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사랑봉사회

경렬사와 명옥헌원림

형람서원 2024. 11. 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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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렬사와 무등산분청사기박물관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무등산분청사기전시관이 수리 문제로 임시휴관상태여서 명옥헌원림으로 순례했습니다.

정지(鄭地, 1347~1391)

고려시대 무신. 본관 하동(河東). 초명 준제(准提). 시호 경렬(景烈). 1374년(공민왕 23) 중량장으로서 왜적을 평정할 계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안무사가 되고, 1377년(우왕 3)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에 침입한 왜적을 토벌. 다음해 영광·광주·담양 등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여 전라도순문사가 되고, 1380년 원수가 되어 배극렴 등과 사근내역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1381년 밀직으로 해도원수가 되어, 이듬해 남원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고, 1383년 남해 관음포로 쳐들어온 왜적을 대파하였고 문하부지사로서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가 되고, 1384년(우왕 10) 문하평리를 지냈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조하고, 이후 왜적이 창궐하자 양광·전라·경상도 도절제체찰사가 되어 공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김저의 옥사 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해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가 홍수로 석방되었다. 이듬해 개성부판사가 되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이곳 경열사(景烈祠)는 고려말에 왜구를 무찔러 나라를 지킨 명장 경열공 정지 장군(1847~1391)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및 묘역(墓域)이다. * 사우, 사당, 서원의 차이. 사우는 문중 선현을 모신 사당으로 교육보다는 향사(鄕祀) 기능이 주였다. 사우는 충절, 업적에 대한 기림이고 서원은 인재양성, 가르침에 대한 기림이다. * 안무사按撫使, 고려, 조선시대에 지방 관리를 감찰하고 백성을 안무하는 임시관직.

정지 장군은 1347년(충목왕 3)에 나주에서 정3품 판군시시사 정리의 아들로 출생하여, 1365년(공민왕 14)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1366년(공민왕 1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중랑장이 되어 수군의 현책을 올려 왕의 신임을 받아 전라도 안무사(全羅道 按撫使) 로 특명되고, 1377년(우왕 3년)에 예의판서로서 순천 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쳐부수었다. 1382년(우왕 8년)에 해도원수가 되어 진포에 침입한 적들을 소탕하고 전선(戰船)을 건조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금대와 백금 50냥을 받았다. 이후 수차에 걸쳐 왜구를 물리치고 특히 남해 관음포(觀音浦)의 대승첩을 거두어 우리 해군의 위용을 과시한 공(피)으로 지문하부사 해도원수 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 처치사 문하평리를 역임하였다.

1388년 이성계와 같이 요동정벌을 할 때 안주도 도원수출서 출전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그 틈을 타서 왜구가 남원까지 쳐들어오므로 양광. 전라. 경상도 도철제 제찰사가 되어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9년(창왕 1년)에 우왕 복위사건에서 김저등과 관련되었다 하여 경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리고, 또 다시 윤이, 이초 등의 옥사에 연좌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면죄되었다.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어 광주에 있었는데 판개성부사에 소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391년(공양왕 3년) 향년 45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1644년(인조 22년)에 광주에 경열사를 창건하여 향사하다가 1871년(고종 8년)에 훼절되었다. 현재의 사역은 1979년부터 3개년 간의 사업으로 이 고장 호국선현의 유적지로 정화된 곳이다.

공의 유물로는 보물 제336호 정지 장군 갑웃이 현존한다. - 경열사 소개의 글 -

경열사(景烈祠)는 고려 말 서남해안 왜구 섬멸에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 정지(鄭地)장군을 향사하는 사우이다. 경열공 정지의 본관은 하동, 호는 퇴암(退菴), 시호는 경열(景烈)이다. 1347년 지금의 나주 문평 죽곡에서 태어나 광주 평방에서 살았다. 19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말 왜구가 서남해안 고을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자주 괴롭혔는데, 이때 정지는 1374년(공민왕 23)에 수군 창설 계획이 담긴 ‘왜구토벌책과 토적책 10조’를 왕에게 올리는 등 우리 역사 최초로 수군창설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전라도 안무사와 왜인추포만호, 순천도병마사, 해도원수로 있는 동안 서남해안을 침범한 왜구를 수없이 섬멸했다. 특히 1383년 남해 관음포에서 전함 47척으로 왜적 120척을 격파한 것은 해전사에 남을 대첩이었다. 최영의 홍산대첩, 해도원수 나세와 최무선과 심덕부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한 4대첩 중 하나이다. 1384년(우왕 10)에는 문하평리(종2품)이 되고, 1387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이성계 휘하 안주도 도원수로 출전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김저의 옥사와 윤이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하자 정쟁에 싫증을 느낀 정지장군은 고향 광주로 내려와 머물다가 말년에 개성판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391년 45세로 별세하였다. 경열사는 1644년(인조 22) 광주목의 편방(현 동구 동명로 14번길 19-4)에 있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이곳에는 1871년 세운 경열사 유허비만 남아있었다. 1921년 나주 노안면 금안리에 사당을 건립해 경열사라고 하다가 1981년 지금의 북구 경열사길 46에 복원했다. 경열사는 처음에는 정지 장군만 모시다가 충무공 정충신, 설강 류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 8현을 향사하고 있다. 경내에는 ‘경열공 정지장군 사적비’, 동명동에서 옮겨온 ‘경열사 유허비’, 예장석묘(광주시기념물 제2호), 충의문(외삼문), 경앙문(내삼문), 유물관, 복원기실비, 홍살문 등이 있다. 그리고 정지장군 갑옷(보물 제336호)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중이다. 경열로는 경열공 정지장군의 시호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서구 농성광장에서 돌고개, 양동시장, 양유교, 구 광주고속터미널을 거쳐 광주역까지의 도로이다.

출처 전남의 서원⋅사우 2, 목포대박물관⋅전라남도, 1989

광주의 문화유적, 광주시⋅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0

광주역사 바로보기, 광주광역시, 2014

출처: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http://gjstory.or.kr/)

경렬사 입구에서 본 늦가을 오후 하늘이 너무나 좋습니다~~

경렬사 사당에 걸려진 정지 장군 초상화...

고려 왜구 4대 전쟁

1376년(우왕 2년) 최영 장군, 홍산 전투((鴻山大捷. 부여군)

1380년(우왕 6년) 최무선 장군, 진포 전투

1380년(우왕 6년) 이성계 장군, 황산 대첩

1383년(우왕 9년) 정지 장군, 관음포전투(觀音浦戰鬪) 남해군 * 관음포는 남해군 고현면 북쪽 바닷가에 있는 포구로 노량이다.

정지 장군의 묘지는 "예장석묘"라고 소개한다(鄭地將軍 禮葬石墓). 묘비는 1808년 세운 것이다. 사다리꼴의 문묘에 석축으로 구성된 석묘이다. 남쪽에 예장석묘는 정지 장군의 묘지라고 한다. '충민사'는 조선시대의 무관 전상의(1575~1627)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고, 예장석묘가 있는데, 사다리꼴이 아닌 둥근봉분이다.

 

 

나주경렬사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금남 정충신(경렬공 9대손)에 대한 이야기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忠武公 錦南君 鄭忠信, 1576-1636)... 광주 금남로는 무관 정충신의 작호이기도 하고, 문관 최부의 작호이기도 하다. 최부(탐진(耽津 崔溥, 1454년~1504년) 의 호는 금남(錦南)이다. 정충신은 이순신 장군처럼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정충신은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했다. 진주성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서 장개를 품에 안고 진주에서 의주까지 보고했다고 한다. 정유재란(1597년)과 이괄의 난(1623년), 인조반정(1624년), 정묘호란(1627년) 등 국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살아생전에 선조로부터 '금남군'이라는 작호를, 사후 49년 만인 숙종대에는 임진왜란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시대에 44년 무장의 경력으로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정충신은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괄의 난을 평정하면서 공적(1등 진무공신)으로 이괄의 토지가 있는 서산의 땅을 받아, 정충신의 후손들이 서산에 있다고 한다. 진충사(振忠祠)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진충사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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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우(祠宇), 사당.

사우(祠宇) 1) 사우의 전개 우리나라에 사우(祠宇)․사당(祠堂) 제도가 유입되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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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토마을의 유래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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