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율법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할까?"

형람서원 2025. 1. 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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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할까?"

고경태 박사(형람서원)

율법을 지켜야 할까? 지키지 않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필자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문(愚問)은 함정이고, 미로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문에 들어가지 않고, 산파술로 타자의 무지를 깨우쳤다.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해서 무지를 각성시켰다. 우문에 답하는 순간 같은 우문에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Honest question and Honest answer)"을 제언했다. 쉐퍼 박사는 우문이 아닌 정직 질문을 전제로 답변을 추구한 것이다. "거짓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을 한다는 것은 말은 되지만 성립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답변하려고 노력하지만, 미로나 함정으로 인도하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 '율법'에 대한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 율법폐기론 논쟁(Antinomian Controversy)은 기독교 사회(Christendom)에서 발생한 논쟁이다. 교황주의의 통제를 벗어난 개혁 교회 진영에서 피하지 못하고 발생했다. 그것은 신자의 개인의 자유, 양심과 행동의 주체가 개인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에서는 행동의 주체가 교회에 예속되어 있었다.

▶ 율법폐기(abrogation)와 율법완성(finish and fulfill)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율법폐기론은 초대교회의 이단으로 분류된 말시온(Marcion, 구약성경 부정), 몬타누스주의(Montanus, 성경을 부정하고 성령강조, 도덕폐기론), 마니교(Manichaismus, 예언자 마니)에게서 찾을 수 있다. 율법폐기론은 양극단이 존재하는데, 엄격한 금욕과 절제 그리고 열정과 방종이다. 엄격한 금욕과 절제라는 행동 양상으로는 율법폐기론을 규정할 수 없다. 몬타누스주의와 열정과 성령 그리고 마니교의 엄격과 금욕이 융합되어도 율법폐기론이 될 것이다. 참고로 터둘리안은 말시온을 거부했는데(Against Marcion), 몬타누스주의(Montanism)에는 동의했다. 터둘리안은 몬타니즘의 엄격한 절제와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일시 합류했다고 한다. 엄격한 규율을 강조해도 성경 해석에 근거한 복음 선포를 도외시한 행동이라면 율법폐기론적 체계이다.

루터는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 1494-1566)를 율법폐기론자로 판단했다. 칼빈은 당시의 율법폐기론자들인 리버틴파(방종파, the Libertines)의 근원을 말시온과 마니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파와 루터파는 리버틴파와 아그리콜라를 율법폐기론으로 규정했다.

율법폐기론은 율법에 다른 것(성령, 엄격한 절제, 금욕, 사랑)을 대치시키면서 율법 준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율법폐기론에는 신의 의지의 절대성에 부착한 도덕주의(기계적 구원관)와 신령주의(과격한 성령주의) 그리고 방종주의(회개의 필요성 부정)가 공존한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은 폐기와 다른 개념이다.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5:17-20, 롬 10:4).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도 율법의 총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을 알았다(마 22:34-46, 막 12:28-34, 눅 10:27). 예수께서 세우신 새계명에서 계명을 '사랑'으로 세우셨다(요 13:34).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자의 의도를 폐기하는 것이다.

▶ "율법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할까?"

위 문장은 17-18세기 개혁파와 루터파 진영에서 신율법주의(Neo-Nomianism, Moderates)와 무율법주의(반율법주의, Antinomianism)등으로 심각하게 논의가 되었지만 합당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합의는 신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부당하다고 결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합의가 되지 못한 것은 사회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이 중지된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에게 율법에 대한 관점은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과격한 이단은 국가를 부정하면서도 그 국가의 보호 아래서 성장하고 있다. 국가의 관용력은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관용의 시대가 되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에서 반대측을 향해서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로 단정했지만, 정죄를 당하는 측에서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를 향해서 반대측 견해를 주장했다. 매로우맨들은 무율법주의로 비판받았고,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측은 신율법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매로우맨들이 무율법주의일? 총회가 신율법주의일까? 그런데 매로우맨들은 자신을 무율법주의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총회도 자신들을 신율법주의라고 인정하지않았다. 알미니안(Arminian)에게 신율법주의(Neo-Nomianism)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인정하지않을 것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m)에게 무율법주의자라고 주장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창출된 어휘로 판단할 수 있다.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먼저 "율법의 완성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으로 보이는것은 사도행전 1:7-8이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질문하는 베드로 사도에게(6절),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고 단언하셨다(7절). 그리고 "성령임함"을 말씀하셨고, 성령이 임하면 "나의 증인"으로,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이를 것을 말씀하셨다. 율법 완성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너희에게 말하바를 알리시라(요 16:13)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자녀들은 주께서 보내신 성령을 따라서 말하면 된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모인 순례자들 앞에 서서 당신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하여 선포했다. 사도의 선언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이고, 당신들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7)고 선포했다. 복음선포로 이루어진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모이기를 힘쓰며, 말씀과 성찬, 구제에 힘썼다.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교회를 주께서 흡으셔서 각 처소로 흡으셨고 안디옥에 교회가 이루어져 예루살렘에서 바나바를보내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었다.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한 교회를 이루었다. 사도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유효하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기본 이해이다. 세상 왕국 통치는 세속왕이 하고, 교회의 질서는 교회 사역자가 세우며, 복음 전파는 교회 고유 직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문을 떠나지 못한다. 사람의 생활양식은 법(法), 규범(規範)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유신론자라는 역설이 있듯이, 무율법주의자도 율법주의자이다. 그것은 무율법주의가 방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생활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람은 법을 떠나서 결코 살 수 없다. 법은 인격이기 때문에, 법에 저촉이 되면 인격손상을 느끼며 불쾌감을 받는다. 사람은 물리적인 충격보다 정신적인 충격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인간이 규범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규범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규범대로 사는 것이라는 법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롬 8:2)"이라고 했다. 그러나 육체로는 율법의 굴레를 떠나지 못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는 황당한 모습이 있다. 교통경찰이 과속을 단속하려면 단속한다고 예고해야 한다. 몰래 교통단속을 하는 것이 위반이라는 것이다. 100Km로 규정된 도로에서 교통경찰은 도로 어디에서나 속도단속 할 수 없다. 반드시 예시하고 단속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모습이다.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자기를 예속하지 못하게 살려는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법치의 맹점이다.  우리는 최근에(2016년) 암행순찰차 제도를 만들었었다. 그것은 '암행'이라는 제도로 '예고'에 대한 속박을 벗어난 것이다. 100Km 제한속도에서는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법을 지켜야 한다. 아직도 교통단속 카메라에는 단속 예고 표시가 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사람에게 교통순찰차, 단속카메가가 필요없다. 단속을 피해서 운전하면, 법단속망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범법자도 아니며 범칙금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 준수는 이런 세속법 준수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율법을 지키면 벌금이 부과되지 않은 것,안전한 교통 운행 등의 혜택이 아니라, 율법제정자가 보이는 것이다. 율법제정자를 바라보면 이웃,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율법제정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율법제정자를 알고 이웃을 알게 된다.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여 지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사도의 가르침을 계속하는 사역자의 복음 선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킨다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율법을 사랑한다 즉 율법을 주신 이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 율법의 내용은 양심에 있다. 하나님께 할례받은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하고, 할례받지 않은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리로 반응한다. 할례 받지 않은 양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비극인데, 그들은 불법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할례받은 양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는 도저히 중생자라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중생된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가시적인 생활 양상으로 인간을 단정하는 것을 금한다. 교회는 큰 죄악에 있는 중생자를 출교시킬 수 있지만, 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단죄하는 신성모독을 피하기 위해서 겸손과 인내를 가져야 한다.

▶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할까?"

우문을 던지지 말자. 우문의 함정에 들어가지도 말자. 교회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의 이름을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도 교회의 임무를 수행한다.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있는데, 성경에 있는(행 1:8) 예수 증인(Jesus witnesses)은 왜 없는가?(행 5:32)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되지 않을까? 사도 바울처럼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를 증거하자. 그리고 주 예수께서 증거되고 전파될 때에 기뻐하자. 사도의 후예들은 사도들처럼 오직 주 예수를 믿으며 증거하고 전파하기를 힘쓴다. 율법을 지켜야할까? 고민이 불필요하지 않겠지만, 우선 사안과 비교될 범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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