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스크랩] 다빈치 코드 소고(小考)

형람서원 2006. 5. 20. 22:58
728x90
반응형

 

드디어 세계적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by Dan Brown)를 읽었다. 대충대충 읽었지만 일단은 재미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수박을 먹고 부채를 부쳐가며 평상에 누워 심심풀이로 읽기에 제격인 책이었고 또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읽었다.

 

저자가 남자주인공 랭던을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고 표현했듯이 마치 또 다른 한 편의 인디애나 존스 영화를 보는 듯이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마다 공통적으로 평하듯이 너무 김빠지고 어이없는 결론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유명 코메디안 L씨가 평생 동안 “뭔가 보여줄게”라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 보여 준 것이 없듯이…

 

이 책은 그 명성과 판매 부수에 비해 너무 내용이 부실한 책이다. 저자는 중세부터 오랫동안 호사가 내지 몽상가들이 꾸며내고 전해 내려오는 설화와 전설들을 얼기설기 짜깁기해서 보는 이들로 괜히 신비하고 아주 심각한 내용인 양 착각하게끔 교묘하게 농간을 부려 놓았다. 저자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한 정보와 실제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세밀한 묘사 들이 그 농간에 아주 큰 힘을 보태었고, 또 작가로서의 그런 성실함은 높이 사줄만 하다.

 

이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나 쇼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그 후손들이 살아 있으며 그에 대한 기록과 증거가 많았음에도, ‘예수님의 신성(神性)’ 교리를 억지로 성립시키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와 카토릭 당국이 결탁하여 모든 기록과 증거를 말살했다는 것이다. 남녀 두 주인공은 온갖 사건에 뒤얽히고 생명을 던지는 모험을 하면서 끝까지 그 진실을 밝히려 추적했지만, 저자는 픽션으로라도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은 채 흐지부지 결론을 맺어 버렸다.

 

그런 결론을 내린 저자의 의도를 감히 추측해보건대, 첫째 너무 엄청난 내용을 주제로 삼아 가부간 결론을 내리기가 자신도 두려웠든지, 둘째 소설가로서 흔히 산뜻한 결론을 내릴 때 쓰는 기법대로 독자의 상상에 맡기려 했든지, 셋째 전혀 사실에 입각한 내용이 아니고 꾸며낸 것이라 실제로 어떤 결론을 내릴까 자기도 판단이 안 섰든지, 아니면 이 세 가지 전부였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중 두 번째 의도에 저자의 무게 중심이 가장 많이 실린 것 같다. 그리고 그 결론을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에 맡기기 보다는 소설 전반에 걸쳐 아주 교묘한 덫을 쳐놓고 저자가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려 한 것 같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주제가 이 책의 저자 브라운이 처음으로 다뤘거나 고유한 발견이 결코 아니라 그 동안 수도 없는 사람들이 온갖 형태로 발설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어쩌면 진부한 주제를 다룬 이 책이 왜 이전의 어떤 시도보다 더 확실하게 전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지이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완전한 사실이나 진리로 입증이 안 되었지만 자기가 믿고 싶은 가설을 몇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법인데, 그런 가설들을 가능한 그 쪽 방면의 전문가가 나서서 좀 확실하게 변증해주길 원한다. 심지어 누구라도 좋으니 그럴싸한 이유 하나만이라도 대주었으면 싶다. 마치 연애할 때에 상대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아주 사소한 증거라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듯이 말이다. 현진건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연상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쉬운 예를 하나 들면 많은 사람들이 인간 기원에 관해 이성적인 고찰을 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미리부터 진화를 믿고 싶어 한다. 또 그런 의식의 저변에는 창조를 믿으면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싫다는 것이다. 그런 참에 진화론자들이 화석을 동원하고 실험실 데이터를 제시하니까 마치 아주 합리적인 것 같이 생각되어 무조건 믿기로 작정해버리고 창조에 대해선 완고하게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신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 신자들 중(특별히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로서 평범한 인간이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뒷받침 해줄 확실한 증거나 기록이 전혀 없는데도 전문가가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나 논리를 조금이라도 전개해 주면 그 핑계로 예수를 부인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소설 속의 주인공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박식해 보이는 온갖 주장들과 아주 사실감 넘치는 묘사로 인해 사람들의 그 소원을 만족시켜 준 것이다. 앞에서 교묘한 덫을 놓았다고 지적한 그대로다. 말하자면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격이다. 사람들은 안 그래도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를 부인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싶었는데, 거기에다 대놓고 저자 브라운이 “자 이제는 기독교에 대해 괜히 겁먹을 필요 없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라고 말해 준 셈이다.

 

나아가 교묘한 덫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이니까 저자든 독자든 도덕적, 영적 죄책감을 구태여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소설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전부 “그것 다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데 뭐! 나는 그런 것 안 믿어”라고 말하겠지만, 그들 모두 속으로는 “그래 이제 예수를 믿지 않아도 될 또 다른 신빙성 있는 근거를 하나 확보했어!”라고 아주 음흉한 미소를 머금게끔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인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선악과로 인한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가 싫기 때문이다.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십자가의 선언이 싫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역설적 증거가 된다. 죄인이라는 것이 싫으면 의인답게 살든지 죄를 회개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하면 되는데도, 그렇게 할 생각은 전혀 없고 죄인이라고 일러주는 예수를 도리어 죽도록 싫어했고 오늘날의 독자도 바로 그런 심리로 이 책에 열광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 저자는 독자를 뉴에이지 사상에 입각한 여신 숭배로 유도하려는 또 다른 흉계를 책의 곳곳에 숨겨 놓았다. 자연이 최고이며 우주 자체가 신이라는 범신론적, 자연신론적 종교를 옹호하는 뜻을 강력하게 비취고 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필연적으로 전우주를 창조하고 살아 섭리하는 하나님도 부인되며 결국은 모든 것을 인간에서 출발해서 인간으로 종결시키는 인본주의 사상만 드러내게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선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기에 매사는 각자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비신자들이 누군가가 말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던 달콤한 속삭임에 불과하다.   

 

요컨대 이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이런 완악한 독자의 입맛대로 똑 같이 완악한 저자가 맞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가 이 책을 읽으면 비록 결말이 너무 싱겁게 끝났더라도 통쾌한 기분은 느낄 것 같다. 그러나 그 통쾌감은 완전 무장을 한 중과부적의 악당을 채찍 하나로 신나게 무찌르는 인디애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 같은 활약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기를 대신해서 너무나 과감하고도 겁도 없이 부인해 주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박수 치면서 느끼는 대리 만족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너무나 허구였고 또 이미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해 다들 반증된 것들의 재탕일 뿐이다. 간단하게 한두 가지 예만 들면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는 기독교의 주일이 토요일 즉 안식일이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 “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16:1,2) 안식 후 첫날이나, 매주 첫날은 지금의 주일(일요일)을 의미하며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에 모여서 예배 보며 헌금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소설에 따르면 초대 교회 당시 80개가 넘는 진짜 복음서는 다 불태우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는 복음서 네 권을 니케아 총회 때에 조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 예로 든 말씀은 저들 주장대로 하자면 조작된 현재의 4 복음서가 아닌 다른 신약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소설 속의 고고학자, 역사가들의 이야기야말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조작인 것이다. 나아가 쿰란 동굴 속에서 발견 된 사해 사본에 초기의 없어진 오리지널 복음이 들어있다고 했지만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수님 당시의 구약성경 사본이었지 신약이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해 놓은 대로 저자는 어디서 주어들은 단편적 지식을 얼기설기 짜집기하다 보니 도저히 논리가 일관되지 않는다. 그런 허구들을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불신자들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독자들로 마치 사실인 양 느끼도록 한 것을 보면 분명 글 솜씨와 재치는 있다. 그러나 저처럼 대충 읽지 않고 만약 기독교역사에 정통한 분이 차분히 읽으면 그 수도 없는 허점투성이들을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객관성과는 별도로 예수님에 대해 인간이 취할 태도는 따로 있다. 오직 성경대로 믿든지 아니면 아예 부인하든지 둘 중 하나다. 성경, 특별히 복음서 외에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힐 자료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C. S. 루이스의 말대로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실제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과대 망상증 내지는 마술을 구사하는 미친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만약에 정말 예수님이 결혼하였고 자녀들이 있었고, 콘스탄틴 황제와 당시 교회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결탁하여 거짓을 조장했다면 과연 그것이 1600-2000여 년간이나 인류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진리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하는 법이며 반드시 진리 편에 서서 그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또 그런 사람은 자기 목숨과 바꾸더라도 진리를 만천하에 공개하기를 원한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고 중얼거렸고 그것을 옆에서 분명하게 들은 사람이 있었듯이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 때문이다. 또 그 사실이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라는 주님 오시기 700여 년 전의 예언과 그대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 그 예언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와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사해 사본에서 똑 같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복음서의 역사적 객관성도 어쩌면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다. 예수가 구세주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여 전적으로 타락했던 한 죄인이 성경을 읽고 죽었다 되살아나 그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신구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신자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신약성경에서 최고 핵심 되는 부분과 또 가장 많은 책을 지은 사도 바울이 그렇지 않은가? 그는 예수님 사후에 살아 역사하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체험과 하나님의 계시를 본 대로 들은 대로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지, 그의 책 어디에도 단 하나의 조작, 가식, 허위라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의 역사적 객관적 정체성에 대해선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증거는 따로 없다.

 

세상은 거대한 영적 전투장으로 변한지 오래다. 아니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랬다. 우주를 창조한 절대자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그 앞에 피조물 인간으로 서겠다는 측과 우주는 단지 태초부터 물질로 존재했을 뿐이기에 모든 것은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측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후자 측에서도 사랑, 정의, 소망 등, 선하고도 그럴싸한 가치와 목표를 내세운다. 절대로 죄악으로 치닫자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더욱 교묘하게 광명한 천사인양 위장한다. 정말 신자들이 깨어서 기도하여 영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겠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0-12)

 

소설을 다 읽고 나니까 한 마디로 기대와 달리 너무 시시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흐지부지하게 결론을 맺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엉터리를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모습이 그랬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이 불쌍했다. 독자들도 그렇고 저자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저자 브라운도 명성과 부에만 눈이 어두워 자기가 세상 모든 사람 앞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 뱉어 놓은 이야기가 얼마나 엄청나고 심각한 내용인지 몰랐을 수 있다. 그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단에게 놀아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알지 못해 아직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죄악과 허물과 상처를 안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보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안타깝기만 하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http://www.nosuchjesus.com

 

(8/9/2005 작성한 것임)

출처 : 미국판 예수 이야기
글쓴이 : shin park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