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07년 09월 03일] 사도행전 2:1-13. 오순절 성령 강림
제목: 오순절 성령 강림
내용: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령이 강림하여, 제자들이 자릴 박차고 나와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였습니다.
1-4절) 오순절에 성령이 불의 혀처럼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함
1절)
다같이(with one(ὁμου) accord, 하나로 일치하여)라는 부사에 칼빈은 깊은 의미를 둡니다. 즉 약속하신 날 까지 같은 장소에 함께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교회의 견인성(their perseverance)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칼빈은 먼저 왜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였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어거스틴의 해석) “율법이 하나님의 손으로 석판에 씌어져서 유월절 이후 50일 만에 옛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과 우리의 마음 판에 율법을 쓰시는 역할을 지니신 성령께서도 참된 유월절이신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같은 날짜 만에 그 율법을 주실 때 예치하셨던 바를 완성하셨다.” 에 대해서 칼빈은 부정하지는 않지만 미묘한 해석(his subtle interpretation)으로 평가하며, “나(칼빈)는 그(어거스틴)에게 좀 더 큰 절제와 겸양을 바라고 싶다”고 주의를 요구합니다. 칼빈이 제시하는 해석은 많은 군중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때가 바로 축제일로서 큰 군중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때에 그 기적이 행해졌으므로 그로써 그 소문이 더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우리가 바로 보게 된 것과 같이 땅 끝까지 널리 퍼져 나가게 된 것이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가끔 절기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2,5,7,10,12각장). 그래서 그가 행하신 능하신 역사가 보다 널리 알려지고 또 더 많이 모인 (p.69)군중들 속에서 그의 가르치심이 더 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나중에 바울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다는 사실도 보도해준다. 그것은 어떤 신앙적인 입장에서가 아니요 더 큰 군중으로부터 더 많은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행20: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선정하심으로써 그 기적의 효용을 생각하신 것이다. 즉 첫째로 그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더 많은 생각을 기울이게 되었으므로 그 기적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더 널리 화제가 되었으며, 둘째로는 그 소문이 더 먼 지방에까지 퍼져나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햇곡식의 축제일로부터 계산해서 50일째의 날이라 불렀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오순절의 효용성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거스틴은 시내산과 비교해서이고, 칼빈은 단순히 많은 군중을 모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으로 제시합니다.
2절)
성령 강림의 두드러진 현상에 대해서 칼빈은...
첫째, 제자들을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격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은사는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너무도 둔감하여서, 하나님께서 인식되지 않은 채 헛되이 상실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성령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도움이 되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홀연히(suddenly)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며, 자기의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강한 바람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육에 대한 헛된 확신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결코 옳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겸손과 두려움이 없다면 여전히 자신을 의지하고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무관심한 사람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실 것이 없을 것이다.”
성령이 '바람'으로 표현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도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셨으며(요20:22)에스겔의 환상 중에서는 폭풍과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겔1:4). 실상 성령이라는 말 자체가 바람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 이 성령이라고 호칭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위격은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that hypostasis, or person of the Divine essence, which is called the Spirit, is of itself incomprehensible) 성경은 이 바람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은 만물 위에 숨을 뿜어 내시듯이 부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위격성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빈약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 문장에 등장함으로 성령의 위격성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위격성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합니다.
넷째, 혀가 나타난 것(3절)은 이 사건에 한해서 특수하게 생겨난 일이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신 비둘기의 모습이(요1:32)그리스도의 성격과 임무에 합당한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의미된 일에 합당한 형식을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다름은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일에 일종의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에 복음의 설교자들이 한 가지 방언밖에 말하지 못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유대의 한 작은 모퉁이에 한정된 분이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이제까지 전해 받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하여 특수한 언어(방언)를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서 복음을 위한 전진의 길을 갖추어 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고 있다. 악하고 불법한 인류의 의도를 일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언어의 다름이 생겨났을 것인가?(창11:7).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인간들을 일치의 축복으로 불러 모으시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언어를 주셨다. 그러므로 복음과 전파됨이 인간의 언어 혹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언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전파된 복음은 복음이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다섯째, 불(3절) - “주께서는 그들의 음성(사도들의)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또는 이 세상의 허영을 태워버리고 정화시키기 위해서, 불처럼 되어야 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은 단순히 공기를 진동시키는 일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하늘에서 오는 뜨거움으로써 그들에게 채워주는 것이었다.(중략) 주께서는 이 능력을 제자들에게 한 번 성령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주셨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일이다.”
3절)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단수로 바뀐다. 즉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입니다. “누가는 헬라어로 기록했지만 거기에 많은 히브리어의 말투가 섞여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칼빈은 각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지만, 성령의 충만함이 동등하게 임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4절). “각자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에 적당한 정도”로 임하였습니다. 칼빈은 충만에도 정도가 있다고 이해합니다.
4절)
방언의 은사:
칼빈이 이해는 하는 오순절 방언은 한 방언이 각 족속들의 방언으로 들린 것이 아니라(극구 부정하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여러 가지 외국 방언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적의 주체가 120명이지, 듣는 청중이 아니라는 것을 두각 시킵니다. 만약 청중이 다양한 방언으로 알아듣는다면 성령이 청중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Who is God like?]
1) 1절 - 다 같이 함께 모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함께 모인 공동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교회 또한 함께 모여 하나되시길 원하십니다.
2) 2-3절)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보이지 않으신 성령께서 바람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엄위 앞에 엎드리는 것이 은혜를 받은 비결입니다.
3) 각 사람 위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비록 정도의 은사를 주시지만,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전하는 내용은 갖고, 모이는 장소도 같습니다.
4) 성령의 충만함이 개인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은사를 주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에게 분량대로 성령 충만을 주십니다.
5-13절) 방언을 들은 열국의 반응 = 놀람과 당황 vs 조롱
5절)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 경건한 유대인이지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반응은 구분됩니다.
천하의 각국(every nation under heaven)
천하각국에서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보호하셨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들어온 외국인(10절)까지 인도하셔 하나님의 큰 일을 경청하도록 하셨습니다.
6절)
칼빈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방언이 한 방언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방언으로 다시 제시합니다. 비록 사도들은 외국을 여행하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지만, 거침없이 각 자가 라틴말, 희랍말, 아라비아 말로 하나님의 비범한 역사를 선포하였습니다.
11절)
하나님의 큰 일(The wonderful works of God) 칼빈은 사도들의 무지와 무식하지만 하나님의 일들과 하늘의 지혜를 제시함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외국인들은 사도들의 상태를 알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놀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방언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놀람은 좀 더 배우기를 원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하여 깊이 고찰(consideration)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의욕을 가져야 한다.” 경탄(놀람, their amazedness and wondering(12절))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지만,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욕구를 자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12절)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도 사람은 사단의 영향으로, 자신의 무지와 악함으로 조소를 보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 할지라도, 이 기적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엄성이 나타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분명한 현시(대낮과 같은 분명한 일들)에 대한 거부는 인간의 무지와 악함 그리고 맹목적인 광폭임으로 사단에게 넘겨주어 교만을 벌하신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누가가 조롱한 자들을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 생각하거나 소망이 없는 자로 보는 것이 아닌, 오순절의 기적이 대중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 가는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칼빈이 얼마나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는 가에 대한 단편적인 증거입니다. 사단에게 넘겨주어 형벌을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자제합니다. 칼빈은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정으로 접촉함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for very few have been touched with the true feeling of God as often as he hath revealed himself). “Neither is it any marvel; for religion is a rare virtue, and a virtue which few men have; which is, indeed, the beginning of understanding.”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Who is God like?]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현시하여 주십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성육신과 유일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하나님의 현시는 우리의 구원의 이해에 충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성육신과 성령 강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현시합니다.
2) 많은 사람들이 거부할 것을 알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보여주시는 것은 선택된 백성들을 위함입니다. 소수의 택자(very few elected man)를 위한 하나님의 자아겸비를 찬양합니다.
3) 언어를 분열, 인종, 국가의 모든 장벽을 허문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큰 일로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새 시대에는 새 시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마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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