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 2. 신인식론과 계시론 (제1권 3장 - 4장)

형람서원 2006. 3. 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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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기독교강요/ 신인식론과 계시론(2)  

2. 신인식론과 계시론

(제1권 3장 - 4장)





제3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성격

인간의 마음 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논란할 어떤 것도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된다. 인간은 본의 아니게 다른 피조물을 자기 이상으로 높이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예배 드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 사실은 신적 존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거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 증거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타고난 성격을 변경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사실 이 타고난 성격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교만을 잊어버리고 가장 열등한 것에 대해서 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게 될 때 변화되는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적 발명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순박한 민중들을 속박하기 위해 교활하고 교묘한 간계로 종교를 창안해 내고, 이 하나님 예배를 만들어 낸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속박시키기 위해, 교활한 사람들이 종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작해 내서 이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존경심을 일으키며,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영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라는 명목으로 소박한 민중들을 교활하게 속인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고,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좋든 싫든 자기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항상 어렴풋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보다 더 대담하고 방자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자 그 보다 더 비참하게 떤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가 공공연히 멸시하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또한 칼리굴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볼수 있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 : 36 참조). 이렇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오겠는가?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가끔 이러한 공포는 잠시 동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즉시 돌아와서 새로운 공격을 취한다. 그들이 만일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나마 놓이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 술에 취했거나 흥분한 사람의 수면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섭고 떨리는 꿈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자,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실제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신념은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골수에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사악한 자들의 완고함 자체가 바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디아고라스(Diagoras)와 그 동료들은 모든 시대가 믿어 오던 종교들을 희롱하였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하늘나라의 심판을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소적인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벌레가 쇠를 부식시키는 어떤 무엇보다도 더 예리하게 그 속을 파먹고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잘못된 것들이 없어지며, 종교심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며 개량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이제 뒤에서도 곧 말하겠지만) 세상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없애버리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파괴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열심히 만들어낸 마음의 그 완고함이 다 쇠약해지더라도 그들이 강하게 말살하고자 했던 그 신의 인식은 도리어 무성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싹트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은 학교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터득하며 많은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잊어버리려고 할지라도 본성 그 자체가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우기 만약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철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혼의 최고 행복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그리고 이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플라톤(Platon)이 자주 가르친 것도 다만 그런 의미의 것이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추구하게 된다.





제4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1. 미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우기 그것을 성숙하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 : 3 참조). 더우기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 때 어떤 사람들이 잘못으로 미신에 빠진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뜻은 그들의 단순함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을 내디든지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함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 : 22). 그는 또한 바로 앞 절에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 : 21)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공허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부언하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에서뿐만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 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 1, 53 : 1)라고 말한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부여받았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 본질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것을 운명에 맡기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마 13 : 14-15, 사 6 : 9-10, 시 17 : 10 참조).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 : 1)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하였다(시 10 : 11).

비록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딤후 2 : 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식에서 몰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덕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미신에 대하여 버릇처럼 변명한 그 공허한 변론이 전복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 또는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또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다고 입증하신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들은 멸시 또는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에 알맞는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 : 8)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엡 2 : 12)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을 생각하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을 우상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말과 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한다.



4. 위선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할 수 없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 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Statius)의 말은7 이런 종류의 무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 잘 들어맞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해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 심판대가 무너지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그들은 심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신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들을 부패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악에 악을 더하고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을 성령의 고비로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런 혼란한 지식과 종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직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그러나 위선자들(hypocrites)은 이러한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것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 데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신뢰한다. 마침내 그들은 그러한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을 얽어맴으로써 한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이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마침내는 꺼지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앗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나의 지금의 주장은 보다 더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안할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희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에게 엄습해 오면 그들은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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