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분노하기 때문에 정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다. 그래서 불의를 보면 분노해야 한다(감정). 분노는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불의한 사건을 불의로 인지하는 것은 '지식'이고, 그 분노된 감정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의지'이다. 우리나라는 감정과 의지에서는 너무나 탁월한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식의 면에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이미 문해력의 난조가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지식 분야에서 취약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일제강점기 36년에 상당히 왜곡되었고, 해방 후 급진적인 경제화로 체계적인 지식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적 사유 체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 체계 위에 서양식 지식을 교육 체계로 받았다. 그래서 교육의 사대주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주체의식이나 인권도 외부 사상이지 고유한 한국적 사상이 아니다. 고유한 한국의 인간존중 체계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민족의 의식화가 1970년대 독재 체계를 순응하거나 존중하는 측과 그를 반대하는 체계로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독재가 준 유익으로 한국 사회는 풍요롭다. 두 함수의 부조화가 현재 우리 의식에 좋지 않은 사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불의인 독재에 항거해야 하는데, 독재가 준 사과에 독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산주의가 제공하는 사과에 독이 있다. 그래서 두 세력이 매우 치열하게 대립되는 것 같다. 독재는 불의하다. 너가 주려는 사과에는 독이 있다.
우리는 불의에 동의하면 안 된다. 그러나 불의에 저항하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프레임도 정당하지 않다. 불의에 저항헤서 더 악한 불의로 이끌 확률은 그렇게 낮지 않다. 불의를 전복시키고 더 큰 불의로 갈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것은 역사의 기본 흐름이다. 다음세대에 더 좋은 세력이 등장할 것이라는 상상은 역사에 대한 무지이다.
사회가 지날 수록 더 좋은 세력이 등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도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분노의 에너지가 클 때에는 더 좋은 세력이 등장할 수 없다. 분노의 에너지의 집약체는 상식적이고 합법적인 사고를 잠재시키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때에 "적폐척결"의 구호를 국민이 수용했다. 적폐는 척결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척결은 불법인데, 불법은 군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기관에서 결정한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3.24 – 1957.11.3)는 히틀러의 파시즘에 분노했다고 한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대중이 산출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라이히는 파시즘을 양산시킨 사회에 분노하고, 그 사회를 붕괴시킬 체계를 구상했을까? 그가 제안한 <성혁명>의 파괴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파시즘에 분노한 라이히가 구상시킨 성혁명 사회는 파시즘보다 더 무섭게 민중을 흥분시키고 병들게하고 좌절시키고 있다.
우리는 불의를 보고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자제하여, 신중한 판단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는 파시즘도 불의이고, 성혁명적 사유체계도 불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싫기 때문에 성혁명체계를 선택할 수 없고, 성혁명체계가 싫기 때문에 파시즘을 선택할 수도 없다. 자기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며 굳건한 의식체계를 구축하며 연대하며 토론하며 의식을 확장해야 한다. 나의 의식은 무엇인가? 나의 의식은 가정이 온전하게 형성되며, 개인의 역량이 걍화되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일익을 감당함으로 인격이 존중받으며 활동하는 사회 구조를 상상한다.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 최선은 자기의식이고 자기정체성이다. 자기의식의 실현체를 찾지 못한 차선으로 정치를 선택한다. 최선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사회에는 다양한 의식과 사상이 공존해야 하며, 그러한 의식을 통합하고 더 나은 의식을 만들기 위한 투자와 사회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정치인과 학자는 그러한 일을 해야 한다. 권력의 한 권자를 얻기 위해 정치인과 학자가 함께 맹목적 정치 쟁투에 국민의 양심과 에너지를 소요시키는 것은 비생산적인 것을 떠나 파괴적인 일이다. 그곳에 종교인까지 투입되어 맹목성을 증진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형람서원 고경태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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