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성경 이야기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 사도의 선교 편지 (1)-김헌수

형람서원 2008. 8. 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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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 사도의 선교 편지 (1)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이 글은 필자가 독립개신교회를 대표하여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에 대한 주님의 뜻을 살피기 위해 강변교회의 정병길 목사와 함께 일주일간 연변 지역을 시찰하면서 2008년 3월 28일에 그곳에 있는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공부한 내용이다. - 필자 주


미국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부와 한국의 독립개신교회는 이 지역에서 동역할 길을 모색하려고 여러 가지를 살피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시점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바울 사도가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의 일부분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이 서신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활동하신 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님 두 분이 떠오릅니다. 한 분은 1960년대에 한국에서 활동하신 간하배(Harvie Conn) 선교사님인데 그분은 빌립보서를 6개월 동안 방송하면서 설교하였고, 그 내용은 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쁨: 빌립보서 강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그 책은 제가 빌립보서에 대하여서 첫 번째로 읽었던 주해서였고, 이 서신의 중요한 점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둘째는 1940년대에 이곳 만주에서 활동하셨던 한부선(Bruce Hunt) 선교사님입니다. 그분은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벽에 성경 구절을 쓰면서 복음을 증언하였고, 감옥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제목의 찬송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의 『감옥에서 쓴 편지』(For a Testimony)는 20세기 판 빌립보서라고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27-2:18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먼저 빌립보서의 배경과 주제와 구조를 개괄하고 이어서 아까 읽은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또한 우리의 현실에서 생각할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서론: 빌립보서의 배경, 주제, 구조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유럽 땅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세워졌습니다(행 16:40). 아마 유럽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곳에 사는 성도들을 굳게 세우려고 두 번 더 방문하였습니다(행 20:1-6; 고후 2:13). 빌립보서는 바울 사도가 매임을 당하였을 때 쓴 것인데(1:7, 14) 어느 곳에 있는 감옥에서 쓴 것인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쓴 계기는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교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바울 사도가 복음 사역에 전무하게 하려고 경제적으로 후원을 하였습니다(4:15-16). 빌립보 교회는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참조. 고후 8-9장). 따라서 이 회중은 사도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4:1). 이 편지는 종종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기쁨’ 혹은 ‘기뻐하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온 것을 생각하면 합당한 별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에 갇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사도가 ‘기뻐하라’고 권면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의 의미도 더 깊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칼빈 선생을 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의 내용은 신자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자들의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에는 기쁨과 감사의 내용이 있지만, 또한 심각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마음을 쓰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내적인 분열이고(1:27; 2:1-4; 4:2-3), 둘째는 거짓된 교훈과 행습이 전파되는 것이고(3:2-21), 셋째는 육체적인 핍박의 위협입니다(1:28). 내적인 분열에 대해 세 번이나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그 문제가 다른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를 간청하는 것은 서신의 구조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에는 선교 보고와 목회적 교훈이 긴밀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서신의 구조를 나누어 놓고 보면 그 어우러짐이 더 분명해집니다.


1:1-2 인사

1:3-11 감사와 기도

1:12-26 개인적인 소식과 미래에 대한 생각

1:27-2:18 하나 됨과 겸손을 호소함

             1) 1:27-2:4 하나 됨을 호소함

             2) 2:5-11 그리스도의 모범

             3) 2:12-18 하나 됨을 또 호소함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소식

3:1-4:1 율법주의자와 방종주의자에 반대하는 복음

4:2-9 하나 되라는 호소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는 교훈

4:10-20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에 대한 감사

4:21-23 결론


1:12-26, 2:19-30, 4:10-20은 선교 보고서의 성격이 더 두드러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보고서와 달리 목회적인 고려가 편지의 핵심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하나 됨과 겸손을 호소함’(1:27-2:18)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빌립보서의 다른 부분도 자유롭게 찾아볼 것입니다.


2. 하나 됨을 호소함 (1:27-2:4)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서 협력”하라고 하였는데(1:27하), 그 말을 하기 전에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시민) 생활하라”고 권합니다(1:27상). ‘시민 생활을 하라’(politeuesthe)는 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퇴역 군인들을 위하여서 특별히 세운 도시였고 로마 시와 동일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그들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매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 사도를 고소할 때에도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였던 것입니다(행 16:20-21).


로마의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빌립보 교우들에게 바울 사도는 ‘시민 생활’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음을 각인(刻印)시켜서 가르치려는 것입니다(3:20). 그들이 로마 제국의 시민권에 대하여서 긍지를 갖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권은 더 영광스러운 것이고 더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제는 그들이 지상의 시민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의식하고서 복음 신앙에 합당하게 시민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사도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합니다(1:27-28). ‘일심(一心)으로 서라’는 말은 ‘팔랑크스’를 생각나게 하였을 것입니다. 로마 군대는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법을 받아들여서 군인들이 대오를 갖추어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옆 사람과 긴밀하게 붙어서 한 몸을 이루어서 전쟁에 참여합니다. ‘복음 신앙을 위하여서 협력하라’는 말은 운동 경기에서 가져온 입니다. ‘협력하다’는 말은 ‘쉰아쓸룬테스’(synathlountes)라는 말인데, 여기에서 ‘운동 경기자’(athlet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도는 빌립보 교인이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답게 한 팀을 이루어서 경기하라고 합니다. 이 군대의 깃발은 ‘하나 됨’입니다. 하나 되지 못한 군대는 백전백패(百戰百敗)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중 안의 분열은 신자가 세상에서 증언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세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게 합니다.


사도는 이어서 대적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대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적이 오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덤빈다고 하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적들을 물리쳤을 것입니다. 사도는 기독교인들에게 핍박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적들이 그들을 공격하지만, 그것이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표시이고 그들에게는 구원의 표시가 된다고 격려하였습니다.


29절에서는 빌립보 교인이 받은 두 가지 은혜를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은혜이지만, 동시에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1:29). 사도는 고난도 은혜라고 이야기하면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이 당하는 불의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고난이 영광으로 이르는 길입니다(롬 8:17).


바울 사도는 2:1-4에서도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분열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매우 부드럽게 그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합니다. 뒤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는데 그때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엄격히 다룹니다(4:2-3).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부족한 것을 보면 쉽게 비판하거나 고칠 것을 요구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훨씬 더 지혜가 있고 깊이가 있게 대응하였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사람이 바뀔 수 있고 태도와 행실이 변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은혜로 얻은 특권을 깨우치면서 그들을 가르칩니다.


1절에 ‘만약’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문맥으로 보아도 그렇고, 문법적으로 엄밀하게 따져 보아도 여기에서의 ‘만약’은 ‘하므로’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사랑으로 위로를 받고 성신의 교제를 누리고 긍휼과 자비가 ‘있으므로’ 회중의 생활에서 그 은혜의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회중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할 덕목으로 사도는 ‘하나 됨’을 가르칩니다. 2절에서는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뜻’을 갖고 ‘한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같다’ ‘하나’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합니다. 하나 됨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에 있는 특별한 약점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건강하고 헌신적인 회중이었지만, 거기에 분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진리에 철저히 헌신한 사람이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서는 근시안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고 진리대로 행하지만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엡 4:15. 개역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로 번역함)고 바울 사도는 가르쳤지만, 진리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의 일에 헌신한다고 하지만 피상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분열의 위험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만 있는 곳에는 분열의 위험도 함께 있습니다. 그 열심이 겸손과 나란히 가고 두 가지가 하나로 합하여지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교회 안의 분열은 대부분 열심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겸손의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안에 있는 분열을 감지하고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3)



빌립보 교회가 어떤 일에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였겠습니까? ‘아무 일’이라고 할 때에는 좋지 못한 일뿐 아니라 좋은 일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아마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 사도에게 선교비를 보내면서도 경쟁하는 마음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분별력이 없이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도는 다툼이나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다툼’(eritheia, 경쟁심)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다툼’이라는 말은 순전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에 사용한 말이기 때문입니다(1:17). 사도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경쟁심으로, 곧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가 차꼬에 매여서 있는데 그 매임에 ‘괴로움’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괴로움’이라는 말은 ‘마찰’이라는 말이니까 ‘마찰을 더한다’는 말은 그들이 차꼬를 흔들어 댄다는 말입니다. 차꼬의 쇠가 살을 파고들어서 피가 나게 하고 그것을 즐긴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옥에 갇혀 있지만 밖에서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파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러한 말로 그려냅니다. 경쟁심으로 가득한 그들의 마음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교회에 가입하는 것에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옥에 갇혀서 활동하지 못할 때에 자기들이 더 열심히 하여서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름보다도 자기들의 이름이 더 높아지면 바울 사도가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아마 바울 사도도 자기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서 바울의 차꼬를 심하게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으로 자기들의 일을 포장하였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그것을 즐기려는 것뿐입니다.


사도는 ‘다툼’[경쟁심]이라는 말을 두 경우에 사용하여서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요소가 없는지 돌아보도록 가르칩니다. 바울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다툼과 경쟁심에 대한 해답이라고 가르칩니다. 다투려는 마음이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교회에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은 좋은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덕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용맹스러운 군대로 다른 지역을 점령하여서 제국을 세웠던 로마 사람들에게는 ‘겸손’이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백전 불퇴의 용기와 자부심(pride)이 그 사회에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겸손’의 깃발 아래에서 하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복음 신앙에 합당하게 시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가치관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다운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서 시민 생활을 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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