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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

형람서원 2024. 5. 7.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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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

고경태 목사(한국성경연구원)

기사입력 2016-02-10 오전 10:35:00 | 최종수정 2016-02-11 오전 11:05:46

서철원 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목사들을 향해서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를 따라하도록 한다. 목사들에게 좀 황당한 주문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정길 원로목사도 한국 교회의 목사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하였으니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통상 믿음은 주 예수의 은혜로 믿기 때문에 수동적이다. 정확한 표현은 “나는 예수님을 은혜로 믿었습니다.”는 과거형이거나 수동형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믿어졌습니다.”라는 비문법적 표현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그래서 설교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하는데, 수동형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전달자의 인격이 수반되지 않는 것이다. 설교에서는 반드시 전달자의 지식과 인격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달자가 수동형으로 전달하면 겸손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의 책임성은 빠지게 된다. 자신이 복음전달자는 아닌 것이다. 복음 전달자는 자신의 지식과 인격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주체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비록 수동으로 복음 지식이 내게 있지만 그것은 나의 지식이고 교회의 지식이기 때문에, 교회의 직원인 복음 전달자는 반드시 주체 용어인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세례 등 임직 선언에서 반드시 주체 표현을 하도록 예배모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주체 표현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담대하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일, 매순간마다 반복하여 고백하라면 마치 주문처럼 느낄 수도 있다. 주문과 고백은 전혀 다르다. 주문에는 대상과 주체가 빠지고 문장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백에는 대상과 주체를 명확하게 하려는 행동이다. 그래서 주체(나)와 대상(예수)가 명료하도록 한다. 믿음의 대상을 명료하게 세우는 것이 믿음 정진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길에서 믿음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이 사람인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 도움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 도움을 망각한 배은망덕도 있다. 그래서 선인(先人)들은 죽어서도 은혜를 갚는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을 가르쳤다. 생존을 위해서 배신이 난무한 세상에서 죽어서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과 죄사함을 주신 구속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제종교와 철학에서는 사람의 근본을 수 없이 탐구하지만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만은 사람의 근본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확정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은 주체이다. 사람은 창조주께서 주신 주체로 산다. 주체는 인격을 갖고 있는 자기결정체이다. 인격은 반드시 자기 지식을 말해서 자기 의지를 표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이 말로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 지식은 반복하면 대상과 주체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고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주문을 반복하면 새로운 지식이 생기기도 하고, 또 현문현답, 우문현답, 현문우답?도 가능한 ‘선문답(禪問答)’이 있기도 한다. 선문답에서는 확정적인 대상이나 주체가 없는 광활하게 펼쳐진 곳에서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치 크고 놀라운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대상(나도 없고 창조주도 없고)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움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교회에서 성도에게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훈련시킨다. 그것은 분노가 일어날 때, 걱정이 있을 때 하라고 한다. 위기 모면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분노의 대상이나 걱정의 내용에 가려서 믿음의 대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을 밝히 볼 수 있도록 믿음 고백을 훈련시킨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인 예수께서 창조의 대권과 구속의 권능으로 돌보고 있음을 알고, 어려운 난관을 이겨나가도록 한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 예수께서 돌봄에 대한 확신을 갖고서 정진하도록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은 쉽게 분노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쉽다. 그 때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를 주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으면 상당한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소리에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입술에 나는 복음으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복음 사역자는 동료나 스스로 위로를 받지 않으면 타락을 피할 수 없다. 복음 사역자의 가족은 부양자지 위로자는 아니다. 그런데 복음 사역자가 가족에 의지를 하는 순간에 침체와 타락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복음 사역자는 복음을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전해서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사역자는 자기 신앙 고백의 힘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체 인간으로 복음을 전한다. 아타나시우스처럼 천하만민이 복음을 거부하고 타락해도 오직 복음을 보수하고 전하기에 전념할 수 있다. 주체 인간이 되지 않으면 시류에 편승해야 하고 당을 지어야만 생존하고 안위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의 백성은 땅의 양식이 아닌 육의 이익이 아닌 하늘 양식과 영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하늘 시민이다. 복음 전도자는 가장 앞서서 하늘 시민을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는 사람이다. 복음 전도자로서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교우들에게도 예수 믿음을 고백하도록 훈련시킨다.

서철원 박사님은 예수 믿음 고백을 요한일서 1:7-10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서 박사님은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데, 그 죄는 원죄뿐만 아니라 지을 죄에 대한 피함의 길로도 제시하였다. “내가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생명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죄를 피할 고백이기도 하다. 죄를 씻기 위한 고백이기도 하고, 죄를 짓기 않기 위한 고백이기도 한다. 제종교는 기복(祈福)을 위한 종교행위이지만, 기독교는 죄의 제거와 죄의 억제를 목표로 하는 거룩한 종교이다. 제종교는 거룩을 세워서 현세의 기복을 목표로 하지만, 기독교를 죄를 제거하여 내세에 이루어질 영생을 목표로 한다. 혹 기독교에서 영생의 기복을 목표로 하는 부류도 있는데, 정통 기독교는 영생의 즐거움에서도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즐거움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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