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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훈 목사의 로마서 7장 남은죄에 대한 제시

형람서원 2024. 4. 12.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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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신자에게 죄를 남겨 두셨다

1. 로마서 7장의 “나”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

어떤 사람의 신학 사상을 알려면 몇 가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학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서 7장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이 바로 중요한 신학 사상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역사상 많은 이단들과 오늘날의 이단들, 또한 신학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나"를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나 혹은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 자로 주장한다. 대다수 그들은 로마서 7장을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상 많은 정통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청교도 신학자들과 신앙고백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 이 본문을 통하여 두 큰 사상이 나뉘게 된다. 여기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보느냐, 불신자 또는 성령 받지 못한 자로 보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로마서 7장은 정통과 이단의 중요한 논쟁 대상이었다. 실제로 이 두 큰 사상은 로마서 7장을 통하여 역사상 많은 충돌이 있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에라스무스, 칼빈과 피기우스, 또한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의의 논쟁들이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어거스틴까지의 교부들은 로마서 7장에 언급된 사람을 중생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이 입장을 따랐다. 그러는 중에 펠라기우스파들이 등장하여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협력을 가르쳤다. 409년에 펠라기우스의 주석이 나오게 되자, 412년부터 어거스틴은 로마서 7장을 신자에 해당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교황주의자들은 롬 7:18-23절을 중생한 성도로 해석하지 않고, 단순한 본성(mere nature)을 가진 인간으로 해석한다. 재세례파들은 남은 죄를 부정하며 성령의 인도로 길을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의 후기 견해를 따라 로마서 7장이 중생자의 삶을 묘사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도들 안에 남아 있는 증거로 로마서 7장을 본다. 롬 7:18-23은 신자들의 영육간의 갈등을 말한다. 중생한 자들만이 영혼의 주요한 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져 있다(tend toward with the chief part of their soul).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7:14에 관한 설교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 옹호자로 고발되었다.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알려진 자들 중에서 안토니 후쿠마, 헤르만 리델보스, 베르카워는 로마서 7장에 대한 정통적인 개혁주의 교리와 성경해석을 비판한다. 이들은 칼빈과 달리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자신이 회개치 않고 중생과 거리가 멀었던 율법 아래 있던 시절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Neuser도 로마서 7장을 근거로 한 루터의 말, “우리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또한 칼빈도 루터의 말을 부정했다고 곡해한다. Neuser는 우리는 명백하게 죄 가운데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죄가 우리를 압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죄인”이란 말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신선해 보이는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신선하게 보이는 해석들은 사실, 이단들이 주장했던 해석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 교회들이 다시 힘을 잃고 어두움으로 향하는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단들이 주장한 교리들을 교회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선조들의 역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새롭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 칼빈과 정통 신앙고백에 충실하여 그 교리를 붙잡아야 한다. 분명히 로마서 7장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약간의 차이 같아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이단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6장 5절을 통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요일 1:8,10; 롬 7:14,17,18,23; 약 3:2; 잠 20:9; 전 7:20). 그리고 그 부패함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받고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본성 자체와 본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죄인 것이다(롬 7:5,7,8,25; 갈 5:17)”.

2. 중생한 신자들 안에 남이었는 죄(육)

칼빈은 신자 안에도 아직도 죄가 남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자에게 중보자의 계속적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도 우리 안에 죄가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것을 죄(sin)라고 부르지 않고 연약(weakness)이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하였다. 칼빈은 우리 안에서 욕망(desires)이 생기게 하는 부패성(depravity) 자체를 "죄(sin)"라고 부른다. 성도들은 그들의 육 속에 의와 싸우는 육욕의 부패성(depravity of inordinate desiring)이 거하는 육체 안에 이 살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파를 두려워하여 죄라는 말의 사용을 회피하였다. 그렇지만, 어거스틴도 이것을 죄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칼빈에게, 사람에게 있는 미세한 악의 경향(a slight of inclination)이나 어떠한 생각도 계명을 못 지키는 것이다. 육체의 모든 욕망은 죄다(all desires of the flesh are sins). 욕망이 무질서(disoder)한 것이어서 죄다. 욕망이 과도하기(inordinate, 무절제한, 지나친) 때문에 죄이다. 우리는 평생 죄와 욕심과 연약함의 짐을 질 것이다. 이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주님께 갈 때뿐이다.

칼빈에 따르면, 바울은 '육신'이라는 용어 아래, 성령의 성결케 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 즉 인간 본성의 모든 자질과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영'은 일반적으로 육신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이 말하는 바 '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성령이 악을 깨끗이 씻어주고 그래서 아주 잘 개조된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부분, 즉 영혼 가운데서 중생된 부분을 의미한다. 성도들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육적인 본성의 잔재 속에서 그러한 악의 씨앗들을 발견한다.

영은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육신은 그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믿는 자들은 이러한 욕망들에 의하여 마음이 흩어져 있는 이중의 존재(a twofold being)이다. 영을 다른 말로, 속사람이라고도 부른다. 속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생하게 하신 영혼의 신령한 부분을 의미한다. 지체는 영혼의 남아 있는 다른 부분을 의미한다.

3. 죄가 남겨진 이유

칼빈은 하나님께서 신자들 안에서 완전히 죄의 존재와 부패성을 없애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죄를 남겨 두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본성상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항상 하나님께 빚진 자로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와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알고, 계속적으로 애통하고 비탄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아 있는 죄를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 더욱 용서를 구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더 달려가서 구원을 요구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칼빈은 죄가 남아있는 신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는 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완전은 곧 자기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모든 잘못된 행위들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무한하신 선으로 자기들을 인내해 주시고 심하게 꾸짖지 말아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장 4절은 성도 안에 남아있는 죄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그를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 하나님은 그를 그가 당하고 있는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신다(골1:13; 요8:34,36).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영적으로 선한 것을 그가 자유롭게 결심하며 행할 수 있게 하신다(빌2:13; 롬6:18,22). 그렇지만 그의 남아 있는 부패로 인하여, 선한 것만을 전적으로 결심하지 못하고, 악한 것을 또한 결심한다(갈5:17; 롬7:15,18,19,21,23).” 즉, 중생한 인간은 선한 것을 결심할 수 있으나, 또한 남아있는 부패로 인해 선한 것만을 전적으로 결심하지 못하고, 악한 것을 또한 결심한다고 말한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은 어거스틴과 루터처럼 중생한 신자들 안에도 죄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도 중생한 인간에게도 남아있는 부패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칼빈처럼 이 문서도 성도들이 선한 일도 결심하나, 남아 있는 부패로 인해 악한 것도 결심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칼빈의 신학을 잘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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