현재 교회로 자기 백성을 부르심을 보았다.
사도들은 자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것은 고넬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할례 없이 세례를 베풀고 말았다. 할례없은 이방인에게 베드로 사도가 처음 세례를 주었다. 기독교는 할례를 폐기하지 않았고, 성전도 파괴하지 않았고 유대인의 특권도 파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기독교 구원의 유일한 표식으로 주장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 정치가 자리잡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교회는 신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정치 원리를 제정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그 원리는 교회가 모든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방인 선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바울의 위치] 바울이 세운 원리는 서양 문명까지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문명이 다양한 성분이 포함되지만 바울이 세운 원리의 근원은 성경에 있었고, 성경의 말씀이 세계 정치, 군대, 국가의 근본을 결정하게 되었다. 바울의 탁월성의 근거는 그 자신이 아닌 기독교의 기원이신 예수에게 있었다. 바울은 천재적인 전개로 기독교를 창시한 위인이 아니고, 그의 위대한 업적에는 주어진 정보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었다. 바울은 교회의 영적인 영역을 확립했고, 일반 세계사에서도 획기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바울의 종교] 바울의 종교는 무엇인가? 바울의 종교는 “구속의 종교(a religion of redemption)”이다. 바울의 종교는 자신의 삶에서 최근에 발생된 사건에 기초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성(父性)으로 행하신 십자가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제사를 받으심에 관한 것이었다. 즉 바울의 종교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울이 믿는 예수는 “계시자”가 아닌, “구주”였다. 영원하신 천상의 구주(the heavenly Redeemer)께서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이루신 후, 그의 영을 통해서 교회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 제시가 신실한 성도(the devout Christian)에게는 매우 친밀하지만, 19세기 역사가들에게는 매우 이상한 개념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한 인간”을 신격화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롬 5장에서 “하나님”을 예수께 적용하였다. 즉 예수와 바울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닌 종교적 관계로 신앙의 대상(the object of religion faith)이었다. 바울은 배타적인 신관을 가진 바리새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70인경(LXX)에서 “여호와”를 번역한 “주(κυριος)”, 절대적 종교적인 용어를 서슴없이 예수께 적용하였다. 배타적 종교를 가졌던 유대인 사울의 종교가 변화한 현상은 역사가들이 당황할 정도의 사건이다.
[바울의 변화에 대한 설명들] 바울의 변화에 대해서 4가지 다른 방법이 있으나 명확한 정의는 아니며 혹은 서로서로 결합되기도 했다.
첫째, 초자연주의적 설명(the supernaturalistic explanation)이다. 초자연주의적 설명은 메이첸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천상의 존재께서 죄인의 구속을 위해 이 땅에서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고,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어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시는 분이 예수라고 믿는 것이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가 한 인간의 신격화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백성을 죄에서 자기 피로 구원하시고 천상에서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으로 믿는 것이다.
나머지 세 의견은 동일하게 초자연주의를 거부한다. 자유주의 견해로 바울의 종교가 역사적 인물 나사렛 예수의 영향이라고 규정하였다.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심각한 체험이 바울의 종교 형성에 최상의 관심사로 규정한다.
자유주의 견해로 나사렛 예수는 인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이 위대성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의식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견해에서 예수는 하나님 의식을 근거한 가르침 사역 말기에 선택한 것이 “메시아”라는 범주였다. 즉 예수는 본래적으로 메시아가 아니라, 사역의 말미의 대안으로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신앙의 모범으로 생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도록 당부한 위인이 예수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강력한 추종하던 제자들에게 환각이 발생하여 부활을 생각하게 했고, 예수가 요구하지 않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를 본 일이 없는 사울은 제자들에게 전달받아 신격화 과정에 별 장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울은 내면생활에서는 예수의 충실한 제자였지만, 외적인 신학은 시대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의 생활과 종교에서 종교는 포기하고 생활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종교의 근원인 “나사렛 예수”에서 종교가 제거되고 가르침이 인류의 항속적인 자산으로 주장하였다.
이상은 메이첸이 자유주의적 견해에 대한 요약한 것이다. 하르낙(Harnack)의 [기독교의 본질]에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 생활을 지배할 것처럼 묘사했다고 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서 자유주의의 견해는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기독교 기원 탐구가 취급할 수 없는 역사적 확신이 예수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역사적 문제로 진전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 바울 기원론] 1920년대에 자유주의 진영에서 바울을 기독교의 기원을 삼으려는 두 시도가 대두되었다. 두 견해의 일치점은 예수의 역사적 인물을 거부한 것이다. 첫째 인물이 브레데(W. Wrede, 1904년 Paulus)에서 제시되었다. 그는 바울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기독교의 제2 창립자라 선언했다. 바울의 종교생활은 예수가 아니며, 그에게 있는 예수에 대한 것은 신학적 예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바울 신학의 원천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기독교 이외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브레데의 견해는 예수와 바울이 전혀 공통성이 없는 것으로 기독교를 재구성했다.
브레데의 견해에서 다시 두 견해가 나왔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원천에 대한 것이다. 브뤼크너(M Brückner)는 브레데의 견해를 지지하며 사울이 회심 이전에 갖았던 메시야 사상으로 삼았다. 유대인 사상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었고, 묵시문학에서는 하늘에서 구름타고 도래하는 땅을 심판하는 천상적인 존재였다.
메이첸은 유대 묵시문학을 따르는 브레데에 대해서 천상(天上)에서 도래하는 메시야에게는 고귀한 도덕적인 성품에 대한 강조가 없고 단지 신비(神秘)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에서는 신비가 없고 윤리를 강조하여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의 종교가 유대적 메시야관이 아니라 동시대의 이교 종교에 기초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약 20년 전(1900년경)에 신약성경분야에서 결정적으로 확정되고 방대한 저술들이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뷰셋(W. Bousset, 1913년 Kyrios Christos)이다. 뷰셋에게 주어진 명예는 신학의 독창성이다. 뷰셋에게 예슈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교사였지만 제자들의 가르침과 연속성이 없다. 제자들은 메시야 속성으로 인자(the Son of Man)을 천상적인 존재로 믿었다. 이 천상적인 존재가 속히 오심을 대망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이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헬라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미래의 심판자에서 현재적 주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뷰셋은 “주”라는 용어가 원시 팔레스타인 교회와 헬라적 교회가 다르게 이해되었는데, 헬라 교회가 당대의 밀의종교(密儀宗敎)에서 사용되는 호칭을 전유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뷰셋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전혀 다른 헬라 기독교라는 견해, 즉 바울의 종교가 이교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주어진 정보에 의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가설로 비판했다. 즉 뷰셋은 성경 본문의 증거를 떠나서, 자기가 설정한 가설에 모든 역사적 상황을 짜 맞춘 것이다.
[바울종교의 기원을 밝히 성경 본문의 범위: 바울서신과 사도행전] 메이첸은 바울을 연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근본으로 한다. 첫째는 바울서신이며 둘째는 사도행전이다.
먼저 13권의 바울서신에서 4권(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은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어(Baur)에 의해서 진작이라고 인정되었다. 나머지 3개(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는 만인이 인정하는(homologoumena) 바울서신이다. 나머지 7개의 서신은 극단주의자를 제외한 역사가들은 바울의 진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 3개의 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을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하면 보수주의(conservatism)이다. 바울의 목회서신(디모데전, 후서, 디도서)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는 학자는 없다. 메이첸은 인정하지만 인정과 불인정의 싸움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합의된 공통 기반에서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의 동행자였다(행 16:11의 “우리”). 메이첸은 사도행전이 후대의 저작설이라는 견해를 일축시킨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임을 하르낙도 인정했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저작설임을 부인하는 진영은 자연주의 견해자들이었다. 이유로 바울서신과 일치되지 않음과 사도행전이 등장하는 기적 현상이었다.
자유주의 시대에 사도행전의 저자와 말씀에 대해서 거부했지만, 1920년대에서는 사도행전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유대교와 유대파 기독교에 대한 명확한 관계가 증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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