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믿음’에 대한 바른 고찰(考察)
최 낙 범 박 사(총신 교수, 새순교회)
오늘의 한국교회는 천만이 넘는 신자를 확보했다며 자랑하고, 교회 건물이 크고 아름답다며 은근히 자랑한다. 또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믿음'이 동일한가라는 질문 앞에는 주저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단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또 같은 교단이라고 해도 교회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교회안의 신자들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차이는 바른 진리를 보존하거나 계승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진리를 전달하는 자와 전달을 받는 자가 동일한 진리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그 진리의 내용을 수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동일한 진리에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갖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참 믿음을 갖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구원 얻는 믿음이 가능하고 의롭게 되는 믿음이 가능하며, 바른 신앙생활과 교회생활도 가능하다.
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유한한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나 경험, 또 변화무쌍한 세상 환경이나 상황에 뿌리를 두면 결코 안 된다. 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이 해야 될 위대한 결단인 믿음의 문제를 성경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고찰하므로 믿음의 동질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위대한 결단인 믿음의 개념은 무엇인가? 어떤 믿음이 가장 위대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그런 믿음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믿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듭난 자가 복음을 듣고 의식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통회하고 그 죄를 끊어 버린 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만을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통회하고 그 죄를 끊어 버린다는 의미는 옛사람으로서의 삶을 청산한다는 것이다(회개), 또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만을 섬기며 산다는 의미는 새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신앙).
물론 회개와 믿음이 복음을 제시받았을 때 거듭남처럼 잠재의식이 아니라 의식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것은 거듭났음을 객관적으로 입증케 하는 바른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믿음이 성령의 적극적인 일이기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그만을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하므로 새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믿음이 중요한 것은 믿음이 하나님과 관계회복과 함께 칭의, 수양, 성화, 성도의 견인 등 구원의 전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인간(죄인)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령의 감동 속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전 인격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어떤 이는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나와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보고 자연(animism, shamanism-돌, 나무, 태양, 짐승, 미신 등)을 믿고 산다. 어떤 이는 사람이 자연의 지배를 받고 살기 보다는 고상한 아이디어나 순수한 이념(pure idea)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고 이념, 철학 사상, 과학을 믿고 산다. 어떤 이는 타고난 운명을 믿고 살고, 어떤 이는 삶의 문제해결이 수행이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산다. 어떤 이는 돈, 물질, 명예, 권력만 있으면 된다고 보고 그것만을 전적으로 믿고 산다.
하지만 이것들은 믿음의 바른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이 죽음의 노예가 되므로 불안한 나머지 그것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신격화한 인간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믿음의 대상은 누군가? 믿음의 바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3:16~17;행16:31).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이 지은 죄가 인간끼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법률적인 죄에 앞서,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본질적인 죄인데, 이를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 과정을 보자.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해 공의를 발동하므로 그의 진노를 죄인들에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인간대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진노를 퍼 부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말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을 정하셨다. 그것은 곧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자신의 진노를 받고 죽게 하는 것이다(롬5:9).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 그러니까 불경건의 죄와 불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롬1:18~19)를 대신 받으므로 하나님을 진정시킨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에, 이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진노 대신에 그의 사랑을 발동하사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죄를 씻음 받고 죄의 결과인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다(롬5:8~10; 요일4:9). 더 나아가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놓여 있던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이 달리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 기본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할까? 그 내용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새 인류의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이다(롬6:3~4). 따라서 그에게 연합된 우리도 죽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었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짓게 하는 우리의 옛 사람(혹은 옛 자아)이 처리되고, 옛 시대가 마감되었다는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현장에 있지 않았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옛 사람이 죽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옛사람과 옛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새 인류의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연합된 우리도 살아난 것이다(롬6:5). 그 결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므로 아담의 죄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가득하고 죽음이 가득한 세대가운데 새 생명이 도입되었음을 뜻한다. 또 시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므로 옛 시대 가운데 새 시대가 도입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의미는 예수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이 도입되고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도입되었다는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현장에 있지 않았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부활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새 생명과 새 시대를 도입하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믿음의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즉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내가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자연 이성으로 분석하고 판단함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두 가지를 통해서 믿을 수 있다.
하나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사건임을 믿을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에게 신의식이 있어도 그것이 계시에 접촉되지 않으면 믿음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한한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말씀을 보고 들으며 그것을 묵상할 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사건에 대한 믿음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하사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사건임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롬10:17).
또 하나는 중생이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을 위한 역사적 사건임을 믿을 수 있다. 자연이성은 자기 입맛대로 성경계시를 해석하고 판단하므로 자기의 합리성에 맞추기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비판하고 거부한다. 하지만 중생이성은 그렇지 않다. 중생이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이성이기에 성경계시에 따라 사고하고 거기에 순종한다. 따라서 중생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인간 자신을 위한 구원 사건으로 알고 그것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죽으심을 알고, 그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깨달으며, 과거에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죄악의 길로 갔던 자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신뢰하며 하나님백성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게 된다.
믿음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이 죄를 씻음 받고 예수님의 의를 덧입으므로 의인이 되고(롬3:26,28,갈2:16) 하나님의 자녀(엡1:5, 갈4:4~6;3:26,29, 요1:12~13)가 되므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 속에 예수를 믿음으로 다음과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첫째, 화평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진노를 받으므로 원수관계에서 화목관계로 전환되었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5:2)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과 원수관계였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구속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2~3)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주님의 영광을 보길 고대하면서 그것을 즐거워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환난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좋은 예를 보자.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바울이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엎드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그는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 후 그의 인생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삶으로 변화되었다(행9:1~31). 이 사건은 인격적인 믿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바울에 이어 초대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어거스틴이다. 그는 십대부터 동거를 시작하여 사생아를 낳는 등 쾌락에 빠져 죄악 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라는 음성을 듣고 거실에 있던 로마서13:13~14절 말씀을 보게 되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보는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초대교회지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죤 칼빈(1509.7.10-1564.5.27)이다. 그는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길을 독일에서 지폈다면, 그 불길을 전 유럽에 확산시킨 사람이다. 또 그는 기독교진리를 ‘기독교 강요’를 통해 집대성한 신학자로서 세계기독교회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바울과 어거스틴처럼 극적으로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가장 강력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에서 인격적인 믿음은 때와 방법에서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는 참 믿음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각자 자신을 진단하고 답해야 한다. 이때 바울, 어거스틴, 죤 칼빈처럼 인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직분을 갖고 많은 봉사를 해도 아직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는 참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만약 자신의 믿음이 가짜믿음이라고 진단이 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끊어 버리는 결단인 회개부터 빨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위대한 결단을 빨리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구원의 은총이, 의로움(칭의)의 은총이, 하나님 자녀의 은총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은총이 임하는 거룩한 삶이 될 것이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Th.M) 미, Kernel university 대학원졸업 (조직신학박사,Th.D) 총신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